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에서 벗어나기

눈은 ‘있는 것’만을 보고, ‘살아있는 것’을 못 본다고 하는데, 지금의 도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갈까. 생명의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고 있을까.

볼음도 개펄. 사진제공 : 우수경
볼음도 개펄. 사진제공 : 우수경

2020년 10월. 청명한 가을에 강화도 볼음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인천 공항에서 버스를 탄 후 다시 배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었던 볼음도는 드넓은 서해의 개펄과 북쪽 해안선은 남방한계선이 펼쳐진 곳이다. 사람의 수보다 철새가 수백 배 많은 이곳에서 불멍, 바다멍, 하늘멍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나즈막한 집 몇 채. 온통 황금물결의 논, 그리고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그 너머엔 온통 바다인 곳인데 새들이 이른 아침에 비행연습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고요 속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길고 온통 까만 밤을 보내게 된다. 서울은 아닐지라도 불야성인 시멘트 도시인 부산에서 생활을 해오던 터라 볼음도가 선사한 자연은 문명 이전의 무(無)에 가깝다. 텐트에서 자고 밥도 야외에서 먹으며 볼음도 비밀의 정원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용달차를 타고 시내로 나올 때의 이질감을 기억한다.

강화도에 높은 건물이 없지만 볼음도에 비해선 눈에 걸리는 게 많았다. 볼음도의 자연에 적응되어 나의 눈이 망막에 맺히는 사물과 환경에 초점을 맞추느라 눈이 금세 피곤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망막을 Retina(그물)이라고 하는데, 『신생철학』(윤노빈)에서 눈 속에 ‘그물’(Retina)이 있다며 사람은 자기가 갇힐 감옥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44쪽)고 했다. 눈은 ‘있는 것’만을 보고, ‘살아있는 것’을 못 본다(46쪽)고 하였다. 그러면서 눈에 보인 사람은 벌써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눈총을 맞아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47쪽)고 하였는데, 그동안 내 눈총으로 죽은 사체들은 최근 급작스럽게 고층화된 아파트와 건물들, 복잡해진 도로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볼음도에서는 무(無)의 세계에서 소리로 세상을 상상하는 시간들을 보낸 것이다. 그러다 강화도 시내로 들어서자 갑작스럽게 온갖 건물과 인간이 만든 이기들이 내게 어떤 법칙을 주입하는 도시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때의 느낌은 생생하게 몸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간혹 그때의 느낌이 떠오를 때면 도시의 무지막지한 중압감에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하다.

도시에도 과연 영혼이 있을까? 볼음도에서의 그 경험이 나의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생긴 질문이다. 벤야민이 그랬듯 비판적 역사의 과제는, 진보를 추구하거나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닌, 현재를 발굴하고 현재 속에 감춰진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것이리라. 현재와 과거의 경험이 연결된다고 하지만, 흔적이 모두 사라지면 과거의 경험을 연결하기 어렵지 않을까. 반백살이 다 되어 가는 내 어릴 적 동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위에 고층 아파트가 세워져 있으며 옛 골목은 사라졌다. 특히나 부산 해운대엔 초호화 100층짜리 레지스턴스 엘시티가 우뚝 서 있는데, 이 인근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야영상영회를 했었다. 그 장소는 1996년에 처음 개최되었던 부국제를 하던 공유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사유지로서 특정인을 위한 곳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의 무의식으로 내려앉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도시는 무엇을 깃들게 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사귀고, 심지어 ‘200충’, ‘300충’이라는 신조어를 말한다고 한다. 아버지의 월급을 비하하여 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상징적인 말이다. 요즘은 온통 숫자로 가득하기에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으로 점철된 세계에 촘촘하게 식별 가능한 세계가 되어 지금의 도시는 소위 식별의 눈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닐까 싶다. 특히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는 교육활동을 정성적 평가로는 믿지 못하지만 정량으로 점수화시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뢰한다. 점수는 결국 등수로 연결되고 진학 및 취업 자료가 되기도 한다. 직장인들의 연봉은 물론 아파트의 평수, 소비생활에서도 가성비를 비교하는 금액, 최근 놀이문화인 게임에서 재매를 주는 요소인 레벨까지 우리들의 사회는 점점 식별하기 편하게 계량화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코로나 시국으로 정확한 숫자로 표현 가능한 디지털 세계가 더 가까이 왔다.

