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대응과 탈성장 모듈 접근

탈성장 이론과 운동을 모듈로 접근하면 탈성장을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각 모듈에 대해서도 생산적인 논의와 제안을 발전시킬 수 있다. 탈성장론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조건없는 기본소득, GDP의 대체, 계획적 진부화의 억제와 커먼즈의 확대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듈들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참여적 계획 경제와 자립과 민주주의의 확대, 정의로운 전환과 연결될 때 더욱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놈 촘스키와 로버트 폴린의 최근 대담집 『기후위기와 글로벌 그린뉴딜』(현암사, 2021)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체제 전환의 스케일을 일깨우면서 전환에 수반되는 문제들에 ‘리얼’하게 대면할 것을 요청한다. 기후위기에 대해 ‘좋은 게 좋은 것’ 또는 ‘윈-윈’의 해법 같은 것은 없으며, 기존 제도의 관성과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힘을 직시하고 그린 뉴딜과 정의로운 전환(이 책에서도 ‘공정한 전환’이라고 번역하고 있긴 하지만) 자체가 진지한 정치적 투쟁이어야 함을 환기한다. 무릎을 두드리고 맞장구를 치고픈 대목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 저명한 학자이자 활동가들도 ‘탈성장’을 언급하는 부분에 와서는 흔한 오해 또는 편견을 드러낸다. 사회자가 탈성장의 현실성과 바람직함을 묻자, 폴린 교수는 탈성장을 주장하는 이들을 존경하고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만, 탈성장은 기후변화라는 구체적 문제에 대해 현실성 있는 기후 안정화 체제 비슷한 것조차 제공하지 못한다고 본다.

탈성장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탈성장을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말아서는 안 되고, 자신이 비판하는 탈성장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by Aphiwat chuangchoem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347226/
탈성장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탈성장을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말아서는 안 되고, 자신이 비판하는 탈성장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사진 출처 : Aphiwat chuangchoem

예를 들어 탈성장 강령에 따라 GDP가 향후 30년간 10퍼센트 감소하고, 온실가스 배출이 그 효과만큼인 10퍼센트가 줄어들 경우, 이는 배출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IPCC의 권고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반면에 엄청난 경기 침체와 생활수준 하락을 야기하리라는 것이다. 폴린은 GDP가 대폭 감소할 경우 대량 실업의 급격한 증가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설득력있는 주장을 제시하는 탈성장 지지자를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탈성장 시나리오 하에서도 탄소 배출량을 끌어 내릴 강력한 요인은 GDP 전체 규모의 축소가 아니라 에너지 효율과 청정 재생에너지 투자의 대규모 확대와 병행하는 화석에너지 극적 감축이다. 재생에너지는 (GDP 증가에 기여하는) 성장을 해야 하고 화석에너지는 탈성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촘스키 역시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성장과 탈성장 모두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탈성장 논자들은 GDP의 감소만을 주된 온실가스 감축 수단으로 삼는가? 재생가능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화에 대한 투자마저 거부하는가? 폴린이 사례로 드는, 허먼 데일리가 사실상 ‘정상 상태’ 경제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일본이 거의 제로성장 상태에서도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실패했다는 진단은 정확한가? 총 산출량이라는 변수를 제쳐두고 기술과 투자 구성의 변화로만 해법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예컨대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은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또는, 탈성장론들이 굳이 성장의 여러 측면들과 GDP 지표의 문제점을 분별하는 것을 이들이 제대로 읽은 것인가? 여러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어쨌든 많은 진보주의자 또는 좌파들에게도 탈성장은 히피 복장의 루저들이나 스웨터를 껴입은 카터 대통령 같은 이들이 관념적으로 말하는 이상론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식되곤 한다는 것을 짚어 두자.

이처럼 탈성장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간에, 탈성장에 대한 각자의 이미지를 그려 두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일정하게 불가피할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탈성장을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말아서는 안 되고, 자신이 비판하는 탈성장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이는 지난 시기 이론과 현실 정치 모두에서 큰 흐름을 대표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조차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입장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모듈’ 접근은 이럴 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어떤 사조나 운동을 이루는 부분들의 구성이나 부분들이 조합되는 경향을 통해 그 전체적 외연과 내포를 이해하는 것이다. 모듈은 한 요소나 부품보다는 큰, 어떤 맥락 속에서 선택되고 결합된 부품 조립체나 장치다. 모듈은 전체의 일부로 기능하지만 따로 떼어서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고, 다른 부품이나 모듈과 결합되어 새로운 전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탈성장처럼 단순하게 규정하기 어렵고 더욱이 한창 진행 중인 이론과 운동이라면 이렇게 나무보다는 더 큰 모임인 작은 숲들을 봄으로써 전체 숲을 조망하고 그 숲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게다가 이 개별 모듈들 자체의 적절성도 논의와 검토에 유용한 대상이 되고 더 의미있는 조합을 상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탈성장 이론가들이 제안하는 모듈들은 이미 여러 문헌에 제시되어 있다.

