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기술 전환과 시민의 참여➁

2017년 논란이 컸던 탈원전 이슈를 기억하시는지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인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 문제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한국 사회에 생경한 의사결정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른바 ‘숙의민주주의’라고 불리던 것인데요, 큰 틀에서 보면 이 방식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 전환 과정에서, 기술의 역할과 통제 방식에 대한 의사결정의 내용과 형식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2019년 12월 생태적지혜연구소 주최로 실시한 〈기술의 전환, 전환의 기술〉 세미나에서 발표하였던 '과학기술과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여, 기술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시민의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홀로그램 방식으로 강연하는 유발 하라리 교수. TED유튜브 화면 갈무리.
홀로그램 방식으로 강연하는 유발 하라리 교수.
TED유튜브 화면 갈무리.

2018년 4월 캐나다 밴쿠버의 테드(TED) 콘퍼런스에서 매우 인상적인 강연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2015, 김영사)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히브리대 교수)의 강연이었는데, 제목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왜 파시즘은 그렇게 매혹적일까? 그리고 우리의 데이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Why fascism is so tempting – and how your data could power it). 강연의 효율성을 위해 직접 출연하지 않고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그는 이 강연에서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IT 기술의 혁명적 발전은 독재를 더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하라리 교수의 경고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나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으면서도 그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이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점점 더 강력해지는 이 플랫폼들은 누구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까?”

지난 편에서 과학기술의 엘리트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과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기술 전환과 시민의 참여①)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는 기술(Technology)과 관료(Bereaucracy)의 합성어로 과학적 지식이나 전문적 기술을 지닌 기술관료 혹은 그들에 의한 체제를 의미합니다. 기술혁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자/기술자/경제학자 등의 테크노크라트가 사회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과학기술과 민주주의의 이질적인 접합면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성격상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 다수결 같은 민주주의의 원리로 운영될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오류의 확산을 방지하고 있지만, 논쟁은 소수의 전문가들 간에만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조건을 결정하는 시대에, 시민이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권을 갖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크게 결핍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라리 교수가 경고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과학기술과 관련된 주요한 의사결정에 시민의 지성과 판단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by gdsteam https://www.flickr.com/photos/gdsteam/35038235924/
과학기술과 관련된 주요한 의사결정에 시민의 지성과 판단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gdsteam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 이후, 과학적 분석과 발견의 대상은 가치가 배제된 ‘사실물(matter of fact)’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런 인식이 과학기술 산업에 강력한 울타리를 제공해 주었고, 그 결과 과학은 다른 분야의 간섭이 없는 안전지대에서 눈부실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사회학(Sociology of Science)을 개척하고 있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교수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다른 관점을 제안합니다. 최근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GMO, 핵발전소, 온실가스 과다배출 등의 기술적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관심물(matter of concern)’이므로, 사실물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물이 실험실과 과학자 집단 내에서 다루어지는 대상이라면, 관심물은 그보다 확장된 형태의 공동체에서 시민과 여러 이해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다루어야 합니다. 2015년 자료를 보면, 한국은 18조 9천억 원의 세금을 국가 R&D 사업에 투자하였습니다. 그 외 민간투자에 대한 세금 감면과 같은 간접투자액도 상당합니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과학기술의 결과물에 대한 논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투자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해야 시민의 지성과 판단을 과학기술과 관련된 주요한 의사결정에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은 한국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1990년 이후 유럽과 북미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는데, 아래의 그림은 지식의 생산과정에 대한 참여 정도와 후원 여부를 기준으로 여러 활동들을 구분한 것입니다.

시민의 과학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 (Bucchi & Neresini, 2008)
시민의 과학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 (Bucchi & Neresini, 2008)

여러 가지 방안 중에서 가장 많이 시도된 것은 숙의민주주의 방식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몇 년 전 원자력발전의 지속 여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논의도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따라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방식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 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합의 회의
consensus conference
  • 무작위로 선정된 10~30명의 패널이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과학 기술 안건에 대해 평가
  • 질문의 도출과 질문에 대응할 전문가 선정의 자유. 공청회와 보고서는 공개
  • 두 차례 예비모임과 3~4일간의 본행사를 거쳐 보고서 제출과 기자회견
시나리오 워크숍
Scenario workshop
  • 지역 차원에서 미래의 가능한 발전을 전망하고 평가
  • 24~32명으로 구성. 주민, 기업, 지방정부, 기술전문가의 4 그룹이 동등한 숫자로 편성
  • 1박 2일의 워크숍을 통해, 주제별 구체 행동과 행위자들의 과제 등의 권고안 작성
시민 배심원
Citizens’ jury
  • 특수한 정책 또는 결정 문제에 대해 시민집단으로부터 숙의를 거친 제안을 활용
  • 15~20명이 미리 정해진 질문들에 대해 공동 제안 도출
  •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 촉진자가 과정을 진행
숙의적 여론조사
Deliberative opinion poll
  • 과학적 확률 표집을 통해 대표성을 갖는 시민들을 선발
  •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하게 한 후 참여자들의 의견을 조사
  • 1차 2000~3000명의 의견을 수집하고, 2차 200~300명의 표본을 추출해 쟁점 토론 및 의견 수집
포커스 그룹
Focus group
  • 6~12명의 참여자를 선정 (일반 시민, 대표성 있는 이해 관계자들 등)
  • 대면접촉 워크숍을 통해 쟁점 안건을 토론
  • 참여자들의 이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세밀한 보고서를 작성

표에서 보듯이, 한국이 채택한 방식은 합의회의를 기반으로 규모를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론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각의 방식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빈 구석들을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참여하는 시민들의 대표성에 대한 논란은 방식과 관계없이 매번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완이 필요하다고 해서 폐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향후 시민 참여 방식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실험이 깊어질 것이고, 그에 맞는 의사결정의 틀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전병옥

기술마케팅연구소 소장. 고분자화학(석사)과 기술경영학(박사 수료)을 전공. 삼성전자(반도체 설계)에서 근무한 후 이스트만화학과 GE Plastic(SABIC)의 시장개발 APAC 책임자를 역임. 기술의 사회적ㆍ경제적 가치와 녹색기술의 사회적 확산 방법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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