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⑦ 협동운동, 남은 이야기들

기후위기의 상황 속에서 협동조합은 기존에 당연시 되어왔던 삶의 방식 전반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고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의미를 공공연하게 외쳐야 한다. 과거의 비즈니스가 부차적인 사업이 되고 비물질재라고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 정보가 교류되는 장 커뮤니티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커뮤니티의 밀도가 높아질 때에야 ‘개인의 빈곤’을 ‘더불어 가난’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정동과 욕망, 사랑의 흐름이 향하는 바에 몸을 싣고 거대한 전환사회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 협동운동, 남은 이야기들

1. 생활자, 생산자와 소비자를 경계를 허물기

기존의 생산자조합원과 소비자조합원이라는 구분이 다자간 협동조합에서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시대가 찾아왔다. 모두가 정동과 욕망의 생산자이지만, 유독 소비자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생협 등의 사례를 통해 강내영박사가 소개한 생활자라는 개념은 부각될 수 있다. 기존에 소비자로 간주되었던 조합원들이 생산자로 이행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 생산과 소비의 개념 자체를 해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욕망과 정동은 늘 생산하면서 동시에 소비하고 있다. 생산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기존 생산과의 차이점일 것이다. 즉, 삶의 자기생산이라는 의미에서 생산자인 셈이다. 칠레의 인지생물학자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산(autopoiesis) 개념은 바로 생명의 지속가능성과 유지, 생존에 필수적인 재귀적인 순환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생산의 목표와 과정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점에서 자기생산이다. 살림과 생활은 모두 자기생산에 따라 작동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욕망의 생산은 접속(connection), 욕망의 등록은 이접(disjunction), 욕망의 소비는 연접(conjunction)으로 설명된다. 접속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의 과정을 따른다면, 이접은 ‘~이냐 혹은 ~이냐’라는 논리를 따른다. 또한 연접은 ‘그러므로 고로 나는~이다’라는 논리를 따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욕망의 생산에서는 연결접속의 과정밖에는 없지만, 식별의 과정을 거쳐 정체가 분명한 것만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정동과 욕망과 관련해서 생산에 흐름과 순환 상태만이 있다면, 소비에 고정관념과 정체성의 상태만이 있게 된다. 그러나 협동조합에서의 정동과 욕망, 살림의 입장에서 누가 생산자인지 누가 소비자인지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도로 보면 모호할 수밖에 없다. 물품의 생산자가 더욱 연접의 시각을 가질 수도 있고, 물품의 소비자가 살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접속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접속, 이접, 연접과 같은 욕망의 생산과 소비의 논리는 삶과 살림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생활자라는 개념이 유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생활자는 삶의 자기생산자라는 의미에서 생산자이며, 물품의 소비자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욕망, 정동, 돌봄의 생산자라는 의미에서 생산자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조합원의 구분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생협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기능적인 구분으로부터 벗어나, 생산과 소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을 끊임없이 교직하고 횡단하는 색다른 의미좌표로서의 생활자 개념을 재창안할 필요가 있다. 생활자 조합원의 규정은 지금 물품을 소비하던 조합원도 금방 귀농귀촌을 통해서 생산자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더욱이 저성장시대에 각각의 가정에서 생산되고 제작되는 물품들도 거래할 여지를 갖게 만드는 것도 생활자 개념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소비하는 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조합원들이 갖게 되는 것도 생활자 개념에서는 가능하다.