탈성장의 모듈들

제 1세계와 3세계를 아우르는 필자들이 나선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착한책가게, 2018)의 원제는 “체제적/체계적 대안(Systemic Alternatives)”이다. 자본주의와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제가 불러온 지금의 위기에 대해 필자들은 7가지 대안들이 서로 연결되어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 대안들은 안데스 원주민공동체에게 배우는 ‘참다운 삶’을 의미하는 비비르 비엔, 검약한 풍요 사회로 가기 위한 ‘탈성장’, 공동의 것을 공동체가 관리하는 모델인 ‘커먼즈’, 가부장제와 생태위기에 도전하는 여성운동인 ‘생태여성주의’,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지구공동체를 위한 ‘어머니지구의 권리’, 세상의 상품화를 막는 지구공동체를 말하는 ‘탈세계화’, 그리고 커다란 협동의 원칙으로서 ‘상호보완성’이다. 여기서 탈성장은 7가지 이론 및 철학과 실천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모듈이다.

탈성장처럼 단순하게 규정하기 어렵고 더욱이 한창 진행 중인 이론과 운동이라면 이렇게 나무보다는 더 큰 모임인 작은 숲들을 봄으로써 전체 숲을 조망하고 그 숲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by Akil Mazumder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1072824/
탈성장처럼 단순하게 규정하기 어렵고 더욱이 한창 진행 중인 이론과 운동이라면 이렇게 나무보다는 더 큰 모임인 작은 숲들을 봄으로써 전체 숲을 조망하고 그 숲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파악하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Akil Mazumder

최근 많이 인용되는 탈성장론자들인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가 함께 묶어 낸 『탈성장 개념어 사전』(그물코, 2018)에는 탈성장 운동을 구성하는 모듈들이 정말이지 빼곡하다. 이들이 탈성장의 대안적 자원 또는 행동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다시 땅으로, 기본소득과 최대 소득, 공동체 통화, 협동조합, 부채 감사, 디지털 공유물, 불복종, 생태 공동체, 인디그나도스(점령), 일자리 보장, 공공 자금, 신경제, 나우토피아, 탈성장 과학, 노동조합, 도시 텃밭, 일자리 나누기, 부엔 비비르, 영속의 경제, 페미니스트 경제학, 우분투 등이다. 이런 모듈들 일부는 과거의 운동들과도 겹치고 동시대의 이론이나 운동들과도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그러나 다른 운동들이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았거나, 수상쩍거나 공격했던 모듈들도 있을 것이다.

제이슨 히켈도 최근 저서 『Less is More』(창비, 근간 예정, “지구를 구할 탈성장”이 부제다)에서 기후위기에 맞서면서 포스트-자본주의 세계로 가는 길에 관하여 몇 가지 모듈을 제시한다. 계획된 진부화를 끝내기, 광고 줄이기, 소유권 대신 이용권의 보장, 식품 폐기 없애기, 생태계 파괴 산업 규모 줄이기, 공공재의 탈상품화와 커먼즈의 확장, 부채 탕감과 급진적 풍요, 새로운 화폐, 그리고 민주주의의 힘이다. 정신적 탈식민화와 생태주의 인식에 기반하는 두 번째 과학혁명, 포스트-자본주의의 새로운 윤리학도 제시된다. 각각의 모듈이 한 다발씩 이야기 거리를 던져주거니와, 너무 작다고 여겨졌지만 굉장히 커다란 것일 수 있는 제안들이다. 탈성장론을 일찌감치 제기해 온 세르쥬 라투슈, 팀 잭슨,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앙드레 고르즈와 이반 일리치, 한국에서 보자면 장일순 선생과 김종철 선생이 했던 이야기들에서도 앞의 모듈들과 이래저래 겹치는 목록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탈성장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기는커녕, 해보자는 제안과 아이디어들이 이미 풍부한 매우 구체적인 이론이자 운동이다. 다만 탈성장이라는 간판을 따도 달지 않았을 따름이다.

