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마음의 위기다 – 생태신학과 생태회심을 중심으로

지구의 파괴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체적인 관계를 끊어버리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망가뜨리며, 인간과 초월적인 세계의 총체적 관계까지 허물어뜨리고 있다.

제가 환경오염과 생태파괴의 실체를 끔찍하게 체험한 때는 둘째 아이를 낳고 막 100일 잔치를 마치고 난 직후입니다. 2002년 봄부터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아기가 가려워서 제대로 잠을 못 이룬 채 자신의 몸을 긁어대다가 어슴푸레 동이 틀 즈음 몸을 뒤틀며 악을 쓰는 모습에 저도 미쳐갈 것만 같았습니다. 일분일초, 하루하루가 당혹감과 가슴 아픔으로 채워졌고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심각한 물음이 제 삶을 덮쳐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젖먹이 엄마로서 20년쯤 전 기후위기와 생명위기와 마음/정신위기를 한꺼번에 맞았습니다.

허둥지둥 병원에서 진찰받고 받아온 연고와 내복약은 아기의 증세를 2-3일쯤 가라앉혀 줄 뿐이었고, 연고와 약을 끊으면 오히려 가려움과 피고름 증세가 더 폭발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그 까닭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왜 아기들이 태어나서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는지를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파고들었습니다. 그렇게 더 깊고 근원적인 연유를 알아가면서 저는 더디지만 견고하고, 답답하지만 확실한 치료법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갔습니다.

그 인고의 시간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작동하는지 힘겹게 깨닫는 날들이었습니다. 특히 제 아기가 맞닥뜨린 병은 사람들이 ‘행한 대로 업에 대한 대가를 받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속사정을 낱낱이 따져보면 얼마나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인지요. 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과 그것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생명체)들이 전혀 얼토당토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지 미처 1년도 안 된 아기들이 왜 ‘아토피성 피부염’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걸까요?” “왜 아마존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가뭄과 홍수 속에서 굶주리다가 삶터를 쫓겨나는 것일까요?” “바다 속에서 헤엄치며 살던 고래 뱃속에 왜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 차 있는 걸까요?” “에스키모와 북극곰은 왜 지금까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오던 대로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까요?” 저는 지난 20년 동안 거듭거듭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접하고 마음이 부서지는 느낌 속에서, 지구생명과 생태신학을 공부하며 살아왔습니다.

작년에는 ‘아토피성 피부염’만큼이나 생소한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낯선 상황을 마주했고, 전 세계인은 더 이상 지구생태계의 위기상황을 남의 일인 양 모른척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구인 모두가 기후위기와 마음위기라는 절벽 앞에 속수무책 서 있었고, 올해도 마찬가지 모양새입니다. 우리는 모두 20년 전 아기의 발작에 같이 정신이 무너져갔던 저처럼 기후위기와 마음위기를 겪으며, 지구생명이 나와 모든 존재들과 뗄 수 없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생태신학이 말해주는 것

모든 생명가진 것들과 인간이 창조의 시작 때부터 깊은 유대감 속에 있었다. by Rajesh Rajput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MWp6OKW5tWk
모든 생명가진 것들과 인간이 창조의 시작 때부터 깊은 유대감 속에 있었다. Rajesh Rajput

이제 생태신학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원죄’라는 그리스도교 용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아담과 이브’의 죄를 말하지요. 전 인류의 선조가 저지른 ‘원죄’ 때문에 결국 우리 모두는 에덴동산은 구경도 못한 채 태생 죄인으로서 고통스런 노동과 임신-출산을 겪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노라고 교회와 창조신학은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생태신학은 ‘창세기’에서 원죄가 아니라 ‘원복’을 바라보라고 알려줍니다. 하느님은 매정하고 야박한 분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에게 풍요로운 관계망을 열어준 분이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일곱 번이나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0.12.25)”고 하십니다. 창공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0)”, 온갖 식물과 풀, 과일나무를 만드신 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2)”고 나옵니다. 낮과 밤, 태양과 달, 별들을 만드신 후에도, 바다의 물고기, 땅의 동물, 새들을 만드신 후에도 여전히 흡족해하시며 같은 말씀을 하시지요(창세 1,25).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좋았다’라는 뜻은 ‘마음에 든다, 사랑스럽다’라는 뜻이요, 그것은 그만큼 하느님이 무엇을 지으실 때 사랑을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도 아름답다는 것이고,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데는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에서 정성을 다하여 지으셨기 때문입니다.”1