생협의 조합원들이 저성장시대에 활동가이자 예술가이자 장인으로서의 복합적인 배치를 갖게 되는 것은 여러모로 유리하다. 동시에 이러한 각각의 생활자조합원들이 생산한 물품을 거래할 수 있는 마당으로서 생협이 작동하는 것은 그 참여도와 성취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소비자라는 정체성, 고정된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모두가 생산자이며 모두가 소비자라는 관점으로 향할 때 생협에 대한 상상력과 영감은 매우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근세 시기 도제조합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은, 결국 작은 소규모 공방이나 제작, 소규모 비즈니스의 판과 배치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자라는 개념이 주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에 주목하면서, 별종적이고 색다른 생산자들을 양성하는 자리와 마당으로서 생협이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2.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가속화, 판매자와 구매자의 경계 허물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되어 함께 나누는 바탕에는 재미난 관계성이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출처 : https://pxhere.com/ja/photo/192560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되어 함께 나누는 바탕에는 재미난 관계성이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사진 출처 : pxhere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우발적인 고객이 없는 저성장시대에 대한 대응으로 적합한 사업방식으로 선호된다. 그러나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추구하려면 일단 관계 자체를 성립시키는 활동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지연, 학연, 연고 등의 관계가 아닌 실존적인 관계로부터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시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시작은 돌발흔적처럼 우발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것을 관계로 만들고, 특이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커뮤니티 비즈니스 자체는 사업목적과는 무관한 동아리, 소모임, 커뮤니티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사업의 영역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부수효과가 주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재미와 흥, 의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활동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아주 미세한 삶의 영역의 문제, 취미, 글쓰기, 반려동물 키우기, 요가, 명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커뮤니티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마당의 역할을 협동조합에서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부수효과로서의 판매나 구매가 이루어질 수는 있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재담꾼, 재주꾼, 생활의 달인, 전문가, 살림능통자, 미시정치가 등이 데뷔 무대로 등장하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협동조합이 그것을 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숨은 보석과도 같은 수많은 인물들이 홀연히 출현할 수 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재미와 흥, 의미, 가치, 매력과도 같은 부분은 주체성 생산의 과정 자체가 갖고 있는 활력과 생명에너지에 기반한다. 그저 공간만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과 살림, 연대의 가치에 부합되는 모든 활동을 촉진하고 고무하고 독려할 엔터테먼트사나 문화기획사와 같은 태도를 취할 필요도 있다. 강의, 동아리, 소모임, 토론회 등이 온전히 협동조합의 성과로 남기 위한 깨알 같은 설정들도 필요하다. 커뮤니티를 발굴하고 구성하고 재건하고 유지하는 것에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자원과 노력, 에너지를 쏟는 것은 자칫 소모적이라도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소모임이나 동아리, 클럽 등이 모여 생태계를 만들 경우에 협동조합은 다양한 선택지를 가진 플랫폼이나 마당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생태적 다양성의 시각에서 무수한 살림과 정동의 관심사들과 협동조합은 접속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려면 우선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생활의 필요가 무엇인지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실존적인 관계 맺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소한 수다, 잡담,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얘기하다보면 무엇인가가 해 보겠다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편승하고 참여하고 동참하려는 사람들도 생긴다. 관계의 판이 안 깔려 있는 상황에서 그저 자연발생성에 기반한 모임은 성립되기 어렵고, 커뮤니티 룸의 유지와 지속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 물론 코디네이터도 있어야 하고, 퍼실리테이터도 있어야겠지만, 우선 다기능적인 관계 자체가 그 기능을 수행하면 된다. 사람들이 일단 모이면 다양한 관심사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의미모델과 재미모델이 발생된다. 중요한 것은 협동조합이 다양한 의미모델과 재미모델을 내재하고 있는 복잡계로서의 판을 깐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커뮤니티 룸이 형성되면 수많은 작당모의와 독서클럽, 소모임 등이 생길 수 있지만, 그것이 자연발생성의 신화에 따라서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농처럼 끊임없이 촉진하고 양육하고 돌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소모임이나 동아리 등은 지속가능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커뮤니티의 활성화는 구매자와 판매자라는 구도 자체도 사라지게 할 것이며, 협동조합의 진정한 주인은 조합원 자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구매와 판매 자체에서 거래되는 물품이 사실상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달하기 위한 작은 소재와 재료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커뮤니티의 관계망의 밀도와 온도, 강도 등이 강렬해지면 사실상 물품거래는 큰 의미가 없게 된다. 도리어 부수효과로서의 의미밖에는 없게 된다. 오히려 대안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고민과 모색, 전망 수립 등을 위한 배치와 판으로서의 의미를 협동조합이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재미, 흥, 운, 의미, 가치, 취미, 육아, 교육 등 비물질재라고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 정보가 교류되는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사업체에서 중심이 되는 물품판매는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부수효과에 불과한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커뮤니티를 복원하고 재건함으로써, 무차별 사회를 극복하고 간(間)공동체적인 사회 자체를 구성하는 방향성에 있을 것이다.

