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수행 – 미래의 인간, 의식의 진화

코로나 19라고 하는 팬데믹 상황과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적 위기는 끝날 것을 예상할 수 없는 사건, 지금부터 시작되는 사건이다. 이는 ‘우주적 전환’의 과정이며 인류는 획기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 전환이란 새로운 주체를 필요로 한다. 에고에서 해방된 영성을 가진 ‘참나’로 거듭나고 다시 이들이 사회적으로 연대하는 것을 통하여 ‘집단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의식의 집단적 깨어남이 일어난다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디스토피아일지 모르는 생태적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개벽의 시대, 나비문명을 기대하면서 더 많은 대중들의 명상수행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인도 오로빌 공동체를 지난 2년간 경험하고 돌아왔다. 오로빌은 20세기 초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자 영적 지도자인 스리 오로빈도의 사상과 비전을 계승하고 있는 공동체다. 1968년에 설립된 공동체로 현재 약 3000명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공동체다. 오로빌의 목적은 ‘휴먼 유니티(Human Unity)’로 국적과 인종과 종교 등 모든 대립과 분열을 넘어서 모든 세계 시민들이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이곳의 설립자는 스리 오로빈도의 영적 동반자였던 마리 알파사 라는 분이다. 여기선 그냥 ‘마더’라고 지칭된다. 스리 오로빈도와 마더의 사상은 인류가 한번 더 의식의 진화를 통해 이성적 존재를 넘어 영성적 존재, 신성의식을 가진 새로운 신인류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인류에 의해서 신성한 삶(divine life),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문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상은 새로운 문명을 여는 의식 혁명의 기술

최근의 신생물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발적 진화󰡕라는 책에서 브루스 립튼은 애벌레로 태어났던 우리 인간이 바야흐로 나비, 곧 신인류로 변신하기 위해 어두운 고치 속에서 호된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의식의 진화를 이루어 낸 깨어난 사람들이 일정 숫자 이상에 이르면 이른바 ‘나비문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동학의 수운 최제우의 ‘다시개벽’도 같은 맥락이다. 수운은 ‘개벽’의 용어 앞에 ‘다시’를 붙임으로써 처음 천지가 열렸던 때와 같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암시했다.

물론 이러한 나비문명은 그냥 오는 것은 아니다. 먼저 인간의 진화, 의식의 혁명적 전환이 전제된다. 명상 수행은 그러한 인간의 진화를 위한 의식 혁명의 기술이다.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으나 아직 피어나지 못한 ‘신성’을 피워내는 삶의 기술이 바로 수행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는 아직 의식 혁명의 기술을 완전히 체계화하지는 못했다. 각각의 문화적 전통에 갇혀 있었던 탓이기도 하고,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이제 동서가 교통하고 모든 문화가 가로지르기를 하는 이 시대야말로 각각의 문화전통, 그 중에서도 인간의 꽃을 피워내는 기술들이 통합됨으로써 진정 새로운 시대를 예감해야 하는 결정적 시기를 맞고 있다고 할 것이다.

특정문화와 종교를 넘어 대중화 추세인 명상수행

한때 명상 수행은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엄정한 출가수행을 해야 하는 전문수행자의 영역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수행법도 엄격한 입문 과정을 거친 소수의 제자에게만 비밀스럽게 전달되었다. 때로는 비전이 적힌 책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했고, 그 책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행법을 두고 서로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수행법이 깨달음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명상, 수행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접근 가능한 영역이 되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지 않아도 가까운 명상센터나 요가원, 심지어는 주민센터의 문화강좌에서도 얼마든지 수강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 수행이 세속화, 대중화되었다. 대학과 대학원에도 명상과 요가 관련 학과가 생기기도 했다. 명상 수행과 관련된 유의미한 과학적 데이터들도 축적되고 있다. 현대 과학, 특히 심리학과의 만남도 많아지고 있다.

