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③ 경우의 수에 따르는 사랑의 수학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명의 외부가 사라진 오늘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삶의 방식 속에 갇혀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 자신 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마저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현존 문명의 상황은, 선택할 경우의 수가 더 이상 미리 주어진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외부에서 우발성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 내부에 사랑의 특이점을 세움으로써 경우의 수를 늘려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

제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기까지 그 근원적인 계기가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철학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스피노자, 니체, 사르트르, 함석헌, 김지하, 김용옥 등을 읽다 보면, 철학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철학책을 즐겨 읽기는 했지만, 수많은 학문 중에 하필 철학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수수께끼이기도 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얼마 전 부모님 댁에 갔다가 무릎을 탁 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정리해놓은 책장을 바라보니, 앉아서 눈에 딱 들어오는 높이에 철학책을 빼곡히 꽂아두신 겁니다. 저의 의지였다고 생각했던 철학자의 길이, 사실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제가 철학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종종 철학 분야의 신간을 사서 눈에 띄는 곳에 꽂아두곤 했던 겁니다. 즉 어머니는 남몰래 내가 선택할 경우의 수 하나를 제공한 셈이지요. 사실 어머니는 저에게 이거 읽어라 저거 읽어라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마치 제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판을 깔아놓았을 뿐이지요.

스피노자는 우발적인 마주침이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것을 돌발적인 사건들이 침입해오는 안전하지 못한 세상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그린 우발성의 세계는 여백이 있고, 여유가 있고, 여가가 있는 참 널찍한 공간입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햇살이 찬연히 내리쬐고, 그늘이 있어 좋은 나무 옆에 자리 잡은 평상을 상상해봐도 좋겠지요. 참 평화로운 일상과 여유로운 삶 속에는 우발성과 여백이 녹아들어 있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우발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마치 제 어머니가 제 인생의 우발성을 만들어냈듯이 말이지요. 물론 우발성을 만들어내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과연 만들 수나 있는 건지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제가 몇 시에 일어나 어떤 동선을 그리며 씻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하는지, 그날의 드레스코드는 어떻게 할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날의 컨디션이나 일정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우의 수는 대부분 주변 사람, 아내, 어머니, 친구, 이웃이 사랑으로 만들어놓은 특이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누군가의 계획대로 부두인형처럼 움직이는 자동적인 질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선택 안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선택할 여지를 만든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이를테면 아내는 제 연구실에서 세미나가 시작되기 직전에 방 중앙의 큰 탁자 위에 과자를 놓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과자를 집어 먹는 것은 경우의 수 중 하나지만, 이따금 사람들이 무심결에 과자를 집어 먹으면 아내는 방긋이 미소를 짓습니다. 또 아내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사람에게 “실내화가 필요하면 이쪽에 있는 걸 신으세요”라고 나지막이 말하면서 선택지 하나를 제공합니다. 그러면 실내화를 신는 사람도 있고, 안 신는 사람도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하나가 생긴 셈입니다.

우발적 만남이 사랑이 되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해’라고 당위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라는 선택의 경우의 수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경우의 수가 좀 더 다양하게 주어진다면, 꽉 짜여 있고 숨 막히는 일상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지, 우발성이 더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말인즉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삶은 문제 제기를 통해 여러 가지 답을 선택하는 과정이지, 모든 문제 제기가 하나의 답으로 수렴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문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만능열쇠와 같은 하나의 정답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답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살아온 삶 속에 있을 겁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겠지요. 나는 계속 살아나가는 존재이고 그 답들도 계속 구성 중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삶의 내재성은 어찌 보면 호기심, 물음표, 문제의식, 질문 등으로 가득한 삶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이 어렵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은 ‘삶에 내재해 있는 타자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외부적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내부가 외부야?”라고 반문하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파고들수록 참 어려운 개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볼까요? 우리의 삶과 신체에는 동물도, 식물도, 소수자도, 부랑아도, 이방인도 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드러나지 않고 오직 변용, 접촉, 촉발에 의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구도에 따르면, 신은 자연, 신체, 생명, 삶에 내재해 있지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은 초월적 신으로부터 답을 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삶에 내재해 있는 여러 가지 질문에 따라 변용하고 사랑하고 욕망하면서 답을 찾는 과정 자체가 신적인 것의 표현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그건 이런 거야!”라고 답을 제시해주는 전문가에게 환호합니다. 반면 사랑을 통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하나를 만들면서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청유하고 권유하는 사람에게 주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사랑할 때 먼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권유, 청유, 배려, 관용 등의 부드러운 선택지를 상대방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선택할 경우의 수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라는 점입니다. 그냥 우발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사랑이 만들어낸 특이점(singularity)을 주목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특이점은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지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유일무이하고 단독적인’ 지점으로서의 특이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이점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이점 하나가 생기면 바로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크든 작든 변화를 주게 됩니다. 일단 특이점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태도라도 결정해야 하니까요.