3. 혁명의 도래 : 거대한 문제설정 앞에서 민감도를 키우고 지도그리기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설정 앞에서 실존적 위기감과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마음의 위안이나 회피, 망각, 외면 등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위기 상황이라는 거대한 문제설정에 대한 민감도와 예민도를 높이면서도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과 노력의 판과 배치를 마련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문제설정에 모든 지혜와 지식을 모으고 민감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 자체가 혁명적 상황일 수 있다. 과거에 통일, 노동, 생명 등에 대한 거대담론을 하나의 거대한 문제설정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욱 강건하게 이 거대한 문제설정에 대면하고 민감하고 행동에 나섰으며, 그것을 혁명과 같은 감수성으로 갖고 있다.

이제 기후위기의 상황은 우리 시대에 던져진 하나의 화두이다. 우리는 이 화두를 회피할 수 없으며, 미래세대와 생명과 자연, 인류문명 등의 현실을 대면하고 여러 가지 지도를 그려내야 할 것이다. 기후위기라는 문제설정은 우리의 문명에 문제가 있으며, 전환사회로 향한 발걸음을 더욱 빨리해야 한다는 생명과 자연, 미래세대의 호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제도, 정책,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실천에 나서는 것이 시대적인 요청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존 문명은 사실상 뿌리 깊게 우리의 삶과 사유양식, 생활방식으로 들어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주체성 생산을 통해서 대안적인 삶을 발견하고 창안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해결책에 대한 지도제작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협동조합의 공동체가 성숙하여 수많은 공유물(公有物) 있어야,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다.  출처 : www.freepik.com/free-vector/business-team-putting-together-jigsaw-puzzle-isolated-flat-vector-illustration-cartoon-partners-working-connection-teamwork-partnership-cooperation-concept_10606197.htm#page=1&query=together&position=3
협동조합의 공동체가 성숙하여 수많은 공유물(公有物) 있어야,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freepik

어떤 이는 기후위기는 그저 거대프로그램, 거대계획, 제도의 문제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망과 배치를 바꾸는 실전에 나섰을 때, 제도나 정책 등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기후위기라는 문제설정에 대한 민감도를 가지고 대안을 고민하는 지혜와 마음이 모여야 해결방안에 대한 제도적인 노력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펠릭스 가타리의 제도요법에 따르면, ‘제도=관계망’이기 때문이다. 즉, 제도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서의 완성형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가 초래하는 구성과정에 있은 과정형이자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시대는 협동조합의 획기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기존에 당연시 되어왔던 삶의 방식 전반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고, 홀연히 삶과 살림과 돌봄의 양식을 변화시키려는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후위기의 상황에 대한 인식은 지식과 정보로서 널리 확산되었지만, 누구도 그것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바꾸어보자고 정면으로 나서서 발언할 부위가 바로 협동조합이다. 전반적인 저성장시대의 국면은 협동조합에게 결국 기후위기의 상황에 대한 정면 대응을 요구한다. 즉, 저성장 국면에 대한 자구책 마련이 아니라, 문명의 전환이라는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의미좌표를 전면화하고 확산하는 것이 더 요구된다. 그러므로 협동조합은 더 강건하게 자신의 가치와 활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상황이 올 것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예언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자신의 삶의 양식의 변화로 느끼고 홀연히 나서는 활동가, 조합원, 시민 등이 더 필요한 것이다.

