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을 위해 협동조합은 무엇을 할까?

개발과 성장의 굴레에 갇힌 소비사회에서는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를 피할 수 없다. 자본의 성장신화를 벗어나야만 화려하지 않아도 만물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으니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협동조합은 탈성장으로의 전환을 모색할 때이다.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영 거북하게 들리는 단어가 있어요.” 언젠가 후배 활동가가 ‘성장’을 두고 한 말이다. 비록 활동 경험은 부족하지만 적은 나이도 아니고 나름의 판단기준도 있는데 암묵적으로 획일화된 성장을 강요받는 것 같다는 불만이었다. 발언의 배경과 시점으로 볼 때 동의는 안 되었지만 조금 다른 결로 생각해보면 우리사회는 늘 성공 신화와 이를 향한 성장에 대해 강박을 안고 있다. 어쩌면 그는 협동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강박을 조직적으로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성장이 본래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지 않는가? 자본주의경제의 왜곡된 무한성장이 아니라면…

자연계에서 성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모든 생명체는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 이때 성장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다른 생명체와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성장을 위해서 지원과 보호도 받는다. 그러데 우리사회에서 성장은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 성장의 기준에는 언제나 경제지표가 따른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자본의 무한확장이고 맹목적 물신(物神)이다. 자본은 수단을 넘어 멈출 수도 없고 끝도 없는 목적이 된다. 자원의 소멸과 파괴에 기반한 자본의 확장이 영원할 수는 없다. 저성장 시대로의 돌입은 저출산, 고령화, 자원고갈, 최근 코로나로 인한 소비시장 위축까지 외적 원인이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모순이 한계를 맞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저성장을 검색하면 마치 극복 가능한양 기업경영부터 부동산투자 혹은 투기까지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온갖 대응설이 난무하다.

상대를 알고 정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진정한 돌봄을 그려본다. 
by Nine Koepfer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TOOMkzCFymU
상대를 알고 정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진정한 돌봄을 그려본다.
사진 출처 : Nine Koepfer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 시작된 자본주의는 세계를 뒤덮었고, 우리의 의식은 자본주의적 사고를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테면 숨을 쉬기 위한 공기가 공공재인 것처럼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터전으로 토지도 공공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사상의 불온함을 의심받을 것이다. 노동은 상품화될 것이 아니라 생존과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필요와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행위여야 한다고 하면 정신 나간 소리라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토지와 노동을 비롯하여 모든 상품을 사고 팔 수 있는 화폐는 교환수단 이상 계급을 결정짓는 권리, 권력이 되었지만 당연시된다. 요즘 대두되는 가상화폐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이 또한 투기용 상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문제는 지금의 저성장 기조는 자본주의가 한계를 드러내는 현상인데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암울한 미래를 벗어날 수 없다. 어렵지만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왜곡된 개념을 다시 잡아서 탈성장으로 전환해야 한다. 저성장 시대는 견디며 지나가는 보릿고개 혹은 시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곳곳에서 기후위기 현상이 발생하고 코로나라는 극심한 위기상황을 맞았다. 지금의 위기가 인간중심의 무분별하고 제한 없는 개발과 파괴에서 비롯되었음은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해결책은 여전히 부실하기만 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개발과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적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고의 전환만으로 국가적 경제기반이나 기업의 속성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몇몇의 사람이라도 의식을 전환하고 힘을 모으면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중요한 건 변화가 주는 경험이다. 인간은 경험 없이 상상할 수 없고 상상력은 경험을 바탕으로 발동한다고 한다. 경험은 상상력을 키우고 상상력은 또 다른 시도와 변화를 경험하게 하면서 확장될 것이다. 가시화 된다면 사회적으로도 간접경험의 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 협동조합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겠다. 다행인 건 그나마 협동조합 결사체가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1995년 ICA(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 국제협동조합연맹)는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통의 경제, 사회, 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이다”라고 정체성을 규정한 바 있다. 규정에 따라 운영만 잘 된다면 사회적 대안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협동조합의 구체적인 목적과 지향은 조합의 특성과 조합원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러나 정체성은 모든 협동조합에 적용된다.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자본의 협동을 이루지만 이때의 자본은 성장이 목적이 아니라 공통의 경제, 사회, 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결사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이 결사체로서 단단하게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스스로 필요와 열망을 충족해 나갈 때 무한성장 신화의 소비사회 굴레에서 벗어날 희망이 생긴다.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노동을 협동한다면 이는 돈의 가치로 매겨지는 상품화된 노동이 아니라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행해지는 신성한 노동이 될 것이다. 신성한 노동으로 경제적 협동을 이룰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온갖 달콤한 광고로 불필요도 필요인 듯 강요하고 세뇌하여 과잉 생산하지만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닌 협동조합에서는 진정 필요한 물품을 만든다. 포장도 화려함으로 상품을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 물품보호 기능에 충실하면서 최대한 환경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패러다임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직접 생산을 하거나 돈이 아닌 재능을 교환할 수도 있고 중간유통의 거품을 빼고 직거래를 할 수도 있다. 생산과정에서 이윤추구에 초점을 맞춰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함을 거둬내는 효율로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생겨난 여유는 돈일 수도 시간일 수도 어쩌면 마음일 수도 있겠다. 나를 둘러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 필요한 곳에 돌봄을 실천할 수도 있다. 돈과 물품만으로 행해지는 돌봄이 아니라 상대를 알고 정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진정한 돌봄을 그려본다. 조합원들은 환경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하여 돈보다 앞서 지혜를 모으고 사회적 활동과 함께 작은 생활실천을 나부터 해 나갈 것이다. 이는 전부터 오랫동안 행해졌지만 사회적 위기의식이 커지는 만큼 공감대 형성도 확산될 것이다.

협동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일을 고민하고 해결해 나간다. 물신을 거두고 지금보다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다. 자본주의의 위력으로 무너지고 훼손된 자연이 회복 불능 상태로 떨어지기 전에, 생존의 위협으로 사람들의 심성이 더 이상 황폐해지기 전에 돌이켜야 한다. 탈성장 사회로 진입하여 자본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협동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꼼지

학교 다닐 때 꼼지락거린다고 붙은 별명인데 남편이 30년째 부르는 애칭이 되었음. 지금도 여전히 꼼지락거리며 한살림 조합원과 함께 지역활동을 펼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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