사랑은 특이점을 늘려가면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만들어냅니다. 사진출처 : Evgeniya Litovchenko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저희 집은 아파트 1층입니다. 베란다 문을 열면 바로 화단이 보이는 구조이지요. 언제부턴가 길냥이 가족이 화단 안쪽의 나무 밑에서 쉬다 가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희 부부는 그 근처에 사료와 물을 놓아주곤 했습니다. 엄마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 둘이었는데, 부르기 편하도록 ‘누룽지네 가족’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녀석들인지 사람을 봐도 피하지 않고 발라당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꽤나 살가웠지요. 화단에 사료를 놓아주면 허겁지겁 먹고 한참을 놀다가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 할머니가 베란다 문을 열고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습니다. “도둑고양이한테 밥을 주면 더 자꾸 와서 울어댈 텐데 시끄러워서 어찌 사누!” 머쓱해진 저는 그쪽에서 잘 볼 수 없게 사료 그릇을 더 안쪽으로 들여서 우리집 베란다 바로 밑으로 옮겨놓았습니다. 하지만 눈치 없는 고양이들의 놀이공간은 늘 화단 한복판이었으니, 이웃집 할머니는 그 뒤로도 종종 베란다에 서서 고양이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이웃집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발밑에는 누룽지네 엄마고양이가 뒹굴뒹굴 배를 드러내며 갸르릉거리고 있었지요.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전과 같은 적대감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 그 녀석이구나! 애기들은 어디다 놨냐?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밥 먹으러 와!”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만, 진짜 속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얼마 전까지 ‘도둑고양이’ 운운하던 분이지만, 이제 어디서 다른 길냥이들을 만나도 ‘시끄러운 존재’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고양이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매일 반복적으로 대면하다 보니 혼자 사는 노인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움직였을지 말입니다. 여기서 반복은 외부의 우발성을 삶의 특이점으로 만드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랑은 특이점을 늘려가면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만들어냅니다. 특이점들이 많아지면, 결국 스피노자가 말했던 우발성과 같은 형태도 가능하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스피노자의 우발성은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외부로부터 불현듯 찾아온 일시적인 사건, 휘발적인 순간, 돌발적인 상황과 같이 느껴지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100퍼센트 돌발적이고 휘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세상에 있을까요? 물론 갑자기 들이닥친 자연재해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사고가 있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발성의 영역을 마주칠 경우, 사람들은 자연의 막대한 위기 상황 앞에서 친밀하고 유대적인 관계망인 공동체와 공공성, 사회 등을 작동시켜 돌봄과 사랑, 호혜와 증여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발성을 사랑의 특이점으로 바꿀 지혜와 용기, 실천이 지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기쁨의 정동으로 향하겠지요, 또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속과 무능력의 슬픔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발적 사건이 삶을 변화시키는 특이한 사건이 되어 특이점이 되는 구도를 그립니다.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그러한 지혜와 용기, 실천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내재한 사랑과 변용, 정동에서 찾습니다. 결국 우발성을 사랑의 특이점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지요.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사랑이 만들어내는 특이점, 더 나아가 그것이 만든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일갈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스피노자는 우발적으로 찾아온 만남을, 사랑이 머물고, 생성하고, 감싸는 모든 반복의 특이점으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수자 되기, 소수자를 발명하기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선택의 순간이 오면 불안과 자유를 동시에 느끼지요. 이 선택이 과연 올바른가? 과연 나는 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가? 걱정과 기대가 함께 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충분히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혹시 선택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은 아닐까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현존 문명이 탐험하고 개발하고 모험할 외부와 여백이 대부분 사라진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문명의 외부가 사라진 현상은 많은 영역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문화상품과 똑같은 생활양식, 똑같은 시설물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에 사는 주부가 시장을 본다고 했을 때, 선택지는 이마트냐 아니면 홈플러스냐 정도라는 얘기지요. 만에 하나라도 불의의 사고로 인해 마트 하나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각 가정의 식탁이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명은 탄력성과 유연성, 자율성, 야성성 등을 잃어가고 있고 조그만 위기에도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연약한 지반 위의 구조물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 현존 문명의 상황은 선택할 경우의 수가 이제 더 이상 주어진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부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발성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부가 없고 똑같아진 현존 문명은 다양한 위기의 상황에서 인류가 선택할 경우의 수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과 욕망이 특이점을 만듭니다. 사진출처 : Gaelle Marcel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어떻게 늘려야 할까요? 그것의 힌트와 단서는 스피노자의 우발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 역시 우발성이 외부로부터 마주치거나 주어져 정서에 영향을 준다는 구도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을 면밀히 살펴보다 보면 우발성에 대한 심원한 변형이 가능하다는 점이 금방 드러납니다. 즉 외부에서 우발성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 내부에 사랑의 특이점을 세움으로써 경우의 수를 늘려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프랑스 철학자인 쥘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심리치료사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1930~1992)는 스피노자주의를 계승하여 ‘소수자 되기’라는 개념을 공동으로 창안합니다. 소수자 되기는 여성 되기, 노숙인 되기, 장애인 되기, 아이 되기, 동물 되기, 투명인간 되기 등으로 드러납니다. ‘소수자 되기’라는 혁명적인 개념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되기(becoming)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되기라는 사랑의 부드러운 흐름이 아로새겨진 곳에 반복의 특이점이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노숙인 되기가 이루어지는 곳에 노숙인시설과 밥차와 노숙인 잡지, 편의시설, 노숙인인권센터 같은 특이점이 생기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특이점이 만들어지면, 노숙인들은 선택할 경우의 수를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 되기는 바로 사랑의 특이점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해석됩니다. 결국 스피노자가 언급했던 특이점 개념은 사랑과 변용, 욕망이 만들어야 할 반복의 지점이며, 사랑을 통해 만들어내는 유일무이한 순간으로서의 특이점입니다. 물리학에서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순간으로서의 특이점이라는 개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싶군요. 사랑과 욕망이라는 무형의 에너지를 가지고 유형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변화가 시작되는 ‘딱 그 지점’ 말이지요. 예를 들어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는 평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국밥집 주인(김영애 분)의 간절한 부탁에 못 이겨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된 아들 진우(임시완 분)의 구치소 면회만이라도 도와주기로 하죠. 그런데 생각지 않게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덜컥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바로 그 장면이 특이점입니다. 국밥집 주인의 인정 어린 배려와, 아들을 구하고자 하는 절절한 모정, 그리고 속물인 줄 알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던 송진우의 인간미, 불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 등등 그 모든 사랑과 욕망들이 모이고, 고문으로 인해 처참하게 망가진 한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신을 투영한 순간, 인권변호사 ‘송변’이 탄생한 것입니다.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라고 외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순간이 말이지요.

