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을 통해 본 내 안의 가부장

왜 여자들의 가사노동은 임금 지급이 되지 않는 걸까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그 역사적 배경을 개략적으로 알아보고 개인적인 삶의 현장, 일상에서 벌어지는 복잡 미묘한 가사노동에서 내 안의 가부장을 발견하는 이야기.

돌봄과 생태주의 : 가사노동에 임금 지급을! 운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직장생활 하는 내내 ‘아내가 필요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전일제 근무를 33년간 하며 결혼하고 두 아이를 어린이집과 방과 후반에 맡기고 양육했다. 저녁 6시 퇴근해서 사무실 책상을 떠나, 어린이집이나 방과 후 교실에서 아이 찾아와 집 부엌의 조리대 앞에 서면 6시 40분이었다. 교대 근무가 아니라 급여 없는 업무의 시작이었다. 빠르면 10시, 늦으면 11시까지 집안일, 육아는 이어졌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휴가는 7월 말이나 8월 초 1주일, 아이들 어린이집 휴가와 완벽히 일치했다. 1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나날이었다.

언제나 이상했다. 나는 회사에서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며 월급을 받는데 집에 와서 집안일이라는 음식 만들기, 집 관리, 청소, 빨래하고 아이를 돌보는 데는 급여가 없었다. 어린이집에 맡기면 나는 돈을 주는데 내 아이를 몇 시간이고 돌봐도 그건 당연히 무급이었다.

집안일은 집 밖의 인력을 이용하면 국내총생산에 포함되는 경제의 부분이다. 음식을 배달해도, 청소를 부탁해도 국내총생산에 잡힌다. 그런데 집안 인력의 노동은 국민총생산에 잡히지 않는다. 통계청이 2021년 6월 위성계정으로 발표한 2019년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는 490조 9천억 원이다. 여성(1380만원)이 남성(521만원)보다 2.6배 많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은 경제활동의 가치가 우리나라 전체 경제 규모의 4분의 1에 이른다는 얘기다. (한겨레신문 2021.6.23.) COVID-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회 구성원 모두 더 절실히 느끼지 않았을까. 먹고 치우고 집안을 관리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배달 음식에는 돈을 지급하면서 왜 집밥은 그냥 만들어지는 걸로 생각할까. 밥 한 끼를 얻고 깨끗한 욕실, 정리된 침실을 유지하는 데 돈이 든다는 걸 아는데 왜 엄마에게는, 가정주부에게는 돈을 지급하지 않는 걸까. 왜 여자들의 일은 보조적인 노동으로, 하찮은 수입으로 간주하는 걸까. 요즘 아이들은 배달 노동자가 밥을 가져다주는 걸로 생각한다는데, 차라리 그게 나은 방법일까.

엥겔스는 여성이 가부장적 구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재진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by Austrian National Library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t5qnrCVkUz8
엥겔스는 여성이 가부장적 구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재진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진 출처 : Austrian National Library

남자 청소노동자들이 새벽에 일할 때 아내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걸 티브이에서는 또 아내의 사랑이라고 감동적인 가족 사랑으로 묘사한다. 힘든 남편을 위해 도와주는 거라고. 아내의 노동은 무보수인데. 요즘은 바뀌었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학부모, 특히 엄마는 학교에서 언제나 가용한 노동력이었다. 급식 시간의 배식,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위해 나도 휴가를 내야만 했고, 당시에도 2시간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때는 체육대회, 녹색어머니회, 급식실 품질관리에, 고등학교 때는 시험 감독까지 엄마의 무보수 노동을 요구하는 곳은 많기도 했다.

