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⑥ 사랑이 세상을 재창조한다

사랑은 시간을 느리고 여유롭게 만들며, 삶의 작은 변화를 촉진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일상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여 내면의 잠재성을 통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사랑을 비롯한 모든 정동은 관계 속에서 활성화되며, 고립된 개인은 정지된 감정과 환상을 경험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정동을 생성하고 활성화하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랑, 잠재성의 시간을 열어젖히다

스피노자의 사상에는 빠름과 느림에 대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체 표면 위로 정동의 속도, 온도, 밀도, 강도가 빠름으로도 느림으로도 나타난다는 이야기지요. 좀 난해하게 들리지요? 저는 아내와 결혼한 지 이제 10년째인데, 처음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시간은 무척 길었습니다. 함께 할 일도 많고, 할 얘기도 많고, 하루가 새롭게 느껴지고, 그전까지의 꾸르륵거리며 쉼 없이 돌아가던 일상에 대한 멈춤과 정지가 가능했지요, 한참 동안 멈추어 서로의 얼굴을 보니, 엄청난 감속이 이루어져 하루하루가 무척 느리고 길게 느껴졌지요. 둘이 마주앉아 그날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 저녁을 다 보내고, 술잔을 기울이고, 시시각각 미묘한 감정의 선을 시간의 지평선 위로 그렸지요. 집 옆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와 창밖의 까치 소리, 자동차가 부르릉 지나가는 소리, 오토바이 소리 등이 귓전에 맴돌고, 술잔에는 술이 남아 있고, 할 이야기들은 여전히 많아서 시간은 아주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그때는 일상의 무게와 속도, 해야 할 일들, 계획들과 일과표 등이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서로에게만 집중했으니까요. 우리 앞에는 함께 할 날들이 무수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지금이 순간을 음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할 일이 밀려 있어도 그냥 내일로 미루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이 걱정되는 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한 번, 두 번…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내일을 대비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일 혹은 미래를 위해 지금 바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고,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일상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저와 아내를 감쌌습니다.

사랑과 정동은 왜 빠름과 느림을 통해 신체의 표면에 아로새겨질까요? 느림의 순간은 여백, 여유, 여가를 개방합니다. 여백과 여가와 마주치면 그때서야 갑자기 할 얘기들이 떠오르고, 안 하던 안부전화도 하게 되고, 마실을 다녀오게 되며, 쉬면서 색다른 상상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삶의 여백과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지요. 질문을 바꿔볼까요? 그렇다면 여백과 여가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어떤 사람은 연애할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으로 사랑이야말로 느림과 여유를 만들어냅니다. 사랑이야말로 맹목적인 움직임을 끝장내고 서로의 조율과 화음, 차이의 감속으로 향하니까요.

스피노자의 신체 표면에 아로새겨지는 빠름과 느림은 신체변용, 사랑, 정동의 속도를 의미합니다. 사랑할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과 정동이 활성화되면 빨라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말이지요. 재미있는 일은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것 같아 늘 아쉽고 시간이 더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투정을 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다르게 말합니다. 사랑은 엄청난 감속, 즉 느림과 여백의 시간을 개방한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색다른 존재와의 마주침은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려는 순간마다 순간정지의 멈춤과 조율이 요구하는 시간에 따라 엄청난 느림을 초래합니다. 즉 자신이 움직이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와 연결되고 그/녀와 함께 신체변용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된 저의 일상은 무척 빠릅니다. 덜컥 두려움마저 듭니다. 이렇게 인생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진 출처 : Jimmy Liao

문제는 세상의 빠름과 느림 자체를 신체변용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체변용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인가를 함께 하면서 서로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고, 볼이 발그스레해지고,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평소에는 콧소리를 부를 시간적 여유도 없다고 투덜대던 사람이 말이지요. 그래서 어느 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동안 콧노래를 부를 여유가 없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니까요. 역시 여유와 여백을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반면 미리 주어진 빠름은 숨이 턱턱 막히는 노동과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학교와 병영, 병원, 시설 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스킵해서 그냥 흘러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신체변용의 과정, 즉 사랑과 정동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저 빨라야 한다는 규칙이나 강박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을 통해 관계를 성숙시킬 여유와 여백을 만들지 않고 일상이 지루하다는 것은, 비루한 일상과 똑딱거리는 일과표로서의 느림을 의미합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취미생활이건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 작은 정서의 변화나 생활의 변화, 몸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출근길에 만나는 그녀를 위해 넥타이 색깔을 더 신경 쓰게 되고, 길냥이 밥을 주기 위해 사료를 챙기며, 아침운동을 위해 30분 일찍 일어나는 생활과 신체의 변화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신체변용이야말로 빠름과 느림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자율적으로 속도를 제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사랑, 다시 말해 신체변용인 셈입니다. 신체변용을 통해 느려지고 빨라지는 것은 사랑이 만들어낸 시간과 속도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흐름에 몸을 싣고 살아가면 더 흥이 나는 모양입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느낀다면