혁명의 상황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고, 주저하지 않고 하게 되며, 넌덜머리를 내지 않고 전념하고 열정적인 힘에 따라 색다른 지도를 그리는 상황을 의미한다. 혁명적 상황은 자신의 신체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열정의 초과분이 남는 상황이며, 소진되고 피로한 몸을 응시하면서도 자신의 직면한 문제설정을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설정과의 대면을 혁명적 상황으로 해독함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실존이 갖고 있는 활력과 에너지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자신의 배치와 관계망, 생활양식의 심원한 변화를 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저성장시대를 탈성장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직면과 탈주, 그리고 재진입 :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으로

저성장시대에 대한 직면은 “어떻게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 상황 자체가 기후위기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떻게 이 상황에 대응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행하게 된다. 우리는 문제설정의 횡단적 결합과 연결 속에서 여러 가지 문제설정들이 각기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 그래서 현실은 복잡계이며, 다양체이며, 다중스케일 분석으로 밖에 포착되지 않는 여러 모델과 여러 의미의 결합체이다. “그것의 대답은 이것이다”라고 하나의 모델로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문제제기들을 동시적으로 발생시키면서도 그것이 생태계를 이루고, 화음을 이루고, 거대한 정동과 욕망의 일관된 흐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저성장 상황을 앞에 두고, 우리는 하나의 입구로부터 유래된 출구, 하나마나한 뻔한 답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사업체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타개할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면서, 효율성, 속도, 경영합리화 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입구와 출구는 완전히 분열되어 있어서 전혀 다른 출구전략으로 향할 수도 있다. 즉, 인과론적으로 근거와 정의, 입구와 출구, 문제제기와 대답이 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입구에서 전혀 다른 출구로 향하면서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성장 상황으로부터 시작된 입구는 전혀 다른 출구를 개척하기 위한 사고실험을 필요로 한다. 그 사고실험은 다양한 문제제기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횡단면을 그리는 데 목적이 있다.

사고실험의 형태는 먼저 직면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직면은 문제제기의 입구와 대답의 출구를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문제제기의 입구를 대면하면서 다양한 출구전략을 지도 그리기를 하는 혁명적 상황과 유사지평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다른 지평에 있다. 즉, 전문가나 선수들의 대답을 등장시켜 그러한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된 대답에 충실히 따르면 결국 문제제기는 해결된다는 방식 즉 발상주의적인 방식의 해결책이다. 결국 하나의 대답으로 제기된 모델에 집중하고 수렴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찾느냐, 아니면 여러 가지 대답으로서의 모델들을 연결시켜 문제의 대안을 추구하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전자의 경우가 바로 직면의 방법이다. 모순, 대립, 갈등, 이견그룹 등이 이러한 직면의 방법에 따라 해결책을 구사하려 한다. 그러나 저성장시대는 오히려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선택지의 경우의 수의 감소의 시기이기도 하다. 직면의 방법에서 제기되는 해결책은 축소되는 선택지 속에서 하나의 모델로 수렴시키기 때문에, 더욱 회복탄력성을 줄이게 되고 생태적 다양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므로 직면의 방법론의 유효성은 혁명적 대면상황에 한정해야 할 것이다.

사고실험의 두 번째 형태는 탈주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탈주는 입구와 출구를 분열시키고, 근거와 정의, 문제제기와 대답 등을 분열시킨다. 이를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지도화의 방법론’이라고 말한다. 이는 저성장시대의 문제설정의 출구전략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의 모델이 아닌 다양한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응시를 의미한다. 탈주는 색다른 출구전략의 방법론이며, 다양한 지도를 그리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지형지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탈주에서의 입구와 출구의 분열은 사실은 생명에너지와 활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사업체의 위기 상황을 커뮤니티의 실질화, 관계의 실질화라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시켜 사유할 수 있다. 동시에 기존에 당연시 되어 왔던 역할, 기능, 직분의 배치를 전혀 다른 문제설정들의 횡단적 결합인 다기능적인 관계의 설립을 통해서 찾을 수도 있다. 탈주의 방법은 전혀 다른 지평, 미지의 지평으로 향하게 하며, 그 시작은 돌발흔적과 같은 색다른 특이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성장시대는 성장으로의 회귀라는 인과론적인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미지의 영역으로 우리를 탈주시키는 문제설정이다.

