[탈성장과 기본소득] ④ 정치적 관점으로서의 기본소득과 탈성장

기본소득은 스펙트럼이 넓은 주장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좌우파를 가로지르며, 기술 가속주의자부터 탈성장 활동가를 아우른다. 그 주장이 종종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글은 기본소득을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오늘날 생태 위기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다.

* 이 글은 지난 2024년 12월 6일(금)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된 〈2024한국기본소득포럼-‘생태-사회-경제’의 단초를 찾아서〉 중 「탈성장과 기본소득」 세션에서 발표된 원고로, 주최 측의 허락을 받아 《생태적지혜》에 게재합니다.

기본소득은 스펙트럼이 넓은 주장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좌우파를 가로지르며, 기술 가속주의자부터 탈성장 활동가를 아우른다. 그 주장이 종종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글은 기본소득을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오늘날 생태 위기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다.

정치적 관점으로서의 임금

먼저 관점으로서의 기본소득을 이야기해보자. 여기서 1970년대에 전개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Wages for Housework) 운동은 좋은 참고가 된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 운동을 단지 가사노동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것으로, 즉 노동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임금을 받기 위한 것 — 이럴 경우 여성은 더욱 가사노동에 매몰될 것이다 — 으로 이해하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가사노동에 대항하는 임금’(Wages against Housework)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여성들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문제를 논의할 때 느끼는 어려움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정치적 관점의 하나로 바라보지 않고 돈다발 같은 하나의 사물로 환원하기 때문”1이라고 적었다. 이 두 관점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단지 돈다발로 환원해서 생각할 경우 그것은 운동과 분리되어 조금 늘어난 소득으로만 이해된다. 그리고 쉽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겨우 이 정도의 돈으로 — 실제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쟁취한다 해도 그리 큰 액수일리는 없을 것이다 — 내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정치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임금은 통장에 찍힌 숫자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자연화된 역할을 탈신비화하고 전복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페데리치가 가사노동’에 대한’이 아니라 ‘대항하는’ 임금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공통화의 자리, 즉 공통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 역시 인류세 시대에 중요한 문제다. 사진출처 : DJ Paine

임금은 어떻게 가사노동에 ‘대항하는’ 수단이 되는가? 페데리치의 말처럼 “가사노동의 차이는 여성에게 강요된다는 점뿐만 아니라 내면 깊이 자리한 여성 특유의 기질에서 비롯된 자연적 속성, 내적 욕구, 열망으로 변신했다는 점에 있다. 즉 가사노동은 부불노동이라는 운명 때문에 노동으로 인식되기보다는 타고난 자질에서 비롯된 행위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2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은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일로 여겨지지 않으며 “여성 특유의 기질에서 비롯된 자연적 속성”이 된다. 따라서 ‘자연적 속성’이 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원한다는 것은 가사노동이 여성 본성의 표현이라는 인식을 거부하”는 일이며,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부과한 자리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다. 요컨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의 주장은 가사노동을 했으니 임금을 지불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여성의 속성으로 자연화된 그 일을 오히려 거부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일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일이 실제로는 자본을 위해 무상으로 수행된 생산적인 노동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거부하기 위한 첫걸음과 같다.”3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이러한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을 돈다발로 환원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 사실 기본소득을 둘러싼 적지 않은 논의가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 정치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 여성에게 자연화된 가사노동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기본소득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화된 노동이어야 할 것이다(나는 지금 노동을 아주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가 생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다면 그건 일자리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일자리를 가져야만 한다. 일은 우리의 도덕적 시민성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즐기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쁘고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다. 그 결과 일은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점점 더 많이 흡수하게 된다.4

임금노동이 우리에게 자연화된 건 분명해 보인다. 일자리를 갖는 건 인간의 의무이자 필연이고 도덕성의 지표이며 유일한 사회화의 경로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일을 하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일하지 않는/못하는 인간을 지시하는 혐오 용어들 — ○○충 — 이 넘쳐나고, 일하지 않는/못하는 인간을 지시하는 용어 자체가 욕이 되기도 하는 이유다. 반대로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성실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올바른 사람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자리다.

이것은 인류세 시대에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기는 까닭에 주변을 돌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노동은 자본주의를 계속 작동시켜 지구를 파괴한다. 요컨대 노동은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일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게 만들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삶의 터전 자체를 망가뜨리는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강제된, 자본의 가치화를 위한 노동을 버리고 자기가치화를 위한 노동 — 혹은 공통장 담론에서 이야기하듯 공통화(commoning) — 의 자리, 즉 공통장(commons)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 역시 인류세 시대에 중요한 문제다.

인간 사회를 재구성하는 다양한 선택지에 대해 논의를 하다 보면, 결국 가치의 문제가 전면으로 나오게 된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은 어떤 기술, 정책, 제도를 채택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다.5

문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레이버는 이를 자유의 문제로 연결한다. “궁극적인 자유는 가치를 창조하거나 축적할 자유가 아니라 (…)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이다.”6 우리가 이 자유, 무엇을 가치화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을 위한 노동 외에 다른 기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소득을 성취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 : irfan hakim