저는 연구실에 걸어서 출근합니다. 큰길을 따라 좌측도로를 이용해서 주택가와 주차장이 있는 익숙한 길로 걸어가죠. 약 40분이 걸립니다만, 느껴지는 시간은 10분 정도입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저 걷는 데 집중합니다. 익숙한 길을 걸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시간은 무척 단축되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익숙한 길은 신체변용의 과정이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빠름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건너편 도로로 한 번 걸어가 봤습니다. 교회가 있고, 노래방이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든 지형지물을 찬찬히 살피고 걷다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한 시간 넘게 느껴졌습니다. 새로운 간판을 보고, 새로운 횡단보도를 마주칠 때마다 저의 신체변용이 새롭게 이루어지고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하셨나요? 스피노자가 말했던 신체 표면에 아로새겨지는 감속과 가속에 또 다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 우리 몸은 무심결에 습관에 빠져들게 되고 생각할 시간도 절약되기 때문에, 색다른 신체변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상태로 시간은 가속됩니다. 물론 제가 발걸음을 일방적으로 빨리해서 그렇게 느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상은 대부분 반복이지만, 늘 동일하고 무료한 반복은 부지불식간에 시간이 흐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거기에 약간의 변화, 즉 다른 쪽 길로 가보는 변화를 통해, 같은 시간이지만 더 새롭고 길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것을 ‘차이 나는 반복’이라고 합니다. 반면 차이 나는 반복을 하게 되면 다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생각의 여지가 풍부해지고,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새롭기 때문에 생각과 신체변용이 활발해지고 시간은 감속하게 됩니다. 어릴 적 느꼈던 삶의 지루함과 느림의 이유가 바로 모든 것이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된 저의 일상은 무척 빠릅니다. 덜컥 두려움마저 듭니다. 이렇게 인생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로부터 감속과 가속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장수의 비밀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마주치고, 실험하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늘 색다른 일상을 만들어내는 사랑의 노력이 장수의 비밀이었던 셈이지요.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떻게 새로움을 만들 수 있을까

달라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떤 사람은 낯설고 이질적인 외국으로 여행 가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행은 설렘을 주지만,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삶을 바꾸지 않고 외부로 도주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살고 있는 삶 자체에서 차이를 만들고, 새로움을 만들고, 다른 일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저는 스피노자의 내재성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에 주목합니다.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은 들뢰즈에게는 잠재성입니다. 잠재성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기억이고,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회사를 그만둔 후 우리 부부는 연구실에서 글 쓰는 일을 함께 하고, 공부도 함께 하고, 살림도 함께 하고, 출퇴근도 함께 합니다. 24시간 내내 아내와 함께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저의 일상에 대해 “어떻게 아내랑 함께 하루 종일 있어? 지겹지도 않아?”라고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겹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와 저는 서로를 뻔하게 단정 내리는 관계가 아닌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이 응시하는 차이와 다양성을 발견하는 관계입니다. 그 깊이와 잠재성이 바로 스피노자의 내재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따금 아내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면, 그걸 소재로 새로운 일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런 면도 있었네!”라는 발견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체변용의 시간은 영원성의 시간’이라는 스파노자의 말도 이해가 됐습니다. 사랑하는 순간순간은 삶에서 엄청난 차이가 만들어지는 무한한 감속의 시간이니까 말이지요.

들뢰즈는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을 재발견하자”고 일갈했던 철학자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일상의 이야기라서 신기할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지금-여기의 잠재성을 발견하자는 건, 현존 자본주의 문명을 긍정하자는 얘기냐?”라는 비난도 나올 법합니다. 물론 삶과 욕망에 대한 긍정이 모두 문명 일반에 대한 긍정일 수는 없겠지요. 들뢰즈의 발견주의에 대해 불교의 ‘마음을 응시하고 집중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지관법(止觀法) 혹은 마음 챙김(Mindfulness) 명상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지관법은 자동적인 의식의 흐름을 멈추고 이로부터 분리된 채로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수행법입니다. 이를 통해 마음을 응시하는 보다 상위의 마음을 갖도록 훈련할 수 있으며, 매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들뢰즈의 발견주의적 방법론은 사실 스피노자의 내재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 변형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무엇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삶이 만들어내는 변용과 사랑의 잠재력에 주목하자는 강력한 생명사상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사람들

