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휴머니즘 시대의 참회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의해」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 읽어보기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은 존재를 끊임없이 재정의한다. AI를 사람과 대등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기도 하며, 고통이 제거된 사람을 만들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즘들 앞에 불교의 참회를 놓아보면, 이즘들은 참회를 존재의 재정의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그렇듯 끊임없이 재정의되면서 상호교섭하는 존재들은 기후 위기의 당사자이며 가해자이며 희생자이며 수혜자일 것이고, 속된 말로 호구이기도 할 것이다.

『삼국유사』 「의해」편에 행적이 수록된 승려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원광, 보양, 양지, 인도에 간 여러 스님들, 혜숙, 혜공, 자장, 원효, 의상, 사복, 진표, 승전, 심지, 대현, 법해. 이들 가운데, 원광・자장・원효・의상은 유명한 이들이다. 이들에 비하면 진표는 덜 유명하다. 그러나, 알아볼 가치가 있는 행적을 남긴 승려다.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鍊三業]과 삶을 돌아봄[懺]

“진표는 …… 이름난 산을 두루 유람하다가 선계산(仙溪山)의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닦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 7일 밤을 기한으로 온 몸을 돌에 쳐서 무릎과 팔이 부서지고 바위 낭떠러지로 피가 비오듯 하였지만 보살의 감응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을 버릴 결심으로 다시 7일을 더 잡았는데, 14일째 되는 날 마침내 지장보살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다. …… 진표의 나이 23세이었다.”1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삼국유사』 「의해」‘진표가 간자를 전하다[眞表傳簡]’는 진표가 수양하는 모습을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여기에서 단연 눈에 뜨이는 것은 “온 몸을 돌에 쳐서 무릎과 팔이 부서지고 바위 낭떠러지로 피가 비오듯 하였지만” 이라고 한 부분일 듯하다. 그렇지만 그 부분이 주는 자극을 잠시 덮어두고 인용문 전체의 맥락을 다시 살펴보면, 이 글은 진표가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鍊三業]2과 삶을 돌아봄[讖]3을 함으로써 지장보살에게서 출가자가 지켜야 할 바[淨戒]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선업 짓기와 참회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권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학적 신앙행위를 찬양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한편 이렇듯 구체적인 행동을 권하는 것은 왠지 불교적이지 못한 듯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곧 선(禪)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런 것 같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번뇌 그대로가 곧 보리[지혜]라는 말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공(空)하니 번뇌도 보리도 모두 공하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열반경(涅槃經)』 등의 경전에 나온다. 그래서 여기저기 많이 인용되고 불교사상을 대표하는 말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나 경전들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라는 조건이 달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조건을 알고 볼 때와 모르고 볼 때, “번뇌즉보리”의 해석 둘은 하늘과 땅 차이를 보일 것이다. 경전이 전한 뜻은 모든 존재에게 “번뇌즉보리”인 것이 아니라는 것일 것이다.4 그러나, 깨달음 여부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번뇌는 곧 보리’라는 식의 오해가, 널리 퍼져있는 듯싶고, 그 결과 불교가 도덕적 삶을 권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게 된 듯하다. 특히, 불교 선종(禪)의 수행방법을 둘러싸고, 유사한 오해가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도덕적 삶을 권하는 것과 선종의 수행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불교 선종(禪)의 수행법이다. 1997년 이종익이 집필하였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돈오점수’ 항목에 따르면 이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진심(眞心)의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습기(習氣)를 제거하여 가는 수행방법”이다. 이 수행방법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 종밀(宗密)이 다섯 가지의 선 수행방법을 제시하였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① 점수돈오(漸修頓悟) : 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 일시에 깨달음.
② 돈수점오(頓修漸悟) : 닦기는 일시에 닦지만 공행(功行)이 익은 뒤에 차차 깨달음.
③ 점수점오(漸修漸悟) : 차츰 닦아가면서 차츰 깨달음.
④ 돈오점수(頓悟漸修) :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와 습기를 차차 소멸시켜감.
⑤ 돈오돈수(頓悟頓修) : (과거부터 닦아온 결과) 일시에 깨치고 공행을 다 이룸.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돈오점수를 채택한 이래 이 방법이 한국 선종의 주된 수행방법이 되었다고 한다. 지눌은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고, 또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서 의정(疑情)을 대번에 쉬고 스스로 자긍(自肯)하는 데 이르면 곧 수심인(修心人)의 해오처(解悟處)가 되나니, 다시 계급과 차제가 없으므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무시(無始) 이래로 쌓아온 습기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습기를 없애는 수행을 하여야 하며, 점차로 훈화(薰化)하여야 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하였다. 지눌은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열기를 얻어서 녹아야 비로소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였다. 즉, 얼음이 물인 줄 아는 것을 돈오라 하고, 얼음을 녹이는 것을 점수로 본 것이며, 먼저 본성을 알고 행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깨치기 이전에도 수행을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수행은 바른 길이 아니며 항상 의심이 따른다고 하였다.5

