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

코로나19에 대해 정부와 대중매체가 줄곧 적용해온 ‘전쟁의 은유’를 ‘평화와 공존의 은유’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분자 기생체 정도로 불리는 바이러스는 여러 면에서 전쟁의 은유에 걸맞지 않는다. 하지만 학계조차 바이러스를 생명체인 듯 표현하면서 은유의 형성에 일조해 왔다.

전쟁의 은유가 낳는 폐해

2019년 12월 중국 우한 지역에서 처음 보고된 이래 ‘코로나19’라 불리는 중증급성호흡기 질환에 걸린 환자의 수는 세계적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최근까지 코로나19 사태의 실질적인 해결책으로서 백신과 치료제 개발 등 과학기술적 대안에 대한 논의가 주로 진행돼 왔지만, 한편에서는 바이러스 질병을 대하는 사회적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도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나 대중매체가 흔히 ‘전쟁의 은유’를 사용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가령 코로나19의 팬더믹 선언 이후 각국 정부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강력한 규제책을 시행해 왔다.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군’은 바이러스, 전장의 최전선에 서있는 ‘아군’은 의료계 종사자와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환자, 그리고 전쟁을 지원하는 ‘후방근무자’는 일반 시민으로 설정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구호가 공통으로 제시됐다. 이 과정에서 정보수집, 공개, 이동제한 등과 같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큰 이슈들은 ‘전시’임을 이유로 좀처럼 사회적 논제가 되기 어려워지며, 은유가 반복될수록 이 같은 상황은 아예 사회규범으로 정착될 수 있다. 전쟁의 은유는 특히 환자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환자는 자신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와 용감하게 싸워 승리해야 한다. 만일 질병에서 회복되지 못하면 환자는 적에게 패배한 것처럼 여겨지고, 본인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거나 고립감으로 인한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의 은유는 과연 바이러스 감염의 상황에 적용되기에 타당한 것일까.

생물이 아닌 분자 기생체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는 말처럼 바이러스는 마치 적군과도 같은 사멸의 대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제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by Nataliya Vaitkevich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5863370/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는 말처럼 바이러스는 마치 적군과도 같은 사멸의 대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제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사진 출처 : Nataliya Vaitkevich

전쟁의 은유에는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병원체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그런데 병원체가 전쟁의 은유로 묘사된 것은 19세기 무렵 질병의 원인으로 바이러스에 앞서 박테리아의 존재가 처음 확인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테리아는 광학현미경으로나 관찰되는 작은 존재이긴 하지만 동물이나 식물처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번식과 대사 작용을 수행하는, 엄연한 생물이다. 이후 의학계를 중심으로 질병은 몸의 외부조직이 침략한 결과물이며, 몸은 군사작전처럼 면역적 방어기제를 동원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테리아와 달리 바이러스는 발견 당시부터 생물로 인식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기본적으로 유전자(DNA 또는 RNA)와 이를 둘러싼 단백질로 구성된다. 숙주 세포 안에서 세포의 대사물질을 이용해 증식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유전자의 빈번한 돌연변이를 통해 변화(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세포 바깥에서는 아무런 활동이 없어 물질입자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며 ‘분자 기생체‘ 정도로 부를 수 있기에, 전쟁의 은유에 등장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먼저 바이러스 질병이 특정 지역에 돌발적으로 발생할 때 ‘아웃브레이크’라는 용어가 흔히 사용되는데, 이는 전쟁이 갑자기 일어나는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지구에 인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현재 우리의 몸속을 비롯해 주변 어디에나 있다.

바이러스가 질병을 일으키는 이유는 세포 안으로 들어와 세포의 기능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전쟁의 은유에 따르면, 적군이 아군 진영의 빈틈을 찾아 쳐들어오는 장면이 연상된다. 실제로는 바이러스 표면의 특정 단백질이 세포 표면의 특정 단백질(수용체)과 적절하게 맞물리면서 바이러스 유전자가 세포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다. 세포 주변의 많은 바이러스 가운데 세포의 수용체와 맞물려지는 단백질을 가진 바이러스만이 세포를 감염시키는 것이므로, 의도적인 공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편 세포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 자체가 임상적 증상이 드러나는 질병의 발생을 곧바로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이러스 보유자, 즉 감염된 세포를 가진 사람의 경우 바이러스는 몸에 ‘잠복’하고 있다가 반드시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감염 자체가 에이즈 발병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의 의미는 적군을 ‘무력화’하거나 ‘사멸’시키는 일이다. 의료계에서 개발해온 백신과 치료제의 기능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제로 완전히 예방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먼저 백신은 세포 수용체 단백질과 맞물리는 바이러스의 표면 단백질 부위와 직접 접촉함으로써 바이러스 유전자가 세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 해도, 많은 수의 바이러스는 여전히 세포 주변에 존재한다. 한편 치료제의 역할은 주로 바이러스 유전자가 증식하는데 이용하던 세포 대사기구의 활동을 막는 일이다. 즉 항바이러스제는 감염된 세포를 대상으로 일부 기능의 작동을 방해함으로써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경우 바이러스의 ‘사멸’은 바이러스가 존재는 하되 더 이상 증식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분류하고 명명할 때 생물로 취급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존재로 줄곧 묘사돼 온 연원은 학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이러스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생물’ 세계에 적용돼 온 체계를 따르려 했던 시점부터 바이러스가 살아있다는 의미를 이미 상정해버렸다.