탈성장시대에 맞는 새로운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져야 문명의 전환이 가능하다. by ElisaRiva 출처: https://pixabay.com/images/id-1983509/
탈성장시대에 맞는 새로운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져야 문명의 전환이 가능하다.
사진 출처 : ElisaRiva

사고실험의 세 번째 형태는 재진입이다. 저성장시대에 대한 대응은 바로 기후위기에 대한 정면대응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출구로 나와 보니 다시 탈성장이라는 저성장이라는 입구와 유사한 지평으로 재진입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탈성장은 저성장과는 완전히 다른 지평에 있다. 그래서 재진입은 문제설정이 대답이 되고, 대답이 다시 문제설정이 되는 중복, 함입, 순환, 재생, 되살림의 재귀적인 형태를 띤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재진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그것은 저성장에 대한 직면과 탈주를 넘어선 색다른 차원의 대응전략일 수 있다.

이러한 사고실험을 거쳐 우리는 저성장시대를 맞이한 협동조합의 전략적인 지도제작에서 무의식의 행렬이나 마음의 배치의 일부를 살짝 볼 수 있다. 그것은 여러 문제설정들의 일부이며, 그것이 대답으로서의 하나의 모델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문제제기를 던지며, 대답이 여러 개일 수도, 없을 수도, 모두가 대답일 수도 있음을 승인하는 가운데서 지도그리기에 나서고 있다.

에필로그 : 더불어 가난의 공동체, 협동, 연대의 정신으로

저성장시대의 개막은 새로운 지평의 개방을 의미한다. 폴라니로부터 시작된 기존의 사회의 구성요소는 공유(公有)를 통해 모아서 나누는 공공영역과 공유(共有)를 통해 선물을 주고받는 공동체영역과 사유(私有)를 통해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영역으로 구성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런데 우리는 공무(空無)를 통해 자발적 가난이나 빈 그릇운동, 무소유 등으로 향하는 색다른 흐름과 접속하고 있다. 그것은 연결망과 관계망 자체 이외에 자아(自我)의 영역, 자신만의 소유물 등의 영역이 없음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물론 빈 몸으로 왔다 빈 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것은 궁극의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갖는 가치를 보다 심원하고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개인이 직면하는 빈곤을 금욕과 결핍, 무소유의 마음가짐으로 대응하는 것이 해결점이 아니다. ‘더불어 가난’한 공동체, ‘관계 속에서의 가난’을 추구하는 바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나 혼자라도 잘 살겠다고 나서는 성장주의의 철학이 아니라, 보다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보이지 않는 관계의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 향하는 것이 저성장의 철학이다.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협동과 연대를 통해 더 낮은 곳으로 가난해지려고 하는 탈성장의 전략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저성장의 문제는 해결책으로 성장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입구와 출구가 분열되어 있다. 더 가난해진다는 것은 결핍되고 부재하고 결여된 상태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가 갖고 있는 실존적인 절실함과 관계의 풍요와 충만함, 관계의 미학이 가진 우아함으로 접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혼자서 빈곤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 힘들고 더 외롭고 고독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더 생각하고 돌보고 아끼는 것이 더불어 가난한 공동체의 비밀이다.

어쩌면 협동조합은, 활력 넘치는 투명인간되기의 판이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증여와 순수증여, 되살림, 재생, 순환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내세우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의 일부로서 자신의 배치를 정하고 그 속에서 투명인간과도 같이 수많은 선물을 공동체에 남기는 것이 가능한 판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떳떳하게 내가 그렇게 했노라고 말하는 판이 아니라, 수줍고 부끄럽게 내가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능청스럽게 ‘누군가가 선물했을 텐데’라고 말하는 판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답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서 여러 문제의식들을 횡단적으로 결합하면서 대답을 찾고 구하고 탐색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관계가 갖고 있는 다의미적이고 다기능적이고 다극적이고 다실체적인 양상에 대한 접근방향성일 것이다. 우리는 협동조합이 무슨 일을 해낼지 아직 모른다. 우리가 상상치 못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협동조합은 색다른 장이 되고, 판이 되고, 배치가 되고, 마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강건하게 우리의 정동과 욕망, 사랑의 흐름이 향하는 바에 몸을 실고 거대한 전환사회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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