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④ 우리 안에 내재한 놀라운 능력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철학은 바로 특이한 공동체의 철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더불어 호혜와 돌봄, 증여의 공동체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스피노자는 주저 없이 자신의 능력과 삶의 자기원인의 영역을 벗어난 초월적인 종교와 국가권력에 대해선 괄호를 쳐버립니다. 대신 공동체와 삶, 욕망, 일상, 생활세계, 사랑 등의 내재성에 대한 긍정으로 향합니다.

선물에 담긴 정동의 비밀

그날은 초등학교 3학년 크리스마스이브였지요. 눈이 왔는지 안 왔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나는 것은 잔잔하게 들리는 캐럴, 크리스마스트리, 성탄 특선영화였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기억은 그날 제가 한 시간 동안 기도하던 모습입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야구글러브를 선물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안 하던 짓을 하는 제 모습을 식구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군요. 큰 양말을 찾다가 결국 엄마의 기다란 팬티스타킹을 베개 옆에 걸어두었지요.

선물은 기대감과 설렘을 줍니다. 사진: Markus Spiske

그날 저는 행복한 꿈을 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놀랍게도 야구글러브가 팬티스타킹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무척 놀라고, 감동했지요. 그런데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때 이미 산타는 없고 어머니가 선물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선물을 받고자 했던 것이었죠.

이렇듯 선물은 기대감과 설렘을 줍니다. 1980년대 초 명절 때 친척들에게 종합선물세트를 받고 감동하지 않은 아이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샤브레, 연양갱, 밀크카라멜, 야채크래커, 버터링쿠키, 바니드롭스 등 종합선물세트의 단골메뉴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살아가면서 그런 감동을 매일 느끼며 산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물론 저는 아직도 저녁 식탁에 어떤 메뉴가 나올까 가슴 설레며 주방을 슬쩍 들여다보곤 합니다. 식탁은 아내가 선사하는 선물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 옆에서 활력과 재미를 줄 수 있는 얘기를 늘어놓곤 합니다. 그리고 식사 후 설거지와 정리정돈을 담당하면서 뭔가 보답을 하려고 노력하지요. 이런 작은 행동도 일종의 선물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선물은 사물에 대한 생각을 혁신시킵니다. 선물이 우리 사고의 혁신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사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사실 사물에 대한 혁신적인 생각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神卽自然, Deus sive Natura, 신은 곧 자연이다)’이라는 범신론을 통해 사물에 신적 속성이 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물은 신, 다시 말해 사랑이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물에 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다니… 그저 딱딱하고 텅 비고 죽어 있는 사물에 신적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생각은 이해하기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데 선물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스피노자의 사물관이 대부분 해명됩니다.

선물에는 사랑, 정성, 인격 등이 내재해 있습니다. 사랑이 담긴 선물, 정성이 느껴지는 선물, 격조 있는 선물 같은 표현이 그냥 나온 게 아니겠지요. 그래서 선물을 받으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도 함께 받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동을 자극하고 촉발합니다. 선물은 상품처럼 사랑, 정성, 인격과 분리된 사물이 아닙니다. 상품의 경우는 물건 그 자체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물은 포장을 풀기 전에 마치 주사위를 던질 때와 같은 설렘과 기대를 동반합니다. 이쯤 되면 사물을 신적 속성인 사랑이 깃든 하나의 양상이나 양태로 보았던 스피노자의 어려운 철학도 ‘오호! 그럴 수도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선물에는 정동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정동은 희로애락과 관련이 있지만, 일시적인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정동은 나누고 공유할수록 더 커지고 풍부해집니다. 그래서 정동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흔히 사랑을 받는 사람의 기분이 그러하듯이 선물을 받는 순간의 기쁨은 정신과 육체의 능력을 상승시킵니다. 그래서 그저 죽어 있고 딱딱한 사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었던 사람의 정동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 선물을 받는 순간 기쁨이라는 정동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물론 선물은 뇌물이나 상품과는 다른 궤적을 그립니다. 진짜 선물은 그것의 크기나 가격과는 무관합니다. 마치 유치원생 조카가 고사리손으로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물 받았을 때의 느낌처럼 말이지요. 그저 상대방의 얼굴이나 마음, 정성이 느껴져서 기쁨의 정동이 지속되고 빙그레 웃음을 짓게 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그것의 가격과 무관한 것이 됩니다.

