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이상을 향하여 나아간 진흥왕의 탄소발자국 – 기후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의 장륙존상’ 읽어보기

『삼국유사』 「탑상」 편에는 삼국시대의 탑과 불상들이 모두 불교적 이상을 현실 세계에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의 결정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그 글을 읽다 보면 글 속의 탑과 불상 그리고 절들에 탄소발자국이 아주 어지럽게 잔뜩 찍혀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코, 불교적 이상은 함부로 조롱할 수 없다. 그렇지만 거기에 탄소발자국이 찍혀있다면 그 또한 확인하고 인정한 이후에야 더 확고하게 그 이상을 추구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이로운 이야기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에 ‘황룡사의 장륙존상[皇龍寺 丈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세 개의 작은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그것을 이야기 속의 사건들에 주목하여 시간순으로 배열하자면 다음1과 같이 할 수 있다.

(1) 인도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난 아육왕(阿育王)은,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공양(供養)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서 석가모니부처상을 주조하고자 하였지만 세 번이나 실패하였다. 왕은 불상 재료를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 16개 나라와 500의 중간 크기의 나라, 10,000의 작은 나라와 80,000의 촌락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불상을 만들지 못하였다. 최후로 신라에 이르렀는데,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불상을 주조하는 데 드디어 성공하였다.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1) 진흥왕 14년인 서기 553년 2월, 대궐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황룡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 대권 대신 절을 짓기 시작하여 서기 569년 17년 만에 완성하고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해안 울주에 남쪽으로부터 배 한 척이 나타났는데, 배 안에 글이 있었다. 글에는, 서축(西竺) 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모니 부처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원재료를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불상을 이루기를 바란다’라고 축원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배에는 석가모니 부처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진흥왕은 울주 동쪽 높고 밝은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그 세 불상을 모시게 하는 한편, 서기 573년 10월 17일, 단번에 장륙존상을 주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불상이 다 완성된 후에 동축사의 삼존불도 황룡사로 옮겨 모셨다.

(3) 중국 오대산(五臺山)에 간 자장(慈藏)율사 앞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釋迦)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의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 년이 지나서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완성되어 그 절에 모셔졌다. 대개 위엄과 인연으로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장육존상(丈六尊像)은 석가모니부처의 상이다. 이 불상은 키가 1장 6척이다. 석가모니 부처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석가모니부처의 몸집이 일반인들하곤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하고, 불상도 그 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육왕과 무우왕은 한때 인도를 통일하였던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왕[서기전 273~232년 재위]의 다른 이름이다. 그 아쇼카왕이 석가모니부처・문수보살・보현보살이 함께하는 삼존불(三尊佛)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나서, 인연이 있는 곳에서 삼존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삼존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 년’ 후 신라에서 그 불사가 이루어졌으며 문수보살이 자장율사의 꿈에 나타나 황룡사 삼존불이 아소카왕의 발원(發願)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하여 주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썼을 때 삼존불은 이미 없어진 후였다. 침입하여 온 몽골이 없앴다고 일연은 적었다. 그렇지만, 삼존불을 모셨음 직한 건물의 초석과 장육존상의 두 발과 광배를 고정하는 데 사용하였음 직한 3개의 홈이 나 있는 석조대좌가 황룡사 터에 남아 있고, 장육존상 머리 부분의 잔편(殘片)이라고 생각되는 4편의 나발(螺髮)이 그 터에서 출토되기도 하였기 때문에2, 연구자들은 황룡사도 있었고 장육존상도 있었다고 추정했다.

경이로움의 바탕이 되어준 사실

아소카왕 때는 “아직 불상을 만들지 않던 무불상(無佛像) 표현의 시기”3였다. 그러니 아소카왕이 인연 있는 곳으로 가라고 배를 띄울 일은 없었고, ‘황룡사의 장륙존상’이라는 이야기에 부합되는 삼존불 자체도 없었다. ‘황룡사의 장륙존상’ 속의 이야기들은, 아소카왕처럼 되고 싶었던 진흥왕이 황룡사를 세우고 장륙존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소모하여야 하는 불사(佛事)를 정당화(正當化)하고 수식(修飾)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이야기들은 아마도 사실을 실마리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사실과 관련하여 김수진은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장륙상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재료’와 ‘모양’은 배에 실려 하곡현 사포로 들어왔다. 사포는 현재의 울산 지역으로 울산은 신라가 외국으로 출국하고, 외국에서 입국하는 관문이었다. 장륙상의 재료와 모양은 572년 신라에서 북제에 파견한 사신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장륙상의 주조는 573년에 시작되는데 재료와 모양이 사포에 도착한 후 시간적 공백 없이 일련의 과정들이 진행되기 때문이다.”4 이 추정에 따르면, 진흥왕은 북제에 사신을 보내 장륙상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인 ‘재료’와 ‘모양’을 들여오면서 그것들이 아육왕이 보낸 것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린 셈이 된다. 진흥왕은 바로 장륙존상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 조성에 착수하고 성공하였다고 한다. “대건(大建) 6년 갑오(서기 574) 3월[사중기(寺中記)에는 계사년(서기 573) 10월 17일이라고 하였다.]에 장륙존상을 주조했는데 단 한 번에 성공하였다. 그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 10,198푼이 들어갔고, 두 보살에는 철 12,000근과 황금 10,136푼이 들어갔다.”5