몇 해 전 작고한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가 ‘리얼 유토피아’ 논의를 제안하면서 민주사회주의 경제의 구성 요소로서 제시하는 것들도 탈성장론과 많은 부분 교집합을 이룬다. 조건 없는 기본 소득, (노동자 협동조합과 공공 지원 협동조합을 포함하는) 협동적 시장 경제, 사회/연대 경제, 자본주의 기업의 민주화, 공익 사업체 은행, 재화와 서비스의 국가 공급, P2P 방식의 협력 생산과 지식 공유재(커먼즈) 등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탈성장의 모듈 목록 대부분에 포함되는 교집합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조건없는 기본소득이다. 최근 한국의 대선 정국에서도 많은 논쟁을 낳고 있고 무엇이 진정한 또는 의미있는 기본소득인가 하는 문제를 남기지만, 일정한 소득의 보장을 통해 불필요하게 생태 파괴적이고 착취적인 노동을 줄이고 개인과 집단의 자유롭고 의미있는 활동을 보장하게 하는 장치의 필요성은 여전히 남는다. 이는 현물 지급 위주의 사회보장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 더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더 적은 필요 노동이 만들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노동시간 단축과 불필요한 소비 축소는 기본소득과 강한 연결고리를 갖는 모듈들이다.

GDP의 대체 또는 상대화 역시 공통적으로 포함된다. 이 모듈은 탈성장이 역성장이나 마이너스 성장과 갖는 관계에서 중요한 논의를 열어주며, 현재 지배적인 경제와 정치 체제 및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이들을 허무는 샅바 역할을 한다. 소비와 생산에 대한 통제 방식과 관련된 모듈들은 기후위기, 특히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하여 매우 구체적인 수단에 대한 쟁점을 제공한다. 연대와 공유의 경제 모듈들은 감축뿐 아니라 기후위기 적응과 함께 대안적인 경제 건설의 원리와 자원이 되어 줄 수 있다.

탈성장과 계획 경제

탈성장을 이렇게 모듈로 나누어 본다면, 어떤 부품과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도 되지만 각각으로는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 수도 있다. 실제로 탈성장에 대한 비판론 중 다수는 탈성장이 현 체제에 위협이 되거나 대안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듈은 따로 또 같이 맥락을 이루며, 특히 기후위기 상황과 그 대응에서 탈성장은 그 자체가 반(탈)자본주의로 환원할 수 없는 중요한 모듈이 될 수 있다. 이는 탈성장이 기후위기 대응에 필수적인 모종의 계획 경제와 결합할 때 더욱 그렇다.

폴 호켄 등이 주축이 되어 2017년에 첫 선을 보인 다국적 온실가스 감축 프로젝트가 ‘플랜 드로다운’이다. 플랜 드로다운은 환경경제학의 관점에서 이미 현실에서 이용 가능한 80가지 온실가스 감축 솔루션의 효과를 계산한다. 이 프로젝트는 핵발전 증가나 BECCS(바이오에너지 탄소 포집·저장) 같이 실제로 적용이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해법까지 요소로 포함하는 IPCC의 지구온난화 특별보고서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고 참고할만한 자료다. 그렇지만 플랜 드로다운은 대체로 지금과 같은 수준의 자원 생산과 에너지 소비를 전제한다. 음식물 쓰레기 최소화 같은 수단이 있지만, 금방 고장나게 만드는 공산품 생산을 금지하거나 불필요한 고된 노동을 줄이는 것과 같은 사회경제적 솔루션들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의 총 노동시간과 총 산출을 예컨대 2050년까지 1/4 또는 1/2만큼 줄이면서도 충분히 인간다운, 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플랜 드로다운의 계산은 원초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인 가정인지는 프레임의 문제다.