명상이 대중화된 데는 1958년 마하리쉬 마헤시 요기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인도의 전통적 수행법을 ‘초월명상(TM)’이라고 하는 간결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서방 세계에 보급하였다. 마침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중적인 확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수많은 인도 요가들이 앞 다투어 서방으로 진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즈니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티벳 불교가 가세했다. 티벳 불교의 상징인 달라이 라마와 초감 트룽파 린포체(1939~1987)도 널리 소개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벳 망명정부의 수장이자 정신적 지도자로서 서방 세계에 널리 어필되었다. 또한 초감 트룽파는 1970년대에 미국 버몬트 주에 북미 최초의 선원인 카메 초링 선원을 창립해 불교 명상수행을 소개했다. 그는 또한 북미 최초의 불교 대학인 나로파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https://api.ndla.no/image-api/raw/sx4ccd15.jpg?width=1120 비틀즈의 명상과 요가에 대한 관심은 명상수행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비틀즈의 명상과 요가에 대한 관심은 명상수행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사진 출처 : ndla

베트남 승려로서 평화활동가이기도 한 틱낫한 스님은 프랑스의 남부에 프럼빌리지 공동체를 건설하여 ‘마음챙김’(mindfulness)을 중심으로 불교를 대중적 수행법으로 안착시켰다. 그런가 하면 인도 출신의 기업가였던 고엔카는 불교의 ‘위빠사나(Vippasana)’ 수행을 재가자들을 위한 수행법으로 체계화하고 특히 십일 간의 코스를 통해 괴로움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과 지혜, 자비를 얻게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숭산 스님은 선불교의 간화선을 미국에 널리 전파했다. 이렇게 서방에 소개된 인도의 요가 수행과 불교는 종교로서라기보다는 수행법으로서 소개되어 다른 종교인들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한편 최근의 명상 트렌드는 이제 인도 요가나 불교적인 영향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서 어떤 특정 전통의 틀에 갇히지 않고 보다 실용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생각’과 그 생각을 하는 더 근원적인 나를 구분함으로써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지 말고 ‘지금 여기를 살아라’는 처방을 내놓았다. 『될 일은 된다』 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마이클 싱어 역시,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생각을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그것과 분리된 주체를 형성하고 자기의 생각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삶이 이끄는 대로 나를 내맡김으로서 오히려 더 자유롭고 평화롭고, 삶이 제공하는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한편 마이클 브라운은 십년간의 여행을 통해 7세 이전 형성된 감정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고, 『현존수업』이란 책을 통해서 스스로 누적된 감정을 정화하고 통합하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영성교육 매체인 마인드밸리의 창업자인 비센 락히아니는 명상의 목적이 명상을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데 있다고 하면서, 기존의 명상의 틀에서 벗어나 ‘6단계의 연습’법을 내놓고 있다. 6단계 연습이란 자비와 감사와 용서, 그리고 꿈, 완벽한 하루, 축복이다. 앞의 세 단계는 지금 더 행복해지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뒤의 세 단계는 미래를 위한 꿈을 구체화하고 북돋아준다.

이처럼 최근의 트렌드는 특정 종교나 특정 전통을 벗어나서 보다 대중적이고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반면 현대인들의 힐링과 웰빙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상업화의 문제라든지 끌어당김의 법칙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물질적 부와 풍요를 부추기는 문제도 있다.

명상을 통해 해방되는 과정과 원리

어떤 명상 수행이라도 심신의 릴렉스와 감정의 정화, 그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 완화 효과는 있다. 그러나 모든 명상 수행이 다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명상을 잘못할 경우 부작용도 적지 않다. 깨달음을 상품화하여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거나, 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 끌어당김의 법칙을 과대 선전하면서 오히려 물질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문제, 자기 수행법을 절대시하는 영적 독단, 그리고 약간의 체험으로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영적 에고의 문제, 게다가 실제로 인도와 티벳의 구루들이 일으킨 성적 스캔들, 게다가 현실을 도외시하고 가족을 떠나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해버리는 현실 도피, 또는 수행에만 매몰된 수행 폐인, 그리고 모든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림으로써 사회제도적 문제나 부조리, 모순에 눈감아 버리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명상 수행이 이러한 위험이 있다고 포기하거나 외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아기를 씻은 물을 버리려다가 아기마저 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부작용 때문에 본질이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소수의 영적 천재들에 의해 행해 왔던 명상 수행에는 우주와 생명, 인간과 의식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진리의 일부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 강조되면 기복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 명상의 핵심은 ‘자기 비움’이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감정을 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로써 잘못된 생각과 집착에서 오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부정적인 감정을 맑고 밝고 따뜻한, 긍정적 감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 상태에서 진정한 내적 평화와 자유, 그리고 기쁨이라는 마음의 본래적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 상태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과 자비다.