1근은 600그램 혹은 375그램으로 환산되고 1푼은 0.375그램을 환산된다. 그러니, 삼존불을 조성하는 데에는 28,200킬로그램 혹은 17,625킬로그램의 철과 7.62525킬로그램의 금이 사용된 것이다. 최소 28.1톤 혹은 17.6톤의 철과 7.6킬로그램의 금이 사용된 것이다. 철과 금을 부리려면 고온이 필요하다. 김수진은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장륙상 조성 장소가 갖추어야 할 자연(또는 자원) 환경과 황룡사까지의 이동거리, 청동생산유적 등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주조 장소로 황남동 376번지 유적과 그 주변이 주목된다. 이곳은 질 좋은 목재가 풍부했던 서천의 숲과 가까워 목탄 생산에 적합하고, 마립간기 최고 계층의 분묘가 있는 신성한 지역이며 6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청동생산유적이 확인된 장소로 황룡사 장륙상이 주조된 문잉림이라고 생각한다.”6 일연은 당대의 자료들을 찾아보고 인용하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불상을 주조하는 데 드디어 성공하였다”7고 적었다. 김수진의 추정에 따른다면, 일연은 그곳의 입지조건이 불상의 조성에 적합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적 이상을 향하여 나아간 진흥왕

‘황룡사의 장륙존상’ 끝에 일연은 다음과 같은 찬미의 시를 적어놓았다.

“티끌 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마는
향불 모시는 인연 우리나라가 최고라네.
아육왕이 착수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오느라 그랬던 것이라네.”8

그것은 오래된 신성공간을 훼손하고 숲을 파괴하는 과정, 즉 탄소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geralt
그것은 오래된 신성공간을 훼손하고 숲을 파괴하는 과정, 즉 탄소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geralt

시는 신라의 지배세력이 신라가 불국토임을 신라 사람들에게 의식화시키려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게 한다. 의식화의 작업은 진흥왕의 주도로 진지하게 전개된 듯하다.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僧衣)를 입고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거처하다가 614년(진평왕 36)에 죽었다.”9 진흥왕은 불살생(不殺生)등 불교의 계율(戒律)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알리고 실천하는 행사인 팔관회(八關會)를 열어 정복 전쟁 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는 등 불교를 바탕으로 정치의 안정도를 높이려 하는 것에서 더 나가 불자로서 신행을 충실히 한 것이다. ‘황룡사의 장륙존상’은 진흥왕과 신라가 불교적 이상을 향하여 변화하여가는 과정의 한 대목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흥왕의 탄소발자국

한편 ‘황룡사의 장륙존상’은 온통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으로 뒤덮여 있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최소 28.1톤 혹은 17.6톤의 철과 7.6킬로그램의 금을 제련될 수 있는 광물의 채굴을 전제로 성립 가능한 이야기이다. 거기에 동원된 노동력은 얼만큼이며 물과 대기는 또 얼마나 사용되고 오염되었을까? 쇠와 금을 부리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가 필요한데, 신라 사람들은 그 높은 온도를 어디에서 얻었을까? 숯이 많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장륙존상을 만든 장소가 문잉림(文仍林)인 까닭도 그곳이 나무와 숯이 나는 숲이기 때문일 것이다.

