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⑦

2023년 설날 연휴, Covid-19 펜데믹 이후 3년 만에 위험과 절망을 끌어안은 아버지와 내가 서로의 곁에 머무르기로 했다. 3년 만에 3박 4일의 병원 내 아버지 돌봄이 서로에게 어떤 시간이 될지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Ⅷ. 위험과 절망 곁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돌봄

2023년 1월, 역시 데자뷔가 아닌 역사의 반복이 맞다.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Covid-19 펜데믹 이후 1년 주기로 연초엔 꼭 백수가 되는 것만 같다.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한옥학교도 수료했고 짧지만 한옥목수 경험도 있으니 배운 기술과 짧은 이력마저 아까워 유사 업종에서 일을 구하려던 차였다. 마침 한국문화재재단에서 공모하는 「2022년 문화유산 산업 인턴 지원 사업」을 알게 되어 ‘문화재 보수’ 분야 중 ‘직주근접’이라는 조건에 맞는 〈수원 화성행궁 복원사업 현장〉을 1순위로 해서 지원했다.

다행히 최종 합격하였고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 간 해당 현장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수로 일하진 않았고 주로 현장 사무실에 출근하여 PC 앞에 앉아 공무(工務)로 일하며 가끔은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고 안전 점검을 했다. 심지어 여름엔 현장에 무성하게 돋아난 풀들을 제거하기도.

공교롭게도 인턴으로 근무한 지 한 달 만에 공사가 중지되었다 ⓒ동그랑
공교롭게도 인턴으로 근무한 지 한 달 만에 공사가 중지되었다 ⓒ동그랑

문화재 복원과 더불어 전반적인 한옥 건축 과정을 현장에서 좀 더 배워보고자 했던 기대와는 달리 현장은 공교롭게도 내가 인턴으로 근무한지 한 달 만에 공사가 중지되었다. 설계변경 등 복잡한 이유로. 그 후로 인턴 기간이 종료되는 9월까지 무려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공사 중지된 현장에서 거의 하는 일 없이, 때론 무의미한 일, 내 직무가 아닌 일 – 여름날 무성한 풀을 제거하고 장마철에 막힌 배수로를 뚫는 일 등 – 을 하며 출퇴근을 반복했다. ‘문화재 돌봄’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내겐 그야말로 ‘불쉿 잡(bullshit job)’1이었다.

비록 ‘불쉿 잡’으로 끝이 났지만 시작은 ‘문화재 돌봄’이었고 거의 동시에 새로운 돌봄 대상도 찾았다. 한옥목수를 하던 때와는 달리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에 평일 저녁과 주말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머지않은 때 지역 이주를 고민하던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농사를 배우기로 했다. 마침 집과 가까운 ‘대야미’라는 동네에 〈자립하는 소농학교〉가 있어 그곳에서 한 해 농사를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새로운 돌봄 대상은 바로 식물, 먹을 수 있는 작물이다.

〈자립하는 소농학교〉는 “한 해 동안 생명순환농사와 소농을 실천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실습 학교로, 최소한의 농기구를 사용하여 내 몸을 땅과 가까이 하고 이 시대의 대안으로 소농철학을 가슴에 새기는 과정”2이다. 아내와 나 둘 다 농사는 처음이었다. 나는 평일엔 ‘문화재 돌봄’을, 주말엔 ‘작물 돌봄’을 때론 놀 듯 때론 수행하듯 하며 실패하기도 작은 성장에 흐뭇해하기도 했다.

(좌) 〈자립하는 소농학교〉에서 모내기 중인 사람들. (우) 〈자립하는 소농학교〉에서 함께 작물을 돌보는 13명의 동기들 ⓒ자립하는 소농학교
(좌) 〈자립하는 소농학교〉에서 모내기 중인 사람들. (우) 〈자립하는 소농학교〉에서 함께 작물을 돌보는 13명의 동기들 ⓒ자립하는 소농학교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환경도 서로 다른 13명의 소농학교 동기들은 한 해 동안 작물을 돌보기도 했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개개인의 취약성을 알아가고 의존하면서 일시적이나마 서로를 돌보는 관계가 되었다. 돌아보면 지역 이주를 준비하는 과정 중 하나로 농사(소농)를 배우며 우리는 농사법보다는 관계와 철학을 더 많이 배운 것 같다. 어쩌면 삶의 터를 옮긴다는 것,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농사법 보다는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인정하려는 진심과 나와 자연(환경)의 관계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철학이 더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사실 지역 이주 고민의 시작은 아버지의 남은 삶에 대한 고민으로부터다. 그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이 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다. 언젠가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물었다. “아버지, 어딜 제일 가고 싶어요?” 희망고문 같은 질문이란 걸 알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은 남은 그의 기억과 의지와 희망을 직접 듣고 발견하고 싶었나 보다. 물론 그의 대답은 “순천 집”이었다. 책임을 느꼈다. 돌보는 자로서. 때론 그로부터 돌봄을 받는 자로서. 언제고 돌아가시기 전에 그를 모시고 당신이 살던 순천 집에 다녀와야겠다 다짐했고 동생과 당사자인 아버지와 약속까지 했다.