왜, 이렇게 여성의 일은 임금을 지급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된 걸까. 사회학자 마리아 미즈는 그의 책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엥겔스에게서 그 이론적 기원을 찾는다. 엥겔스는 여성이 가부장적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재진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가사노동은 비생산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여성은 임금노동 부대로 들어감으로써만 역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가사노동을 하면 역사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회주의 이론에 무지한 나도 미즈가 정리한 엥겔스의 주장을 보면 임금노동자만 착취당하고, 사적인 ‘가사노동’은 착취당하지 않는다는 허약한 논리임을 알아볼 수 있다. 여성이 사회적 생산 혹은 임금노동에 진출한 이후에는 개인적 가사노동을 통해 여성은 임금노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어떻게? 가사노동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으니 여러 곳에서 논리적 모순이 드러난다. 임금노동만이 생산적인 노동이라는 이 뿌리 깊은 오해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회사 다니면 능력 있고, 종일 가사노동, 돌봄노동으로 앉을 시간 없이 집안일을 해도 무급이니 능력이 없다고 간주한다.

프랑스 혁명의 표어 가운데 하나였던 ‘우애(박애)’가 단순히 시민들 간의 사회적 유대 혹은 남성적 결속만이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온 사회의 헤게모니 권력관계의 변형이었다는 정치학자인 캐럴 페이트먼의 연구를 니발 데이비스의 『젠더와 민족』을 읽고 알게 되었다. 가부장제에서 아버지는 다른 남성과 여성을 지배하고 남성들은 사적으로 자기 여성들을 위에서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 공적으로는 자기들끼리 평등하다는 사회질서의 계약에 동의한 것이라는 연구.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우연히 배제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 체제와 그 구성원인 시민들 (남성들, 주로 백인 남성들) 간 거래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 집에 있는 여자는 네 마음대로 하라. 네 것이니까. 우리 것도 아닌 그 ‘박애’를 당연히 여자도 포함되었다고 여기며 프랑스 혁명의 벅찬 이념 중의 하나로 오랫동안 알고 있던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재산이 없는 농장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존재해본 적이 없는 가족이 강제적으로 주어지면서 노동계급 내에 부르주아식 핵가족이 창출되었다. 이후 남성 노동자의 월급 인상을 위해 아내와 자녀가 이용되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가정주부가 되는 과정은 모든 산업화하고 ‘문명화’된 국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나오는 이야기다. 또 미즈는 급속한 산업화로 많은 소련 남성들이 도시의 공업중심지로 가게 되면서 국영공장 노동력의 50%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게 되었고, 가사노동도 책임지게 되면서 정치집회는 참가할 시간이 없었던 소련 여성들이 다자녀 출산 거부를 통해 일이 두세 배 증가하는 것을 예방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생생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출산파업. 불과 몇 십 년 만에 인구감소로 인한 세수 부족과 시장축소가 걱정인 정부는 각종 자잘한 혜택을 주면서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돈 몇 푼에 예전처럼 공동체가 한 아이를 길러주는 것도 아니면서 한 개별경제조직인 가정이 오롯이 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분노와 두려움을 국가만 모른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인 분홍색 좌석에 쓰여 있는 문구는 민망을 넘어 그 폭력성에 내가 뺨을 맞은 듯 얼얼하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재생산 노동을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회에서 재생산 중인데도 재생산을 담당하는 몸보다 재생산물에만 관심이 있는 사회의 태도가 두렵다. 재생산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넘어 보이지 않는 몸. 이렇게 국가에서 여성의 돌봄과 육아가, 재생산이 중요하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왜 휴식을 통한 충전에 필수적인 가사노동과 육아에는 급여를 지급하려 하지 않는가? 급여를 주지 않는 노동에서 얻는 이익은 국가와 자본이 챙기면서.

