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받는 사람은 돌보는 사람에게 늘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

돌봄을 받는 사람은 돌보는 사람에게 늘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걸까? 돌봄에 대한 가장 뼈아픈 질문을 통해 돌봄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고, 진정한 돌봄은 ‘서로돌봄’일 수밖에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돌국'(Stone Soup)은 여러 나라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인공이 군인이 아니라 스님으로 각색된 《돌멩이 국》(존 J. 무스)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귀향하던 군인들이 한 마을을 지나갈 때다.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군인들은 광장에 큰 솥을 걸어놓은 다음, 돌멩이를 하나 넣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이 물었다. “뭘 끓이나요?” “돌국입니다. 맛이 기가 막힙니다. 양파를 넣으면 더 맛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양파를 가져왔다. 군인은 다시 말했다. “당근을 넣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당근을 가져왔다. “이제 감자를 넣으면, 더 훌륭할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갖은 재료가 들어가자 정말 멋진 국이 만들어졌고, 군인과 마을 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제가 발견한 ‘돌국'(Stone Soup) 끓이는 분들입니다. 노들장애인야학, 징검다리교육공동체, 감이당청년펀드, 한국청소년역사문화홍보단, 생태적지혜연구소, 더함플러스협동조합,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민들레국수집. 저도 형편에 맞춰 감자 한 알, 두 알 더하고 있습니다.

돌봄 받는 사람은 돌보는 사람에게 늘 의존적일 수밖에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불편하지만 질문에 동의합니다. 모든 것을 즉각적 교환(시장)가치로 환산하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돌봄의 수혜자(care-giver)와 돌봄의 시혜자(care-taker)의 위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관계의 너비도 말라 가고 있으며, 우리의 행동은 즉각적이고 단절적입니다. 근대화, 산업화 이전 살림살이 방식은 호혜와 재분배와 교환이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회관계를 촉진해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즉각적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경제가 재분배 영역을 왜곡하고 호혜 경제를 밀어내면서 탈이 난 것입니다.

자본은 돌봄 노동을 자본의 회로 속에 넣어 ‘저렴한 노동’으로 상품화하면서 동시에 ‘무상의 일/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연의 영역으로도 남겨놓는다. 이러한 이중착취는 여성에게는 동일한 일이 무상 노동과 유상 노동의 2교대 근무를 강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시장에선 저임금의 청소노동자나 가사도우미로 착취당하고, 가내노동에서는 무상으로 전유당하며 저임금 노동시장을 다시 떠받치는 것이다.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벨라스케스 작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y and Martha)〉, 런던 국립미술관
벨라스케스 작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y and Martha)〉, 런던 국립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는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기록되어 있는 일화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y and Martha).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이 먹고 마실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가까이 다가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일손은 부족하고 준비할 일은 많은데 마리아가 도와주기는커녕 예수님의 곁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으니 속이 편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 동생인 마리아도 자기를 거들도록 해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음식 준비는 많이 하지 않아도 좋다면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직후의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이 풍경이 아직은 낯설지만, ‘마르다의 시간’에서 ‘마리아의 시간’으로 돌아와야 할 때임을 각성하게 합니다.

돌봄은 인간이 자신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실천하는 일상 행동이다. 공동체는 근접한 사람들의 집합을 의미하고, 인간은 누구나 가족, 친구, 이웃 등 공동체와 함께 산다. 이 공간에서나 사회 전체에서는 부양, 재생산, 인간관계의 만족을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노동이 필요하다. 타인의 취약함을 돌보는 일은 모든 이들이 스스로의 취약함을 경험하게 하고, 그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보호자로 생각하는 자아도취적 확신을 버리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다. 다른 말로 성장 사회의 인류학적 핵심을 버리는 길이기도 하다.