순천 시골집에서 작물과 닭들을 돌보던 아버지 ⓒ고미랑
순천 시골집에서 작물과 닭들을 돌보던 아버지 ⓒ고미랑

2023년 올해 일흔을 넘긴 그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없었고 당장 지역 이주가 아니더라도 날이 따뜻해지면, Covid-19 감염재생산지수가 낮아지고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올 심산이다. 비록 수 년 간 방치된 순천 집에 당신이 살 순 없더라도 방문이라도 한다면 그는 어떤 눈빛, 숨소리, 더듬거림, 손짓, 발짓, 몸짓으로 반응할지 몹시 궁금하다. 그에게 삶의 터를 옮긴다는 것, 시설(요양병원)에서 벗어나 집에서, 동네에서 이웃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립하는 소농학교〉에서 농사법보다는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인정하려는 진심과 관계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철학을 배웠다는 것처럼 그의 곁에 이런 진심과 철학을 공유하는 이웃들과 관계망이 있다면 그는 집에서, 동네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꼭 순천 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불쉿 잡’ 인턴이 끝난 2022년 9월부터 2023년 1월 현재까지 약 5개월 동안 위와 같은 지역 이주 계획과 아버지 돌봄 사이에서 나는 돌봄과 노동의 위기를 겪는다. 아니 그 전부터 반복적으로 겪던 위기다. 심지어 거기에 관계의 위기까지 보태지면서 삶 자체가 위태로웠다. 그 위기에는 내가 직접 가담하여 원인을 제공한, 말하자면 자초한 위기도 있고 나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Covid-19 펜데믹이나 취약한 조건으로 발생한 위기도 있었다.

돌봄과 노동과 관계의 위기 속에서 허둥대며 위태롭게 일상을 살아가던 나를 안정시키고 안도하게 한 건 나처럼 위험과 절망을 가진 한 존재였고, 위험과 절망을 가진 이 세계였다. 어쩔 수 없이 누구나 겪게 되는 그 위험과 절망을 끌어안고 곁에서 서로를 책임지며 돌보던 ‘너’였다. 비록 이 세계가, 사회가 위험과 절망으로 치닫고 있더라도 한 모퉁이에서 서로를 책임지려는 작고 귀여운 ‘친구들’이었다. 아버지 역시 내 주위의 누구보다 그 몸과 마음에 위험과 절망이 문신처럼 뚜렷이 새겨져 있는 존재일 것이다. 당신이 속한 사회가 위험과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지 모를 테지만, 적어도 곁에는 위험과 절망을 함께 끌어안고서라도 당신을 책임지며 돌보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느끼길 바란다.

다가올 2023년 설날 연휴, Covid-19 펜데믹 이후 3년 만에 위험과 절망을 끌어안은 아버지와 내가 서로의 곁에 머무르기로 했다. 3년 만에 3박 4일의 병원 내 아버지 돌봄이 서로에게 어떤 시간이 될지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1.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 하는 직업 형태”_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김병화 옮김, 민음사, 2021., 44.

  2.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자립하는 소농학교> 소개 글.

동그랑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대학 졸업 후 개신교 선교단체 간사로 3년 간 일하다 2016년,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자 하던 일을 관두고 격주 주말과 명절 연휴 때마다 병원에 들어가 그를 돌보게 된다(최근 3년간은 Covid-19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인연으로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일상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사무국장으로 1년, 이후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모여 만든 청년협동조합으로 이직해 커뮤니티 매니저로 3년을 일했다. 2021년, 기술을 배워봐야겠다 싶어 한옥목수 일을 배우고 실제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초보 한옥목수로 일을 하다 열악한 근무여건(근로기준법 미준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결국 그만두게 된다. 짧게라도 배운 기술과 일 경험이 아쉬워 비록 목수는 아니지만 2022년엔 수원 화성행궁 복원 현장에서 인턴 공무로 6개월 간 일했다. 2023년 현재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활동가로, 프리랜서 작가 및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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