지눌의 설명에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 빈틈을 자기도 모르는 새에 빠져나와 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그 반대급부로 도덕적인 삶의 압박에서 ‘해방’되었을 듯하다. 그러나 지눌은 ‘쌓아온 습기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습기를 없애는 수행을 하여야 함’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습기 버리기는 어떻게 행하여지는가? 여기에서 진표가 지장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행한 바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과 ‘삶을 돌아봄’에 주목해 볼만하다. 이 두 가지 수양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예로 말을 올바로 함[正口業]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하는 것이다. ‘삶을 돌아봄’은 곧 참회(懺悔)이니, 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행한 바를 스스로 되짚어보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진표가 보여준 바와 같은 ‘수양이자 실천인 것’이 없다면, 불교 특히 한국 선불교는 ‘번뇌즉보리’・‘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음’・‘마음이 곧 부처’ 같은 호쾌한 문구들을 사람들 사이에 유포시켜놓고 도덕적 삶은 권하지 않는 종교가 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멸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당나라 종밀(宗密)이 다섯 가지의 선 수행방법을 제시할 때 돈오돈수(頓悟頓修)는 ‘과거부터 닦아온 결과’가 먼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미 수양을 통하여 선업을 쌓아 깨닫기 직전의 단계에 와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돈오돈수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 수행법임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밀은 호쾌한 구호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제시한 선(禪)은 진표가 보여 준 바와 같은, 수양인 동시에 실천이기도 한,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과 ‘삶을 돌아봄’을 선결과제로 요구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밀이 다섯 가지 선 수행 방법을 설명하는 가운데 사용하였던 ‘공행(功行)’이라는 말이 아마도 진표가 보여주었던 수양이자 실천인 것에 가까운 것일 듯하다.

참회, 급속한 의례화와 양식화의 과정에서 소멸의 위기에 처하다

진표가 보여 준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과 ‘삶을 돌아봄’. 그리고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상징되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선 불교. 이 두 흐름이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 불교의 역사가 전개되었는지 아닌지를 여기에서 논하기는 어렵다. 역사 속의 한국 선 불교 전개는 선맥(禪脈)의 계승을 자임(自任)하는 오늘의 조계종의 모습을 보면서 평가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표의 수양과 신행이 처한 역사적 환경은 『삼국유사』 「의해」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에서 볼 수 있다.

…… 뜻이 미륵보살에 있었기 때문에 중지하지 않고 곧 영산사(靈山寺)로 옮기어 또 처음과 같이 부지런히 용감하게 수행하였다. 그러자 과연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아울러 증과(證果)의 간자(簡子)6 189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그중 제8간자는 새로 얻은 오묘한 계율을 비유한 것이고, 제9간자는 구족계를 얻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바로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으로 만들었으니, 여러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 세상에 불법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거라.”7

불교에는 나무막대기[간자(簡子)]를 사용하여 점을 치는 것과 같은 의식(儀式)을 통한 참회가 있다. 이 참회가 어떻게 행하여지는지는 위의 인용문 속 미륵보살의 말에서 볼 수 있다. 미륵보살은 189개의 간자 가운데 187개가 각각 번뇌를 비유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하나의 간자에는 하나의 번뇌를 비유한 내용이 적혀 있어서 그 간자를 뽑은 사람은 그 내용을 읽어보고 자신이 빠진 번뇌를 되돌아보는 참회를 할 수 있도록 의식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시행 초기부터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고 한다.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는 개황(開皇) 13년(서기 593)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선악(善惡) 두 자를 던져 점을 치면서 하는 참회법인 탑참법(搭懺法)과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여 죄를 뉘우치는 박참법(撲懺法)을 성행하자, 당국이 이를 요망하다 판단하고 금지시켰음을 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면서도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진표가 실천한 것들과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들은 불교적 수양과 깨달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었다는 평가도 기록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일찍이 중국에서 참법과 점찰법을 금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상쇄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사 속에서도 점찰법의 시행은 요행수를 노리거나 사사로운 복만을 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으며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더 주목할만한 것은, 지금도 불교인이 아님이 분명한 종교인이나 점술인들이 불교인임을 참칭하면서 복을 빌어주거나 앞날을 미리 점쳐 주는 등의 행위를 할 수 있는 불교 내의 가능성이, 점찰에 수반되었던 문화의 흔적에 의지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찰・탑참・박참은 사람들이 참회를 좀 더 친근하고 감성적이고 진정성 있게 행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고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의례(儀禮)가 되고 양식(樣式)으로 틀지워지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왜냐하면 나의 몸과 마음을 전부 던져 자신에게 속임이 없어야 하는 참회는 세속의 일상인들에게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참회가 의례가 되고 양식이 되자 많은 일상인들은 그것을 오락이나 유희 혹은 과시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황은 유명인이 선의를 가졌음에도 자기도 모르게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에 빠져드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듯 1000여 년 전에 일찌감치 의례화와 양식화의 과정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던 참회는, 지금은 포스트휴머니즘・트랜스휴머니즘과 충돌하는 것 같다.