자코모 달리사, 《탈성장 개념어 사전》

돌봄은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며, 관계 맺음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의지다. 돌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돌봄은 긍정적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삶의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공포를 먼저 느낀다. 돌봄 위기 사회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자가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돌봄을 받더라도 존엄을 해치는 사례가 널리 퍼져있다. 돌봄을 하는 자의 일상은 균형이 파괴되고 돌봄 스트레스가 극심해진다. 얼마 전부터 일본 사회를 뒤흔드는 ‘간병 살인’은 돌봄 위기의 공백을 메우던 개인이 강요당한 최후의 선택일 뿐이다.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가족, 연인 등 모든 친밀성의 관계들에서 한 개별인이 돌봄 노동의 시혜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수혜자로서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의 의미가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그룹의 사람들은 평생 가사 노동의 시혜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노동의 수혜자만 된다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자신과 타자를 구체적으로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강남순, 「강남순의 낮꿈꾸기」

귀족과 평민, 신과 피조물, 왕과 신민, 영주와 속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보호-피호(patron-client)’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국가와 시장 및 가족 제도 내의 다양한 ‘부양-피부양자’의 관계로 변형돼 계속 재생산된다. 이런 방식의 돌봄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선량한 목자의 온순한 양떼가 되는 것을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을 가축화하고 항구적으로 유아화하는 통치에 기반한 국가가 좋은 정치공동체일 수 없다.

채효정, 「돌봄(Care)」

2018년 5월에 일본 노인복지기관을 다녀왔습니다. 노인복지 현장 전문가 학습모임 행사였습니다. 다른 기관 방문도 있었지만, 특별히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 책으로 읽은 ‘요리아이 노인홈’이 궁금했습니다.

치매 노인을 시설에 가두어 눈에 안 띄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려 한다. 가족과 협력하고 지역과 손을 잡아 노인들이 고립을 막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해서 노인 간병 문제를 일상 세계로 끌어내려 노력한다. 이것이 ‘요리아이’의 기본 자세이고 ‘치매에 걸려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다’는 노인들의 바람에 부합된다.

가노코 히로후미,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

‘요리아이 노인홈’은 도로에서 작은 언덕을 거의 다 내려간 지점에 절구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내리막길에서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간병인이었습니다. 개하고 산책을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개한테 시선을 줬고, 일행 중에 한 분은 쓰다듬었습니다. 간병인은 개 줄을 길게 잡아주면서 한참을 기다려 줬습니다. 시간이 지났고, 2층 두 번째 유닛(unit) 공동거실에서 아까 개하고 산책 나갔던 간병인을 봤습니다. 약간 고개를 든 모습으로 시선을 우리와 맞춰줍니다.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무심한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치매 노인하고 나란히 앉아있었습니다. 공동 거실에는 치매 노인이 열 분, 간병인이 세 명 있었습니다. 그 간병인에게 계속 시선이 갔습니다. 간병인의 소극적인 의욕이 보기 좋았습니다. 전적으로 모든 것을 노인에게 집중하고 있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산책도 하고 휴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보기 좋았습니다. 간병인이 편안하다면 치매 노인들도 편안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간병인이 일에 지치지 않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 ‘요리아이’에서는 지역 자원 활용과 봉사자 활동으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없이 살기로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라면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이에게 우리 생활양식을 강요할 수 없다. 둘째, 아이 낳아 키우는 일은 욕심과 집착을 낳아 키우는 일과 같다. 셋째, 굳이 아이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우리 부부의 삶은 행복하다.

김미순, 《너무 가난해서 너무 행복한 삶》

우리 부부도 아이가 없습니다. 위에 세 가지 중 두 번째 이유에 공감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요즈음이라면 이유가 달라졌을 테지요. 힘겹게 결혼을 한다 해도 가난을 물려주기 싫고 아이가 자라서 나만큼의 삶도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노년 시대에 어떻게 지낼까요? 아이가 없는 노부부의 위험은 무엇일까요? 노인 돌봄 문제일까요?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노년 시대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까요? 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장남 중심으로 본인의 노인 돌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습니다.

한국 근대화 초기의 동력은 가족 중 한 명을 성공시키는 데 공모한 다음에 그 열매를 나눠 먹는 가족주의적 신분 이동 문화에서 나왔다. 그런 묘한 집단주의가 우리 일상 문화가 됐다. 그렇게 공모하고 결탁해서 끌어주고, 권력자의 비리도 밑에서 받쳐주는 것이 일상화됐기 때문에 ‘시민적 공공성’이 설 자리가 없었다.