지난 8월 초에 발표된 탄소중립위원회의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시나리오의 1, 2안뿐 아니라 탄소중립을 산술적으로 가능하게 한 3안조차 30년 뒤 탄소중립을 위한 수단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고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된 핵심 이유는 이 시나리오들이 2050년까지 특히 산업 부문의 에너지 수요가 지금과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화석연료 수요의 대부분을 전기화하고 효율화하지만, 탄소중립을 이루기에는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CCUS(탄소포집기술), 산림흡수원, 수소 이용 같은 장담할 수 없는 기술적 요소들을 투입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30년 뒤에 한국의 인구, 경제의 양적 규모, 제조업의 비중,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문화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가정이 아닐까?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할 온갖 변화들을 생각한다면, 탈성장의 모듈들은 그리 급진적이거나 대단한 제안들도 아니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탈성장이 맞다 그르다, 또는 현실적이다 아니다 라고 단편적으로 규정할 게 아니라, 예컨대 30년 뒤 우리의 삶과 정치사회를 그려 보이고 그것으로 나아갈 구체적인 제안들로 논점을 바꾸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일 것이다. 탈성장의 모듈의 적절치 않거나 불충분하다면 다른 모듈의 조합 또는 프로젝트를 말하면 되고, 제안들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통합이나 조정을 논의하면 된다. ‘자본주의가 문제다’라는 주장 역시,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대체할 모듈과 방법들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탈성장과 계획 경제를 결합하는 모델에 대해 더 깊은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란다.

에둘러서 말할 것 없이,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 계획 경제의 요소는 더욱 전면화되어야 한다. 나오미 클라인, 에릭 올린 라이트, 그리고 시장주의적 버전이지만 심지어 리프킨까지 말하는 것이 대규모 국가 개입과 공공사업의 필요성이다. 그런데 이게 새로운 사업(뉴딜)에만 국한될 이유가 없다. 자원 소비의 증가와 이를 충당하기 위한 성장을 전제로 해서는 이런 국가계획 역시 밑 빠진 독을 채우면서 기후위기를 가속화 하는 기업과 시장 기제에 대한 의존을 계속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국가의 중기 재정 투입 계획과 온실가스 감축 계획, 에너지 기본 계획이 모두 정합성을 가지고 작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도 GDP가 아니라 ‘도넛’의 여러 지표들이 중심이 되는 탈성장 또는 대안 성장 계획 경제가 요구된다. 물론 이런 계획 경제는 성장 논리에 찌든 관료와 목소리 큰 기업들이 주도하는 계획이 아닌, 참여적 계획 경제여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과 전환의 구성 요소
기후위기 대응과 전환의 구성 요소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대체 또는 극복이 총파업과 봉기 같은 한두 번의 이벤트로 가능한 게 아니며, 자본주의의 폐절 이후 비로소 생태사회나 경제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더욱 적극적인 모색과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다. 탈성장은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아닌’, 그리고 장기적이고 항상적인 기후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사회의 형태와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탈성장을 전제로 하는 것은 (국가 수준의) 참여적 계획경제와 (개인과 집단/지역 수준의) 자립과 살림의 확대, 그리고 관계와 과정으로서 연대와 민주주의 심화라는 수단들과 앞뒷면을 이룬다. 정의로운 전환 역시 이 전체 과정의 원칙이자 하나의 모듈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정의로운 전환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프로그램이고 아이디어이지만, 그 자체로 올바르고 퇴행 없는 변혁을 보장하는 개념은 아니며, 정의로운 전환이 모종의 변혁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필요하거나 해악적인 개념으로 재단할 일은 더욱 아니다.

라이트가 말하듯, 우리의 미래는 ‘하이브리드’로 다가올 것이다. 정치 체제로서도 그렇고 운동으로서도 그렇다. 필요한 전환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 모든 운동이 정신없을 정도로 펼쳐져야 하고 대안의 모듈들이 흘러넘쳐야 한다. 자기 마을과 도시에서 ‘도넛’의 경제학과 도넛의 운동들을 만들고 이 도넛들이 사방팔방으로 연결되는 상상을 해보아도 좋겠다. 이런 거대한 전환 속에서 어떤 계획경제, 어떤 민주주의, 어떤 주체와 관계들을 만들자는 제안이 필요한 때다. 없던 것이 아니라 낯익은 지난 이론과 운동들에서 그런 모듈들은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 탈성장의 모듈들은 어떤 참고 또는 도발이며, 진지한 제안과 기획서들이다.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10년간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에너지체제의 정의로운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연구했으며, 에너지 전환, 도시 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지금은 탈핵신문 운영위원장으로 신문 발간을 돕고, 기후위기를 알리는 교육과 탈성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안토니오 그람시』, 『정의로운 전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를 되찾자』, 『GDP의 정치학』,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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