우리 안의 생명과 자연은 정동의 능력으로 표현됩니다. 대표적인 정동은 기쁨과 슬픔, 욕망이지만 희망, 공포, 사랑, 연민, 두려움, 증오도 정동의 다른 표현형입니다. 제가 한 번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준 적이 있는데, 한 학생이 반지하 좁은 자취방에서 혼자 잠이 들기까지 의식의 흐름을 적어서 제출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중 일부입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잠을 자지 못 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몽롱한 상태는 거꾸로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집중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약속이 있다는 압박감이 갑자기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찍 자고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게 느껴졌던 심장 소리를 잠재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답답해졌다.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이동현 님의 글)

그의 글에는 기쁨과 슬픔 등 관계에서 오는 정동의 여지가 전혀 없고, 분리되고 외롭고 고독한 사람의 감정과 환상의 흐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문명은 텔레비전과 같은 개인을 상대로 하는 매체, 순전 개인적인 죽음, 순전 개인적인 1인 가구의 삶 등을 통해 정동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만들어왔습니다. 저 역시도 혼자 자취할 때 불면증에 시달렸던 적이 있어 그 학생의 리포트가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강한 상호작용은 세상을 재창조해내는 정동의 원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접촉과 교감은 강한 상호작용입니다.
사진 출처 : pxhere

신체 표면 위로 신체변용과 정동의 느림과 빠름이 기입되는 것과 달리, 정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되거나 단절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감정, 외부 자체의 무정형의 느낌들, 소음들, 잉여들이 바로 자신의 신체 표면에 기입됩니다. 그래서 빠름과 느림의 정동의 흐름이 아닌 정지되고 고정되어 신열에 들뜬 환자와 같은 신체의 표면 위로 환상의 흐름이 기입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정동이 서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마치 말라리아에 걸린 신체처럼 신열과 환상이 지나가는 신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싹트는 정동의 흐름이 지나가는 신체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사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혼자 웃고 울고 하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웃고 울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이미지 영상에는 정동이 아닌 환상 혹은 감정의 교차만이 있을 뿐이니까요. 정동은 관계 속에서는 신체변용이라는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데 반해, 텔레비전 시청자의 감정은 신체변용을 거치지 않고 표면을 매끄럽게 움직이는 환상과 잉여에 불과합니다. 마치 조울증 환자가 조증삽화 단계와 울증삽화 단계에서 신체변용을 거치지 않고 감정과 기분의 상승과 하강을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 친구, 연인들 간의 관계는 현실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며 정동의 자기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방송이나 인터넷, SNS 같은 매체가 만들어낸 감정과는 분명 차이가 있겠지요.세상과 분리된 1인 가구, 고립과 외로움에 휩싸인 독거노인, 고독한 차도남/녀 등이 직면한 문제는 관계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스토리가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는, 즉 삶의 내재성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 사물, 기계 등과의 관계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고양이를 기르는 저로서는 ‘동물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심지어 기계와의 관계도 인공지능이 더 고도화된다면 정동의 영역을 대신하는 상황이 오리라고 예감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 대상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로봇이든 간에 소외, 고독, 무위의 관계에서는 정동 자체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반면, 깊이와 잠재력을 고무하는 강렬한 교감의 관계에서는 정동의 발생이 매우 많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몇 명과 만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든 생명이든 심지어 기계든 얼마나 강한 상호작용을 했느냐가 정동의 생성과 창조에 결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강한 상호작용은 세상을 재창조해내는 정동의 원천입니다. 인터넷 접속을 통한 만남이 약한 상호작용이라면, 공동체 안에서의 접촉과 교감은 강한 상호작용입니다. 약한 상호작용은 위생적인 관계지만, 관계의 절실함이 없지요.

그런데 강한 상호작용을 보이고 관계의 절실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도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직장에 다니던 30대 때 저는 어느새 돈을 버는 데 집중하고, 언제나 일을 중심으로 삶이 돌아가고, 책상 위에는 늘 처리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습니다.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사표를 내고, 예전 같으면 회사에 있을 시간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없이 할 말도 많아지고, 교감도 강렬해지고, 아이컨택도 풍부해지고, 무엇보다도 정동의 흐름과 밀도가 높아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도주했기 때문에 강한 상호작용과 교감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도주선 위에서 그/녀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가타리가 말했던 “도주하는 사람들의 표현양식에 주목해보자!”라는 제안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결국 스피노자의 신체 표면에 기입되는 정동의 빠름과 느림은 신체변용이 이루어지는 관계로부터 시작되고, 관계의 강렬한 갈증과 강한 상호작용을 보이는 사람들은 바로 도주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간략히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단조로운 직장으로부터, 비루한 일상으로부터, 형식적인 인간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왔던 시간은, 정동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신체의 표면 위로 지나가는 정동의 속도를 제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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