19세기 말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숙주에서 많은 질병을 일으킨 바이러스의 종류가 계속 보고되면서 학계에서는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 공통의 체계적인 분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두됐다. 1960년대 중반 학계에서 생물의 분류와 명명은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의 제안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린네는 생물을 크게 식물계와 동물계로 구분하고, 제각기 유사한 형질을 바탕으로 생물 개체마다 ‘계-문-강-목-과-속-종’의 계통에 맞춰 분류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생물을 학술적으로 명명할 때는 속명과 종명 순으로 나열하고, 속명은 대문자, 종명은 소문자로 시작하며 둘 다 라틴어를 사용하고 이탤릭체로 표기하자는 요지의 이명법을 주창했다. 이후 생물학계에서는 지구 생명체 전반의 진화양상을 서로 연관시켜 파악하기 위해 소위 ‘생명의 나무’라는 시각적 은유 개념을 설정하고 그 내에 각종 생물의 종류를 자리매겨 왔다. 최근까지 ‘계’의 상위 개념인 세 가지 ‘영역(domain)’으로 박테리아, 고세균, 진핵생물이 설정돼 왔으며, 모두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이러스는 생물이 아니기에 당연히 ‘생명의 나무’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이러스 학계는 기존의 동물, 식물, 박테리아 등과는 다른 바이러스 고유의 분류와 명명 방식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면서도, 바이러스의 계통체계와 명명의 틀은 린네의 제안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는데 동의했다.

가장 개념설정이 곤란한 상황은 최하위 단계인 ‘종’에서 벌어졌다. 원래 종은 린네 방식의 동물과 식물 구분에 적용된 개념으로, 대체로 ‘교배해서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비슷한 형질의 무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물론 주로 이분법으로 증식하는 박테리아의 경우에도 이 같은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제각기 다른 기준으로 종을 분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학명을 표기하는 방식도 문제였다. 학계는 공식적으로 린네의 이명법을 권장하되 강제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바이러스 학명은 너무나 제각기로 발표돼 왔다. 가령 숙주 일반명+증상+속명(Tomato spotted wilt tospovirus), 속명+숫자(Alphacoronavirus 1), 발생장소+바이러스(Sapporo virus)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됐다.

바이러스명과 질병명의 분리

일반인의 경우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는 ‘종’의 학명보다 주로 WHO가 제시해온 질병의 명칭을 통해 전달된다. 질병 이름은 세계적인 대비, 즉 질병의 전염성과 중증도 등을 고려한 예방과 확산에 대한 논의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해진다. 따라서 WHO는 질병의 특성과 함께 일반인의 다양한 반응을 고려하며 질병 이름을 선정하려 했고, 그 결과 코로나19의 경우 이전과 달리 질병 이름에 학계가 제시한 바이러스 이름을 직접 반영하지 않았다.

학계는 2020년 2월 11일 중국 우한에서 발견된 새로운 바이러스의 이름을 ‘SARS-CoV-2’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종의 학명이며, 질병 ‘SARS’를 일으키는 ‘두 번째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뜻이다.

SARS는 2002년 11월 중국 광동 지역에서 특이한 폐렴 증상을 보인 첫 환자에서 발견됐다. 심각한 급성 호흡곤란 증세와 함께 폐에서 염증까지 발생했다. 당시 WHO는 이 같은 증세를 표현한 질병명 SARS를 제시했고, 학계는 이를 반영해 SARS-CoV(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related CoronaVirus)라 명명했다. 이후 2012년 또 한 차례의 비슷한 질병이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다. 환자들은 급성 호흡곤란과 폐렴 증세뿐 아니라 신부전증과 위장계 이상 증세까지 보였다. 당시 학계는 원인 바이러스가 코로나계열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발생지역(Middle East) 정보를 담아 MERS-CoV(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related CoronaVirus)라 학명을 정했다.