그러면 기본소득은 그 ‘다른 기댈 것’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저렴한 자연’(제이슨 무어)이 끝나가는 이 시대에 생태 위기는 우리에게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적 현상으로 나타난다(그리고 그것이 문제다). 그에 따라 국가적으로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지급된 기본소득이 개인에게는 한낱 푼돈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소득을 돈다발로 환원할 때 나타나는 생각이다. 그러니 기본소득의 정치적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노동이 자연화된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성에게 자연화된 (그래서 강제된) 재생산 노동은 “자연적 속성, 내적 욕구, 열망”, “타고난 자질”이나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로 신비화되는 까닭에 돈을 지불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런 일에 임금을 요구하는 건 신비화를 깨뜨리는 효과를 갖는다. 우리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그 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일 역시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자연화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임금을 요구하는 건 탈신비화의 효과를 갖지 않는다. 일에 대해 임금을 받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본소득 요구가 정치적 효과를 가지려면 그것은 노동과 임금의 연결을 해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일로 자연화된 재생산 노동에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재생산 노동이 노동임을 드러내고 그것을 거부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면, 인간의 의무로 자연화된 노동과 무관한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노동의 자연화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전자가 노동과 임금을 연결하여 자연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후자의 경우 반대로 노동과 임금을 분리하여 자연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기본소득의 정치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건 이 지점이다. 우리는 기본소득을 성취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이 관점을 소거한 기본소득 논의는 돈다발로 환원되어 운동과 분리되고 하나의 정책으로 전환되어 국가가 얼마나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는 앞서 이야기한 것의 반복이다. 겨우 이 정도의 돈으로 내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그것을 거부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면, 노동과 무관한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은 어떤 것인가? 물론 그것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거부하는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거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전혀 아니다. 우리가 노동을 거부한다면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한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하므로 노동의 거부는 그저 거부만이 아니며 새로운 것의 구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존의 (자본의 가치화를 위한) 문제적인 노동을 거부하고 자기가치화를 위한 노동(공통화)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도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에서 노동 거부와 공통장의 구성은 늘 한 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현재의 노동이 생태 위기를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계속해서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앞서 인류세 시대의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라면, 노동 거부와 공통장의 구성은 열심히 일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직접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그러한 일에 금전적으로 큰 버팀목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본소득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노동의 자연화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므로) 다른 삶을 가치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기본소득과 자유

앞에서 다룬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야기한 자유, 즉 자기가치화의 자유는 혼자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즉 자유를 상대에 대한 의무와 함께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레이버는 마르셀 모스를 인용하며 자유와 의무를 선명하게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시장체계가 야기한 환상”임을 강조한다. “시장의 익명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줄곧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익명성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곧, 전적으로 혼자 살기를 원하지 않는 한 자유란 사실 어떤 종류의 의무를 누구에게 지고 살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7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무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였다.
사진출처 : Senjuti Kundu

우리가 생각한 자유는 스스로 가치화할 수 있는 자유 ―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 ― 였다. 그런데 동시에 자유는 누군가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의존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지는 의무란 어떤 형태든 돌보는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가치화로서의 자유는 서로 의무를 지는, 즉 서로를 돌보는 집합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구성될 돌봄-공통장이 탈성장의 기초가 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탈성장은 무엇보다 우리가 노동-임금에 기대지 않고 다른 것 ― 여기서는 노동거부와 한 몸인 돌봄-공통장 ― 에 기댈 때 시작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노동거부는 우리가 청교도주의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며, 우리는 정치적 관점으로 이해된 기본소득이 (노동의 자연화에서 우리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촉매가 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적 관점은 또한 비임금자들 ― 집 안의 여성, 예술가, 장애인 등 (넓은 의미에서) 일을 하지만 임금을 받지 못하는 자들 ― 의 활동에 우리를 주목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들의 활동은 왜 중요한가? 기본소득이 우리를 노동거부로 이끄는 촉매가 될 수 있다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그들이 예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은 노동으로부터의 배제가 열심히 일하며 문제적인 시스템에 ‘기여’하는 삶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내는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본소득 역시 그러한 조건이 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몇 푼 되지 않을 그 돈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자기가치화에 눈을 돌릴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말이다. 또한 과거와 같은 정규적인 일자리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경제 상황은 비임금을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정상적인’ 삶의 조건으로 만든다. 이들에 대한 주목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이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보다는 공적인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적인 지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새로운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가령 우리를 지원금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주체로 만들거나 관료적인 일로 소모시킬 수 있다). 그러니 비임금자에 대한 공적 지원을 늘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공적 지원을 공통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지원 방식을 정하고 우리가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조직하고 국가에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비임금자들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대안적인 조직을 경험하고 있다. 남은 일은 여기에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것뿐이다. 기본소득은 그 활동을 촉진하거나 그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인류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 ― 기본소득으로 어차피 많은 돈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 이라기보다 새로운 삶 형태들이다. 만일 기본소득이 화폐를 지급하여 현재의 삶 형태를 어떻게든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려 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운동이 되고 말 것이다. 기본소득이 생태적·사회적·정치적인 의미가 있다면, 우리를 노동의 자연화에서 빼내어 새로운 삶 형태 ―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 의 구성으로 이끌 수 있을 때뿐이다.


  1. 실비아 페데리치, 「가사노동에 대항하는 임금」, 『혁명의 영점』,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36.

  2. 같은 책, 38-39.

  3. 같은 책, 44.

  4. David Graeber, “To save the world, we’re going to have to stop working,” BIG ISSUE, 2020.9.8.

  5. 줄리아 애드니 토머스·마크 윌리엄스·얀 잘라시에비치, 『인류세 책: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 박범순·김용진 옮김, 이음, 2024, 271.

  6.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서정은 옮김, 그린비, 2009. 202.

  7. 같은 책, 476. 강조는 인용자.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