최근 《콩나물》(윤가은 감독, 2013)을 고등학교 학생들과 본 후 감상을 나누었다. 2013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을 2005년생 아이들과 영화를 봤으니 작품 속 7살인 보리도 2022년이면 우리 학교 아이들과 비슷한 연배가 되었겠다. 아무튼 이 영화에 나오는 골목, 문방구, 어린이, 제사, 이웃, 이모, 삼촌, 숙모는 옛날 말이 되어버린 걸까.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니 영화에 나오는 소재가 모두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전혀 공감대를 가질 소재가 없다. 그래서 한참을 아이들에게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원래 영화라면 그 장면에 푹 빠져서 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인데, 아이들의 사고를 가로막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좌) 공주 황새바위순교성지  / (우) 공주 우금치 격전지. 사진제공 : 우수경
(좌) 공주 황새바위순교성지 / (우) 공주 우금치 격전지. 사진제공 : 우수경

최근 충청남도 공주를 방문했다. 곱고 강직한 마음들이 서려있는 우금치격전지, 백제 시대의 공산성, 신앙을 지키려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황새바위순교성지가 보존되어 있었다. 공주는 조용히 침잠해있었기에 난개발과 신자유주의 물결에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로컬’의 시대에 지역을 복원하는 시대와 연결되어 세계유네스코 도시로 선정된 ‘공주’가 참 반가웠다. 제민천의 재잘되는 물소리와 그 가장자리의 아기자기한 풀꽃더미들이 산책을 즐겁게 했다. 오직 소비로 연결되는 도시의 여행과 사뭇 다른 공주에서 지키기 위해 사라진 넋들을 갑작스럽게 마주하며, 얄짤없는 거대하고 굳건한 세상과 권력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곳 공주는 멸망한 백제의 궁터조차 발견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권력자들은 의도적으로 역사 속에서 백제의 흔적을 지워버렸을 것이다.

공주 예술가의 정원 카페. 사진제공 : 우수경
공주 예술가의 정원 카페. 사진제공 : 우수경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선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간직하는가. 역사를 지우고 영혼 없는 도시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공주에 있는 공간 ‘예술가의 정원’은 1936년 3월 21일에 지었던 건물을 2019년에 복원한 카페인데, 1930년 대지주의 손자로 막대한 유산을 받자 2천 명의 빚을 탕감했지만 1930년 중반 가세가 기울어 어디론가 떠나버린 홍원표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홍원표의 삶의 궤적이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2019)에서 알게 된 조선사회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조선 사회에서 농촌을 움직이는 주체가 소농이었는데, 지주가 농촌에 함께 살고 있어도 지주가 소농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한다. 소농들의 조직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세금을 납부한다든가,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든가, 공동으로 공적인 노동을 한다든가, 공동으로 국가 폭력에 대항한다든가 했는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100년 동안 그런 변화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레’를 조직하였는데, 두레는 소유자나 지배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모임의 대표가 있지만 각각의 구성원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권리를 누리는 조직이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소농들이 마을 일을 계획도 하고 직접 운영하였기에 동학농민들은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꿈꾸었다. 상공업의 발달이 늦은 것이 조선 사회의 강점이 되었다고 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학농민군으로 참가한 이 역시 대부분 소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30년대 농촌 사회를 그린 김유정의 『봄・봄』에서는 지주 대신 소작농을 관리하는 마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마름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된다. 이 소설에는 중간관리직의 횡포로 인해 몰인정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일면을 포착하고 있는데, 동학에서 꿈꾸던 새로운 경제공동체의 꿈이 꺾인 채 128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최근엔 경계 너머 아름다움을 꿈꾸는 공공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멸종 위기의 동물 같은 존재가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신생철학』에서 윤노빈은 사람의 눈은 눈알로써만 보지 않고, 눈알 뒤에는 눈알을 ‘자유로이’ 굴리는 정신적 힘줄이 있다고 했다. 사람은 그물을 째고 나올 수 있는 힘, 즉 자유의 불빛을 지니고 있다고 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正見) 또한 단순히 눈에 비치는 현상, 망막에 걸려드는 사물을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삭막한 도시에서는 저절로 정견에 다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충청도 공주에서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담담하게 과거와 현재를 대화할 수 있다면, 생명의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수경

‘경험디자이너’라는 자의식으로 부산에서 고등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촛불 하나 밝히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삶에 있어 기쁨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위한 사랑과 용기를 반려견 동풍이에게서 전수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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