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사람의 자기 돌봄, 자신의 고유함을 아는 것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자신을 돌보는 것은 쉽지 않다. 자기 돌봄을 위해 마음의 갈등을 인정하고, 자신의 고유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돌봄이 아픈 사람의 고유함을 아는 것이듯, 자기 돌봄은 자신의 고유함을 아는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 집중하고 신경 쓰니까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에요.”

얼마 전, 아픈 가족을 돌보는 지인이 내게 한 말이다. 돌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돌봄을 하다 보면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을 안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쩌다 혼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겨도 잘 쉬지 못한다. 지인은 혼자서 하고 싶은 걸 즐기려고 하니 마음에 묘한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돌보는 사람이 온전히 자기를 돌보지 못하게 하는 죄책감은 왜 생겨날까? 우선 아픈 사람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비교한다. 아픈 사람의 고통에 비하면 돌보는 사람의 고통은 별 거 아닌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거기에 돌보는 사람은 취미 생활을 하거나 휴식을 즐기는 동안, 아픔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는 괴리감도 크다. 그러니까 돌보는 사람은 활동이나 휴식에 집중하면서도 한 편에서는 죄책감을 억눌러야 한다. 이런 갈등이 돌봄을 하는 사람 대부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문제다.

돌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돌봐야지만 돌봄을 지속할 수 있다. by. William Farlow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IevaZPwq0mw?utm_source=unsplash&utm_medium=referral&utm_content=creditShareLink
돌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돌봐야지만 돌봄을 지속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William Farlow

하지만 돌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돌봐야지만 돌봄을 지속할 수 있다. 이 당연한 사실은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에도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돌봄 역할이 엄마, 아내, 며느리, 딸 혹은 가정 내에서 최약자에게 떠맡겨져왔기에 더더욱 중심적으로 논의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돌보는 사람이 자신이 없어진다면 온전히 누군가를 돌보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돌봄을 ‘아픈 사람의 고유함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함께 찾아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돌봄이 가능하기 위해서 돌보는 사람 또한 자신의 고유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아픈 사람의 고유함이 중요한 듯, 돌보는 사람의 고유함 또한 중요하다.

그를 위해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과 일정 정도 거리감을 유지해야 한다.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 마음의 갈등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죄책감은 당연하다. 하지만 죄책감으로 내가 잘 쉬지 못하는 건 돌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내가 충분히 쉬고 잘 즐겨야만 돌봄도 가능하다. 알면서도 잘 되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터놓고 함께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다. 마음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실천에 대한 지지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유함을 잃지 말자.

조기현

무언가 읽고 보는 시간이 삶의 동력이 됐다. 누군가 삶의 연료가 되고 싶어서 무언가 찍기도 했고 쓰기도 했다. 책 , 영화 , 공연 등이 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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