WHO는 학계의 명칭을 반영해 질병명을 MERS로 공표했다. 하지만 당시 WHO에서는 질병의 이름에 특정 지역을 표현하는 일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마치 중동 국가의 국민들이 새로운 질병을 일으킨 원인인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은유에 따른다면 중동 거주민들은 각국을 ‘침투’한 물리쳐야 할 ‘적군’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후 WHO는 질병 명칭으로 인한 근거 없는 차별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2015년 명명에 대한 공식 권고안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요지는 질병 명칭에 특정 지역, 인간 및 동식물, 직업 등의 이름을 포함함으로써 불쾌감을 유발하거나 사회적으로 부당한 낙인을 찍는 일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부적절하게 지정된 질병명은 실제로 교역, 여행, 관광, 동물복지 등의 분야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2020년 2월 11일 WHO가 제시한 COVID-19(COronaVIrus Disease-19) 라는 명칭은 이런 분위기에서 도출됐다. 당일 학계는 원인 바이러스의 이름을 SARS-CoV-2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WHO는 이 명칭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SARS는 과거 발생 지역인 아시아 국가들에서 불필요하게 과도한 공포감을 일으킬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WHO는 SARS 및 MERS 경우와는 달리 바이러스 이름을 질병명에는 직접 표현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 결과 초창기 세계의 많은 언론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중국 우한 바이러스’라는 명칭은 일부 정치적 의도를 가진 사용을 제외하곤 거의 사라지게 됐다.

평화와 공존의 은유

병원체는 항상 신체 내부에 존재하고 있으며, 몸의 건강 상태에 균형이 깨져 면역능력이 약해지면 병원체가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by pxfuel 출처 : https://www.pxfuel.com/en/free-photo-jrfwc
병원체는 항상 신체 내부에 존재하고 있으며, 몸의 건강 상태에 균형이 깨져 면역능력이 약해지면 병원체가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출처 : pxfuel

바이러스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 분포하고 있는, 현실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전쟁의 은유는 마치 적군이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며 갑작스럽게 인류를 습격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일상의 통제가 별다른 사회적 저항 없이 정당화되는 전시상황으로 이끌 수 있다. 또한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싸움은 종종 이들에 감염된 인간과의 싸움으로 인식될 수 있다. 마치 마약이나 가난과의 전쟁이 결국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과의 전쟁으로 변질되는 것처럼,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바이러스 감염자와의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은유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령 생명의 위협이 대규모로 긴박하게 진전되는 상황에 신속히 대처해야 할 때라면 전쟁의 은유가 사태 해결에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 사회적으로 만연해온 바이러스와의 전쟁 은유의 부정적 요소와 학계의 연원을 인지하고 본격적으로 대안적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에서는 전쟁의 은유를 평화나 공존의 메시지를 담은 은유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의사, 간병인, 환자가족 등을 대상으로 암의 발생과 치료과정에 대해 대화할 때 전쟁의 은유와 여행의 은유를 비교해가며 반응을 확인한 연구가 있었다. 그 결과 전쟁의 은유는 병에서 회복하려는 의지를 고취시킨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회복되지 못할 경우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비해 여행의 은유는 때때로 고난이 닥치겠지만 죄책감 없이 함께 그 길을 가는 사람과 우연히 반갑게 만날 사람이 있어 결과적으로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사실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는 과학적 발견 내용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 베르나르라는 학자는 ‘내부환경설’을 내세웠다. 병원체는 항상 신체 내부에 존재하고 있으며, 몸의 건강 상태에 균형이 깨져 면역능력이 약해지면 병원체가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체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의 수가 조(兆) 규모에 달한다는데, 이들보다 훨씬 많은 수로 존재할 바이러스에 대해 베르나르의 관점을 취한다면 전쟁보다는 평화와 공존의 은유가 좀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 같다.

이 글은 필자의 논문 "'바이러스와의 전쟁' 은유의 의미와 한계", 「수사학」 40집, 2021, pp29-61을 요약해 정리한 것이다.

김훈기

스스로 ‘과학기술 커뮤니케이터’라고 생각하면서 과학기술계의 성과를 인문사회학과 시민사회의 시각에서 고민하며 집필하고 있다. 과학저널리즘 분야에서 13년간 활동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교양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유전자가 세상을 바꾼다』 『물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몸속 氣 여행』 『합성생명-창조주가 된 인간과 불확실한 미래』 『현대과학이 추적해온 인체의 비밀통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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