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라는 커다란 장벽
증기기관으로 촉발된 산업혁명의 시대로부터 대략 25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인류는 세 번의 산업혁명을 경험했고, 이제 네 번째 산업혁명을 이야기합니다. 인류의 복지에 기여할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를 장려하여 경제성장을 일궈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핵심 동력은 과학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의 과학기술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삶과 연결되었고, 현재는 삶의 거의 모든 조건들을 통제함과 동시에 새로운 조건들을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듯이, 이런 일들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미래는 기술이 인류에게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기술에 적응해야 한다는 전망이 힘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by Franck V.
그러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던 과학기술이 기후변화라고 하는 커다란 장벽을 만났습니다. 더 발전된 과학기술로 이 장벽을 넘어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장벽에 적응하여 우리 삶의 방식을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장벽이 너무 높다 보니, 지레 비관하고 체념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정답은 더 발전된 과학기술의 ‘과감한 적용’과 ‘신속한 사회의 전환’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더 있습니다. 정답을 찾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과감하고 신속한 전환’을 위해 의사결정을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제안들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 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술 중심의 다국적기업들이 계속 덩치를 불리면서, 의사결정의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이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rlock)은 한 인터뷰에서 “기후변화는 전쟁만큼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한동안 민주주의를 보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얘기한 것이지만, 기후 위기가 문명의 위기임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위기일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과학기술의 통제에 대한 논쟁은 오래된 주제
과학기술의 발전에 잠재되어 있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논쟁은, 역사가 비교적 오래 되었습니다. 17세기 유럽으로 가보면, 이 시기 유럽인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너저분한 전쟁’이라고 평가받는 ‘30년 전쟁’을 막 지나왔습니다. 종교를 중심으로 한 난해한 관념론과 봉건시대의 잔재가 뒤섞인 이 전쟁으로 인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대안적이고 합리적인 논의 체계를 갈구했는데, 승자는 뜻밖에도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젊은 과학자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런던 왕립학회를 설립하고, 자명한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에만 집중하는 공통의 논쟁 기반을 마련하여 관념주의를 넘어서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실증적인 논의 체계를 강조하는 기틀이 수립된 것입니다. 이런 기틀은 점차 실용성이 추가되면서, 근대 과학기술 발전의 의식 체계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서구 과학기술은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견인해냅니다. 돌이켜 보면, 증기기관에 대한 아이디어는 동아시아와 중동에서도 오래 전에 제기 되었지만, 이 시기 유럽에서 먼저 발현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의식 체계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논의를 통해 의사결정의 개방성과 합리성을 주장했던 보일의 제안을 모든 과학자들이 수용한 것은 아닙니다. 당대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실증적인 논쟁의 필요성은 동의했지만, 사실의 생산 과정에 숨어있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했습니다.
과학지식이 원칙적으로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하다고 간주하나, 시민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 학술지들은 공공 도서관에 비치돼 있으나, 그것들은 시민들에게 낯선 언어로 쓰여져 있다. 실험실들이 가장 개방된 전문직 종사자들의 공간들 중 일부라고 말하나, 시민은 거기에 출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민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해명을 촉구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는 가장 열린 지식 형식이 실제로는 가장 폐쇄된 것이 되었다.”

by John Schnobrich
350여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현대적인 관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기술들은 사용자의 편의성을 극대화했지만, 반대로 그 기술들의 면면은 블랙박스화 되어 사용자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해 보면, 복잡하게 얽혀서 작동하는 기술들은 계기판을 통해 여러 사실을 전달해 주지만, 운전자는 그 사실을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적절한 사용법을 숙지하는 것이지요. 매뉴얼에 나와있는 대로 시동을 켜고 엑셀레이터를 밟고 도로교통법에 맞게 운전함으로써 자동차는 제대로 작동하지만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는 전문가만이 알고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계기판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우리는 가던 길을 돌려서 카센터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을 따르는 것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기후시스템은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그러니 일반 시민은 운전석에 앉을 수 없고,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최고로 훈련된 전문가들의 통제에 따라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아들인다면, 기후위기에 직면한 시민의 역할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