조한혜정

내가 읽었던 논문에는 한국 교회의 성장 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1985년 이전까지는 선발 대형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 등장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산업화, 도시화로 향촌 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에 몰려든 노동자들이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지요. 정신적 지원 체제가 해체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된 시대입니다. 1985~1995년은 후발 대형교회(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 소망교회) 등장 시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교양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고민을 충족시켜준 것이지요. 꿈꾸던 중산층 삶을 이루고 싶었던 욕구 분출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5년 이후는 강남에서 분당으로 투자가 옮겨가는 시대입니다. 분당에서 대형교회가 나타납니다. 기득권화된 세력들이 강남 시대를 끝내고 분당으로 판을 옮긴 것이지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자본주의 이전의 모든 사회에서 ‘부’는 존경과 명예의 세계의 하위에 있었습니다. 또한 경제는 호혜와 재분배와 교환이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회관계를 촉진해왔습니다. 이윤 창출에만 골몰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주체이어야 할 사람/사회, 그리고 둘러싼 생태 환경을 망가뜨려 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화폐로 환산되고 수단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리고 그 무의미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는 이윤을 향해 달리는 괴물이나 시체처럼 살아가는 좀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한혜정

맞벌이 부부가 아이 맡길 데를 찾지 못하는 문제를 봅시다. 난처해하다가 옆집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눴는데, 이 아주머니는 사춘기 아들이 말도 안 듣고 너무 미워서 미칠 것 같다고 해요. 그렇게 대화하다가 이 옆집에 아이를 맡기게 됐는데, 모든 문제가 풀려버렸어요. 사춘기 아들은 자기 엄마가 아이 키우느라 바빠져서 덜 간섭하니까 관계가 좋아졌고, 아이가 있으니까 집 분위기도 부드러워지고, 아이도 안정적으로 잘 크게 됐다는 거죠. 이런 해법을 제도로 어떻게 찾겠습니까? 마을과 이웃이 있으면 애초에 문제도 안 생길 것들을 다들 제도로, 돈으로, 파행적 압축적 근대화를 겪는 인간으로만 풀려고 하니 ‘사람’으로서의 방법을 못찾는 것입니다.

조한혜정

대전 중구 석교동에는 〈남소저 빨래방〉이 있습니다. 지난 2003년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살던 아파트에 만든 빨래방입니다. 생전에 할머니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아파트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장을 동사무소에 전달했습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세탁기와 건조기를 마련했습니다. 빨래방이 생기면서 먹고 살기 바빠 봉사는 생각도 못 했던 주민들이 조를 짜서 자원봉사대도 만들었습니다. 지역 홀몸노인과 장애인 가정 등 소외이웃을 위해 주 2회 무료 세탁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노오력’해도 미래가 나아질 리 없다는 청년들의 불안과 무력감을 노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의 휘황찬란함을 포기한 시대의 지구 돌봄도 노인 돌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든 노인이든, 죽어가는 생명을 보듬는 시간을 버림의 시간으로 취급해온 오랜 역사에서 우리 다수는 공모자다. 생명 회복의 무모한 기대를 접고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하는 재난 시대에 필요한 역량은 오히려 생기가 아니라 끈기 아닐까.

조문영, 「노인돌봄과 지구볼돔」

윤장래

새로운 주거형태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공동체주거’에 대해 연구와 활동하는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베이비부머세대 막내이고 아내와 함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기업과 벤처기업, 출판사 직원, 상조(장지)사업 이력을 가지고 있고, 출판기획자와 강사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하루는 서울근교를 걷거나 북한산 산행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거나 유튜브와 현장 강의를 들으며 지낸다. 사람과 책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오십 이후 성 역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후, 일상의 자잘함을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또, 책을 수집하는 강박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 바람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과 조화로움의 균형적인 삶이다. 가까이는 아내와 함께 자전거 타고 마을과 이웃들을 기웃거리는 일상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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