이처럼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과 욕망이 특이점을 만듭니다. 다들 높은 곳만 바라보며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는 단순해지지요.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 앞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선 가운데 잠시라도 다른 삶에 눈을 돌렸다가는 곧장 루저의 길로 빠지기 때문이지요. 집중과 노력으로 점철된 사회, 그런 사회는 획일화되기 쉽습니다. 반면 성공 말고도 다양한 가치들이 인정받는 사회라면 수많은 사랑과 욕망의 특이점들이 꽃필 수 있을 겁니다. 성공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가치들일수록 말이지요.

21세기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리는 펠릭스 가타리는 “현존 문명은 소수자를 발명해야 할 상황에 와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소수자가 없다면 소수자를 만들라는 말로도 들립니다. 그는 소수자에 대한 사랑의 흐름이 특이점을 늘려나가는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에 문명의 회복 탄력성, 신축성, 자율성, 야성성 등을 늘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만약 공동체와 사회에 소수자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소수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있는 사랑의 흐름을 느낌으로써 보다 풍부해지고 다양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존 문명은 훨씬 더 많은 선택지와 사랑의 경우의 수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수자를 발명하자는 말은 이제 소수자조차도 통속화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귀착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색다른 소수자 되기라는 사랑의 특이점을 위해 다양한 소수성을 발명해야 한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왼손잡이, 장발 남자, 문신한 사람, 다소 산만한 사람조차도 소수성의 일부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색다른 소수자 되기는 색다른 사랑의 특이점을 만들 것이고, 이에 따라 사회와 공동체는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게 됩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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