탄소발자국 이전에 숲의 파괴도 있었다. “(미추왕 3년 갑자(서기 264년)에) 당시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당이나 의원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의원을 찾았다. 법사가 급히 대궐로 나아가자 병이 드디어 치료되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원하는 것을 물어보자, 법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빈도(貧道, 승려가 자신을 낮추어 이름)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에 복을 달라고 기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시작하라고 명을 내렸다. 풍속이 소박하고 검소했기 때문에 풀을 엮어서 집을 지었다. 법사는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을 하였는데, 때때로 하늘의 꽃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한다.”10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고구려 사람 아도가 공주의 병을 낫게 하자 왕이 원하는 것을 물었고 아도는 절을 지어 불교를 일으켜 나라의 복을 기원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왕이 허락하니 소박하고 검소하게 풀을 엮어서 절을 짓고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는 것인데, 그 절이 지어진 곳은 천경림(天鏡林)이었다. 불교 전래 이전 종교의 신성 공간이었던 천경림이라는 숲의 일부를 풀을 엮어 지은 흥륜사가 점유한 것이다. 그 흥륜사는 내내 풀을 엮어 지은 집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인 갑자(서기 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국사(國史)』와 향전(鄕傳)에 의하면 실은 법흥왕 14년 정미(서기 527)에 처음 터를 잡고 21년 을묘(서기 535)에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베어내어 비로소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기둥과 들보의 재목은 모두 다 그 숲에서 충분히 가져다 썼으며, 주춧돌과 섬돌과 감실 등도 모두 갖추어졌다. 진흥왕 5년 갑자(서기 544)에 이르러서 절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갑자년이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서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를 지었다.”11 서기 264년에 풀을 엮어 지은 절 흥륜사는, 서기 544년에는 천경림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베어내고 그 나무를 비롯한 천경림 안의 자원들을 충분히 사용하여 지은 대흥륜사 혹은 대왕흥륜사가 되었다고, 일연은 280년 걸린 숲 파괴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서기 544년에 흥륜사가 ‘완성’되기까지의 기록은 문명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참회와 도덕적 삶을 강력하게 권하는 불교라는 종교가 한 정치체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된 신성공간을 훼손하고 숲을 파괴하는 과정 즉 탄소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속 이야기들에서 탄소발자국 읽기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참회하는 삶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도덕적 삶을 권고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의 변화와 깨달음이 일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숭고한 일일 것이다. ‘황룡사의 장륙존상’은 그러한 숭고한 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륙존상을 만드는 일은 노동력과 자원을 고도로 동원하는 과정이었으며 당대의 신라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어지러운 탄소발자국으로 가득 채우는 결과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일연이 그 과정을 주저함 없이 아름답게 『삼국유사』에 기록하였다는 것을, 오늘 뒤늦게 확인하고 나니, 기분이 좀 씁쓸하기도 하고, 마음이 많이 서늘하기도 하다. 진흥왕은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진지한 불자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는 불교를 단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하여 이용하기만 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는 불교적 이상을 향하여 나아간 불자의 모습을 역사에 남겼다. 그러면서 그는 탄소발자국도 꽤나 남겼다.

진흥왕과 신라가 불교적 이상을 향하여 변화하여가는 과정은, 노동력과 자원을 고도로 동원하는 과정이었으며 당대의 신라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어지러운 탄소발자국으로 가득 채우는 결과를 남겼다. 
사진 출처 : geralt
진흥왕과 신라가 불교적 이상을 향하여 변화하여가는 과정은, 노동력과 자원을 고도로 동원하는 과정이었으며 당대의 신라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어지러운 탄소발자국으로 가득 채우는 결과를 남겼다.
사진 출처 : geralt

절집에는 일호흡지간(一呼吸之間) 즉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 사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인생이 짧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하고, 생사는 순간에 갈리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주기도 하고, 기쁨도 슬픔도 결국은 찰나에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전해주기도 한다. 절집의 스승들은 이런 생각, 깨우침,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이 ‘일호흡지간’과 1대1로 대응하는 것인지 직설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런 가운데 이제 문잉림 속에서 많은 나무 등 숲속의 자원관 환경을 파괴한 대가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나니, 나는 장륙존상 같은 것도 못 만들면서 오염된 공기만 배출하는 호흡을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섭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삼국유사』 속 이야기들에서 탄소발자국을 읽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본 것은 나름의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교적 이상은 결코 함부로 조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탄소발자국이 찍혀있다면 그 또한 확인하고 인정한 위에서 더 확고하게 그 이상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보여 준 성찰의 역사가 이러한 확신을 더욱 굳게 하는 것 같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1.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의 장륙존상’ 참조.

  2. 배재호,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6> 신라불상 ① 신라의 불교 공인과 황룡사 장육존상’,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2020.04.01 참조.

  3. 배재호,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6> 신라불상 ① 신라의 불교 공인과 황룡사 장육존상’,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2020.04.01.

  4. 김수진, 「『三國遺事』 「皇龍寺丈六」條의 造像 과정 검토 (Reviewing the manufacturing process of the six-foot statue of Buddha, Hwangryongsa from Samguk yusa)」, 『한국학논총』 vol.43(통권 43호), pp. 33-66, 2015, KCI 통합검색 ‘초록’.

  5.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의 장륙존상’

  6. 김수진, 「『三國遺事』 「皇龍寺丈六」條의 造像 과정 검토 (Reviewing the manufacturing process of the six-foot statue of Buddha, Hwangryongsa from Samguk yusa)」, 『한국학논총』 vol.43(통권 43호), pp. 33-66, 2015, KCI 통합검색 ‘초록’.

  7.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의 장륙존상’

  8.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의 장륙존상’

  9. 다음백과 ‘진흥왕’

  10. 『삼국유사』 「흥법」 ‘아도가 신라에 불교의 터전을 마련하다[阿道基羅]’

  11. 『삼국유사』 「흥법」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순교하다[原宗興法 厭髑滅身]’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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