이러한 자기 비움은 내맡김(surrender)를 통해서 가능하다. 수행은 결국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을 내려놓고 삶에 내맡기는 것, 우주의 리듬에 몸을 싣는 것이다. 내맡김이 곧 현존의 기술이다.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내맡길 때 마음은 고요해지고 깊은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내 몸의 기운은 우주의 기운과 연결된다. 우주의 기운이라고 해서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공간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우주의 기운이다. 나를 온전히 내맡길 때 지금 여기의 기운과 연결된다. 내맡김에 익숙해질수록 그 연결감은 더 커진다. 그리고 연결감이 커질수록 나의 생각은 비워지고 감정의 정화가 일어난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의 덩어리들이 무의식의 어둠으로 있다가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과정은 때로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흘러나오는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오고, 어느 순간 안개 걷히듯 걷히게 된다.

이 무의식의 어둠을 형성하고 있는 감정,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있는 욕구들은 우리의 ‘하위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높은 의식과 연결되기 전에 자기 안의 하위 자아와 연결되어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하나는 자기의 하위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 안의 초월적 차원과 연결되어 신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것을 본래 마음, 참나, 성품, 신성이라고도 한다. 하위 자아는 ‘내면 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른으로 성장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외면당한 내면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그 목소리를 들어주는 데서 마음공부는 시작된다. 여기서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고 긍정적 감정으로 전환되면서 균형잡힌 인격, 통합적 인격이 가능하다. 상위의 힘과는 연결되었지만 하위자아와 연결되지 못하면 인격적 불균형이 더 심해지고, 영적 에고가 더 강해질 수도 있다.

분노와 슬픔과 원망과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이 겨울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자존감이 생기면 비로소 사랑과 열망 같은 긍정적 감정이 내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 긍정적 감정들 중에서 사랑이란 감정도 중요하지만 ‘열망’이란 감정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다. 이 열망은 내 안의 있는 나만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내적인 힘이다. 이 열망은 그동안 성장을 멈추고 골방에 숨죽이며 울고 있던 내면아이가 존중받기 시작하면서 알라딘과 같은 거인으로 성장한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자기를 존중해주는 주인을 위해 거인은 주인의 소망을 이루어준다. 자기의 꽃을 피우게끔 하는데 필요한 내면의 에너지가 열망이다. 이 열망이 있어야 자기의 꿈을 현실화시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소질을 꽃피워내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 열망이야말로 삶의 엔진과 같은 것이다. 이제 가슴 뛰는 삶이 시작된다.

수행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의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마스터(master)가 된 사람만이 삶의 마스터가 될 수 있다. 욕구와 감정,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끌려 다녀서는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예전 수행처럼 욕구와 감정을 부정하고 지나친 금욕과 고행의 극단적 방법을 쓰는 것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욕구와 감정, 그리고 생각을 존중하되 그것의 주인이 되는 삶이 바로 수행이다. 욕구와 감정은 물론이지만, 생각 자체도 내가 아니다. 생각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며, 그 생각의 주인이 ‘나’이다. 따라서 ‘나’는 욕구와 감정과 생각의 주인이다. 몸과 마음이 참나가 아님을 알고 참나의 주인 자리를 회복해서 내 삶의 운전대를 확실히 잡는 것이 바로 수행에서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시대의 수행은 마치 운전에 비유할 수 있다.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기름을 넣고 엔진의 시동을 켜고 운전석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앉아서 운전대를 잘 잡고, 목적지를 설정해서 지도나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물론 시동을 켜고 네비게이션을 켤 수 있다고 바로 운전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당한 기간 운전대를 잡고 자동차를 내 몸처럼 운전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수행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두 발의 힘으로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거나, 아니면 기사가 운전하는 기차나 버스에 올라타서 원하는 목적지를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수행은 직접 자가용을 운전하는 것과 같다. 시동을 걸어서 엔진의 힘을 이용하고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는 것과 같이, 하늘의 무한에너지와 지혜에 연결되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 힘과 지혜를 활용하되, 그 운전대는 내가 잡고 스스로 운전을 해서 목적지에 가는 것이다.