이런저런 휴머니즘 시대의 참회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본주의의 편협함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인간 아닌 존재를 도적적 추론과 정치적 갈등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는 당사자로 맞이하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사진출처 : Alex Knight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본주의의 편협함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인간 아닌 존재를 도적적 추론과 정치적 갈등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는 당사자로 맞이하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사진출처 : Alex Knight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탈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수 세기 동안 인류가 떠받들어왔던 휴머니즘이 인간 중심주의에 갇혀있었던 사고였음을 주장한다. 한편 고도의 계산 능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며 ‘진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인공지능[AI : Artificial Intelligence])도 인류와 경합하는 이해 당사자로 보고 그 존재를 도덕적 추론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인공지능을 내장한 기계 등 인공구조물이면서도 도덕적 추론에 포함시켜야 하는 존재를 포스트-휴먼[인간 아니면서 인간같은 존재]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본주의의 편협함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인간 아닌 존재를 도적적 추론과 정치적 갈등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는 당사자로 맞이하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다.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을 개선하려는 운동이다. 인간 강화(human enhancement)의 동의어로 쓰일 때도 있다. 이 운동은 사람이 겪는 고통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고 이를 과학과 기술로 회피하려고 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로 사람의 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로부터 많은 이익이 발생할 수 있는 반면, 부작용과 위험 또한 예상할 수 있다. 이 운동에 의하여 고통이 감소되는 방향으로 변형된 사람을 포스트휴먼(posthuman)으라 하기도 하기 때문에,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주의[ism]들은 존재들을 끊임없이 재정의함으로써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분배의 지형을 계속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러한 갈등과 분배의 최전선에 닿아있는 기후 위기와도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또한 이런 주의들은 규범을 논하는 장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 역시 끊임없는 존재의 재정의에 기인한다. 그리고, 규범은 아니지만, 오랬동안 권장되어왔던 태도나 행동방식과도 부딧치면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의 발생은 비난할 일도 비극적인 일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은 대단히 섬세하게 다뤄야 할 것인 듯 싶다.

진표의 수양이자 실천인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과 ‘삶을 돌아봄’은 모두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삶을 돌아봄’은 곧 참회(懺悔)이니, 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행한 바를 스스로 되짚어보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참회의 주체와 그 주체가 고려해야만 할 타자에는 트랜스 휴먼이 만들어 낸 존재와 ‘포스트 휴먼’이라는 이름 아래 분류해야 하는 존재들이 포함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분배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행하는 이익 계산에서 법인[法人, legal person, legal entity]이 이해 당사자로 고려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이 법인 – 트랜스 휴먼이 만들어 낸 존재 – 포스트 휴먼 등등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섬세하게 고찰하는 것은 장차 정치적 경제적 활동의 상당 부분을 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섬세하고 복잡한 고찰에 있어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하겠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진표의 참회는 아직 유효하되 대폭 확장되고 다양화되고 있는 존재들을 고려하는 더욱 섬세하고 치열한 행위가 될 듯 싶다.

이제, 진표가 보여준 수양이자 실천인 ‘몸과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함’과 ‘삶을 돌아봄’에 집중하기 위하여 잠시 덮어두자고 하였던 선정적인 장면 즉 “온몸을 돌에 쳐서 무릎과 팔이 부서지고 바위 낭떠러지로 피가 비오듯 하였지만”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면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분명 대단히 역설적일 수 있지만, 현재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도 있겠다. 망신참법(亡身懺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선정적인 행위는 트랜스 휴먼을 지향하는 운동에게는 발상 전환을 가능하게 하여 주는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임무를 달성하는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 1984)》 연작의 주인공은 이미 30여년 전에 망신참법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고통의 제거를 지향하지만 외견상 피학적 행위인 망신참법은 진정한 고통과 쾌락이 무엇인지 계속 물어야 함을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하여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듯 진정한 고통과 쾌락이 무엇인지 계속 물어어야 함은, 상당 부분 쾌락의 역리[逆理 paradox]의 소산이기도 한 기후 위기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놓을 수 없는 화두 같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1. 『삼국유사』 「의해」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

  2. 삼업(三業)은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이니, 삼업을 단련한다는 것은 몸과 말과 마음을 올바로 함이라고 풀어볼 수 있겠다.

  3. 참(懺)은 참회이니, 삶을 되돌아 봄이라고 풀어볼 수 있겠다.

  4. 불교용어사전 ‘번뇌즉보리’ [https://studybuddha.tistory.com/2592] 참조.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돈오점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070] 참조.

  6. 작은 손가락 크기로 만든 점치는 점대로, 점괘의 글이 적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역자 주.

  7. 『삼국유사』 「의해」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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