한편 여성 스스로 가부장제 시스템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복무해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마지 피어시의 SF 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읽으며 절실히 깨달았다. 미래 시간여행 중 유토피아에서 호르몬 조절로 어머니가 된 가슴이 빈약한 남자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걸 보며 주인공 코니는 “어떻게 감히 남자가 그 기쁨을 공유한단 말인가”며 화를 낸다. 어떻게 남자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느끼는 그 친밀감을 여자와 공유할 수 있냐는 것. 코니는 여성의 마지막 피난처를 남자들에게 내주었다면서 분노한다. 코니의 모성에 대한 환상이 우습기도 하면서 안타까웠다. 코니도 수유, 육아, 출산을 안온한 휴식처가 아닌 피난처라고 인식하면서. 여자들은 삶이 너무 힘드니까 순간의 위안을 피난처 삼아 잠시 쉬면서, 남자가 생물학적으로 할 수 없는 일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이를 배타적으로 수행하면서 가부장제 유지에 큰 몫을 해온 것일까? 남자들은 이런 숭고한 일을 할 수 없으니 우리가 하겠다고, 남자들이 만들어 내는 모성 신화를 스스로 믿어가면서. 남자들이 어떻게 부엌일을 하느냐며 아들을 거실로 모는 시어머니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라고 예외 아니었다.

4인 가족을 위한 음식 만들기는 라면 끓이는 일을 제외하고 대부분 내가 하는 일이었다. 그릇 정리, 부엌 정리는 직장 다니며 아이들 키우는 동안 시간이 없어 아주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최우선으로 하던 일도 아니었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분야이고 즐기지 않는 일이 되었다. 남편이 퇴직한 후 설거지한 그릇을 정리하거나 부엌 정리를 하면, 화가 났다. 어찌 되었든 일을 하고 있으니 겉으로 뭐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 화를 삭여야 했다. 내 일을 해주는데 왜 화가 났을까. 왜 부엌일은 내일이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잘 하지 못하는 부엌 정리를 남편이 평가하는 것 같았고, 더 큰 이유는 부엌은 내 영역이니까 침해받지 않고, 온전히 내 책임이라는 생각. 지금 생각하면 그냥 알량한 권력 행사였다. 내가 완벽하게 하지 못해도 내가 원하는 위치에 놓고, 내가 아는 위치에 그릇이 놓여있는 게 편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으며 간섭받고 싶지 않은 거였다. 나만의 권력을 완벽히 행사하려면 부엌일은 온전히 내 일이어야 했다. 4명의 성인이 함께 사는 집의 부엌일이 한 사람의 일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4명의 성인이 함께 일해야 하는 공간이고,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

‘여성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내가 직장생활 내내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을 뒤표지에 적은 책 『아내 가뭄』의 저자 애너벨 크랩은 ‘우리가 가정 내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려면 제대로 부여해야 한다. 즉, 여자들이 가사노동의 대가를 못 받는다고 통탄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가사노동을 별로 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대단한 부엌 통제권을 가족 구성원 모두와 분담하는 일도 훈련이 필요했다. 큰아이의 취업과 남편의 퇴직 이후 공유 부엌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음식 만들기는 이제 나와 딸, 남편이 함께 꾸려간다. 아직 학생인 아들을 위한 음식 만들기는 주로 내가 하지만 직장인인 딸도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재료를 보관하고, 식기 정리를 한다. 요즘은 자주 남편도, 아들도 간단한 음식, 라면이나 있는 음식을 데워 먹는 정도의 음식 준비는 스스로 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조금씩 각자 부엌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가길 바란다. 음식 만드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길 바란다.

음식을 만드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 그 어느 것도 남자가 하는 일, 여자가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로만 부르짖으면서 내 안의 가부장을 보지 못한 거였다. 내가 살던 세상이, 내가 해온 생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세상, 다른 생각에 마음을 열고 상상해보는 일을 기꺼이 해보는 것, 더 늦지 않아 다행이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할 것을 국가에 요청하는 한편 개인적인 내 삶의 현장에서 노동에 대한 나의 태도를 언제나 다시 돌아보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국가에서 가사노동에 어떻게 임금을 지급하냐고? 기본소득이든 기초소득이든 국가가 연구해서 할 일이다.

생강

몸을 따뜻하게 해주면서도 알싸한 향이 일품인 생강 같은 글을 쓰면 좋겠다. 지구에 쓰레기를 얼마나 덜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한다. 매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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