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자본론을 읽는다

당시 어린 나로서는 이 책의 문장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다짐은, 모두가 돈과 성장만을 이야기했던 그 호황의 90년대를 바라보며 “적어도 나는 자본의 노예처럼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3년이었다. 이보다 먼저 읽었던 책은 조영래 변호사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는데, 책 속 문장에서 ‘소외’라는 단어를 보고 궁금해 따라가다 보니 『자본론』까지 가 닿은 것이었다. 이 책은 당시에 금서는 아니었지만, 해금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어느 날 내가 살던 곳에 찾아왔던 정보과 형사는 “이런 책 별로 안 좋은 건데” 하며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계속 읽었던 까닭은 선배에게 “이 책 읽어도 될까요?”라고 물어보았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자본이 뭔지는 알아야지”라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 물론, 어린 나로서는 이 책의 문장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다짐은, 모두가 돈과 성장만을 이야기했던 그 호황의 90년대를 바라보며 “적어도 나는 자본의 노예처럼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Karl Marx(1818~1883)
사진 출처 : John Jabez Edwin Mayall

다시 학교를 다니며, 자본론을 읽는다. 30년 동안 그래도 머리가 큰 것인지, 이제 이 책의 문장들이 말하는 뜻이 이해가 된다.

처음 자본론이 한글로 번역된 건 1947년이었다. 당연히 번역자들은 월북하였고 그 뒤로 40년간이나 ‘자본’은 우리 사회에서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87년 이론과실천사에서 다시 자본론을 번역해 출간하는데, 당연히 출판사 사장은 잡혀갔고, 이 책의 번역자라고 하는 김영민은 세상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유추해 보건대 이 번역은 분명 당시 대학생들에게 독일어 사전 하나와 장별로 찢은 문건 하나씩 던져주곤 어디 골방에 숨어서 번역해 오라고 한 뒤, 그 글들을 모아 묶어낸 것임이 분명하다. 당시 번역 원고는 불태웠다 하고, 그래서 여전히 김영민이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이 변하며 이 뒤로 자본론은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수행 선생, 초판의 감수를 맡았던 강신준 동아대 교수, 채만수, 황선길, 김정로와 전종덕의 2022년판까지 8차례나 번역된 것이다.

이것저것 읽어보니, 10만 원이 넘는 최신판 자본론보다도 처음 번역했던 권당 5천 원짜리 초판이 더욱 마음이 많이 간다. ‘십일조’를 ‘10분의 1세’로 번역하고, 부불(不拂) 노동을 ‘불불노동’으로 써놓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오류투성이 번역이지만, 마르크스가 이 책의 1장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에서 이야기한, 상품의 구성요소 중 가장 중요한 ‘상품의 생산자에 대한 가치’가, 비록 김영민이 누군지 알 수 없을지라도 저 거친 번역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진주나 다이아몬드를 찬양하는 것이, 지옥 같은 노동의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저 세계의 비참을 해결하는 데에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진출처 : Max Böhme

우리가 이 책을 한동안 ‘빨갱이’로 표현했던 건(남한에 빨갱이가 있다면 북한에는 반동분자가 있다),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란, 쉽게 말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의 짧은 『공산당선언』만 보고, 자본론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이 책 역시 그런 선동이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을 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며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라고 물신숭배의 허상을 비판했다. 물신(物神, Fetish)이란, 18세기 초 아프리카 노예사냥을 하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의 종교를 비하하며 말한 경멸적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남는다. 진주나 다이아몬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매끈한 탄산칼슘 또는 탄소의 압축된 덩어리를 찬양하는 것이 오늘도 지옥 같은 노동의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저 세계의 비참을 해결하는 데에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여전히 ‘성장’을 슬로건으로 삼으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그 말조차 잊은 채, 오르는 금값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가.

이영준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