이는 자력적 수행과 타력적 신앙의 조화이기도 하다. 신이 없다고 하고 스스로 수행하여 깨닫는다고 하는 자력적 수행이 고상한 것 같지만, 자칫 영적 에고를 강화하는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구원을 저쪽에만 두고 섬김만을 강조하고 자기 수행의 치열함이 없으면 외적 권위에 빠지기 쉽고, 개인의 자유나 자기만의 독특성이 존중받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만의 독특성을 가지고 자기 삶을 운전해 가되, 하늘의 기운과 지혜와 연결되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수행이다.

‘내맡김’을 통해서 자기비움과 감정의 정화, 욕심없는 상태, 에고에서 해방된 주체가 되고, 지금 여기에 현존할 수 있게 되며, ‘열망’을 되살려 삶의 시동을 걸 수 있게 되면 비로소 가슴이 이끄는 삶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참나’로서의 주인의 자리를 회복함으로써 비로소 개벽의 시대의 새로운 주체로 신생(新生)할 수 있다.

물질주의를 넘기 위해 의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출처: https://pixabay.com/images/id-1807582/
물질주의를 넘기 위해 의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 pixabay

물질주의를 넘어 집단 영성시대, 나비문명으로 전환해야

개벽의 종교인 동학의 수운 선생이 깨달은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이것, 하늘의 에너지와 연결되는 방법, 그리고 내 안에 숨겨진 신성의 지혜를 받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수운 선생은 자신이 새롭게 깨달은 ‘시천주(侍天主)’의 ‘시(侍)’, 즉 ’모심’을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각지불이(各知不移)’로 해석했다. 하늘을 ‘모신다는 것’은, 저 공중의 하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하늘을 발견하여 그 지혜를 받고, 바깥의 하늘 기운에 연결됨으로써 하늘이 이끄는 대로 살되, 자신의 삶의 운전대를 굳건히 잡고 다른 그 무엇으로도 옮길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성을 깨달아 실현한다는 의미이다. 수운은 ‘수심정기(守心正氣)’라는 새로운 도법을 통해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내놓기도 했다. 여기서 ‘수심’은 마음의 고삐를 잘 잡는 것이고, ‘정기’는 자신이 욕구와 감정, 기운을 정화해서 삶과 우주의 흐름에 몸을 온전히 내맡긴 상태, 지금 여기, 실재, 우주 기운, 무한에너지와 연결되어 현존한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라고 하는 세계적 팬데믹의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적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시기를 살고 있다. 안 좋은 소식은, 이것이 곧 끝날 일이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치명적인 괴질이, 자연재해가 더 빈번하고 더 강력하게 덮칠지도 모른다. 다행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우주적 전환의 한 과정이며, 그 전환을 통해 인간의 의식이 획기적으로 진화할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신인류에 의해 인간의 문명이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스리 오로빈도는 이 전 과정이 하나의 우주적 ‘유희(lila)’라고 한다. 우리는 너무 심각하지 않게 이 우주적 연극을 즐겨야 할 지도 모르겠다.

스리 오로빈도의 ‘영적 진화론’이나, 수운 선생의 ‘개벽의 꿈’은 지금까지 한두 사람의 영적 천재들에 의해 깨달음을 얻던 시대를 지나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집단적 의식의 진화를 이룰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이제 ‘집단 지성’을 넘어 ‘집단 영성’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의 정황으로 보면 세계의 미래는 유토피아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의식의 집단적 깨어남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미래도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깨어난 소수가 희망이다. 그리고 질적 변화를 이룬 나비들의 집단적 연대가 유일한 희망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수행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진정한 의식의 진화와 확장이 일어나야 한다. 오늘날의 물질주의를 넘어서 삶이 거룩해지고, 다른 사람과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나아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특히 물질까지도 거룩하게 대할 수 있는(敬物) 근본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수운이 꿈꾼 다시개벽의 세상이며 나비문명이다.

이 글은 『개벽의 징후』(모시는사람들, 2020)에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한 글임을 밝힌다. 필자는 현재 귀국하여 경주에 머물며 대구대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김용휘

동학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천도교한울연대 공동대표, 방정환한울학교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2018년부터 2년간 인도 오로빌공동체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경주에 정착해서 두 아기를 키우고 있으며, 9월부터 대구대에 출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