생태신학은 이처럼 모든 창조물을 축복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권유합니다. 또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창세 2,20)는 구절을 통해서는, 모든 생명가진 것들과 인간이 창조의 시작 때부터 깊은 유대감 속에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태초부터 자연스러웠던 연결 관계를 잊은 채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나 의식 없이 인간중심주의를 신봉하고 시장자본주의야말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자연과 동식물을 우리의 소중하고 평등한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 삶의 풍요와 편리를 위한 수단이고 자원일 뿐이라고 치부해왔습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연결과 공존이 아닌 분리와 착취를 당연시하며 지구의 독재자로 군림해왔습니다.

이런 주제파악 못하는 어리석고 오만방자한 인간을 위해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을 인간 세상에 보내셨다고 신약성서는 말하지요. 그렇게 인간 몸을 취해 오신 분이 나자렛 예수입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는 로마제국 식민치하 유대 땅의 갈릴래아 촌 지방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과 단절된 채 살아온 사람들을 그분과 다시 이어주는 일, 예수는 이것을 자신의 사명이자 운명으로 본 것 같습니다.

권력과 재물과 종교를 독점한 로마와 유대의 지도층들은 세상의 물질적 토대와 궁극적 토대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예수는 이 구조 악을 비판하고 두려움 없이 맞장을 떴습니다. 또한 그렇게 사회와 종교의 안전망에서 추방되어 목소리와 존재를 상실한 이들이 구제불능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여삐 여기시는 자녀라고 선포했습니다. 그가 작고 병들고 초라한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보여준 친교와 치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 작고 가난한 이들이 오직 사람들뿐이겠냐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미련합니다. 생태신학을 통해서 인지하고 통찰한 것들을 좀처럼 실천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충실한 그리스도인도 거의 예외가 없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2015)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던 게지요.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가 우리에게 울부짖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의 고통)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무책임하게 사용하며 남용하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울부짖는 것이 대지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다들 아시다시피 대지의 파괴가 동식물의 멸종과 인간 삶을 위협하고, ‘코로나 블루, 코로나 레드, 코로나 블랙’이라는 유행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마음과 정신은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와 산업기술문명 속에서 계속 성장을 외치고 있습니다. 욕심껏 소비하고 편리하게 살고 싶어서 온천지를 쓰레기와 악취로 채우다 못해, 우주기지를 개척하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신용카드 1장 분량의 미세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로 말이죠.2

생태신학은 제시합니다. 인간은 생태계의 신비 속에서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는 영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지구생태계의 착취는 인간이 가장 쉽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신비와 경외를 파괴시켜서 인간 자신 안에 있는 초월적 영역과 만나지 못하게 한다고. 그래서 마침내는 인간이 지닌 영성적인 감수성을 퇴화시키고 망가뜨릴 거라고.

이 말은, 지구생명의 파괴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체적인 관계를 끊어버리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망가뜨리며, 인간과 초월적인 세계의 총체적 관계까지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현실세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존재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초월적인 세계를 내던져버린 우리가,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그림자를 제대로 대면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태위기는 관계의 위기와 마음의 위기로 번져가게 되지요.

이 다중의 위기를 벗어나려면 생태회심이 필요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를 품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들에게 감사하며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고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은 가난한 이들 것을 빼앗는 것”임을 깨우치는 생태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생명의 순환을 잃지 않도록 매일매일 생태적인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고, 새 물건을 살 때는 정말 필요한지 고민하고, 쓰레기를 버릴 때는 재활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등등. 이 작은 실천들이 우리와 후손들의 건강한 삶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저처럼 미숙한 엄마들과 병든 아기들도 아픔과 눈물 없이 조화로운 지구생명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 김수환, 「보시니 참 좋았다」, 『국가 권력과 교회 – 전집 13』, [참생명학교 파견미사, 명동성당교육관, 1994.5.27], 329-330쪽

  2. “그거 아세요? 이번 주에도 신용카드 한 장을 드셨습니다”, 경향신문, 2020.10.16.일자.

유정원

생태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도 생태실천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있는, 머리의 지식이 손과 발로 온전히 내려오지 못한 미숙한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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