혹시 스피노자는 증여와 호혜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스피노자는 그 당시 전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조금 별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예속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렌즈 세공 장인이 되어 독립했던 것입니다. 당시 렌즈 세공일은 유럽에서 첨단 기술산업이었고,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약간의 해프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유산을 상속받아야 할 장남 스피노자가 가타부타 반응이 없자, 동생이 유산을 가로채 소유권을 자기 앞으로 옮겨다 놓습니다. 그러자 스피노자는 유산반환소송을 벌여 동생으로부터 유산을 되찾아옵니다. 여기까지는 재벌가의 흔한 재산싸움 정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돌연 스피노자는 동생에게 다시 전 재산을 돌려줍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원했던 것은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홀연히 떠납니다. 그 뒤 그는 헤이그 외곽에서 소수의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렌즈 세공 장인으로 검소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스피노자의 태도는 후대 그의 계승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킵니다. 즉 유산도 예속이라고 여겼던 스피노자의 근대성은, 소유권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이 아닌 장인들의 도제조합으로 이루어진 근대성, 즉 지금은 협동조합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기술, 공동체, 사회가 어우러진 상에 대한 응시를 품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살아가는 이유는 내 안에 있다

범신론에서 자연과 생명, 인간, 사물은 사랑과 변용, 자기보존의 욕구라는 신적 원리로부터 벗어나 행동하지 않고 삶과 욕망의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진:
J Yeo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근대 이전의 사물영혼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가 사물을 사랑과 정동, 욕망(=자기보존 욕구)과 분리하여 사유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가장 비합리적인 사유가 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그러나 사물조차도 신적 속성과 신적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철저히 ‘신, 즉 자연’의 범신론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신이 사물에 내재해 있다는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이 애니미즘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둘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애니미즘의 대상인 정령, 요정, 도깨비, 귀신 등은 질투하고 연민하고 마법을 부리는 등 자연의 원리로부터 벗어난 행동을 보이지만, 범신론에서 자연과 생명, 인간, 사물은 사랑과 변용, 자기보존의 욕구라는 신적 원리로부터 벗어나 행동하지 않고 삶과 욕망의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사물의 원리는 정령처럼 질투와 사랑의 향연을 벌이지도 않고, 도깨비처럼 심술을 부리지도, 요정처럼 우아하고 귀엽지도 않은 것이지요.

혹자는 스피노자의 범신론 사상이 바로 사물에 대한 혁신적인 사유를 품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생명, 물질, 유전자, 미생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몸의 신진대사 과정처럼 순환한다는 생태계 혹은 에코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얀 네스(Arne Naess, 1912~2009)의 전체론(Holism)에 스피노자를 연루시켜 서술하는 저자도 있습니다. 전체론은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망을 전일적으로 살피는 마음에 주목하는 사상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두 가지 사상, 즉 에코시스템과 전체론이 자연생태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에코시스템이 자연과 인간, 유전자, 물질 등의 신진대사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는 합리론적인 관점인 데 반해, 전체론은 전체와 연결된 마음, 전체가 부분에 내재한다는 지극히 영성적인 생각으로 향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피노자의 입장이 신비롭고 영성적인 측면으로 해석된다면 전체론과 조우하여 이신론, 다시 말해 사물영혼론과 공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입장이 철저히 물질, 유전자, 바이러스 등 유기체와 무기체의 신진대사의 측면에서 해석된다면 에코시스템론과 공명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무래도 범신론은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다시 “스피노자가 증여와 호혜의 공동체를 사고했을까?”의 문제로 돌아가 보죠. 스피노자의 내재성(immanence) 개념은, 살아가는 이유를 자기 자신 안에 갖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사랑과 욕망의 능력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신체가 품고 있는 생명과 자연의 본성인 셈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라는 욕망의 이유이며 자연과 생명, 우주의 법칙 속에 합일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과 분리되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월성(transcendence)의 영역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이 내재성의 의미입니다. 반면 초월성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권력이나 신으로 봄으로써 자신의 욕망과 사랑이 갖는 생명력, 활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재성과 초월성은 지극히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재성은 생활세계라는 한정된 삶의 영토를 기반으로 합니다. 물론 생활세계가 파괴된 수용소에서도 삶의 내재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만, 욕망, 사랑, 정동의 과정은 삶의 화음과 색채, 향기가 깃들어 있는 영토인 생활세계와 공동체, 지역사회 등의 배치와 관계망을 필요로 합니다. 스피노자의 삶은 렌즈 세공을 하는 작은 도제조합의 영토를 비롯해 그 주변의 친구들과의 만남과 우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적인 관계망과 배치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가 전제되지 않은 내재성의 철학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근에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서, 다시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공동체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동체로부터 이제까지 한 번도 분리된 적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늘 공동체와 함께 해왔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의 내재성은 보이지 않는 공동체인 공공영역, 사회영역, 생태영역으로부터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살림과 돌봄의 과정은 공동체적인 삶의 과정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철학은 바로 특이한 공동체의 철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더불어 호혜와 돌봄, 증여의 공동체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스피노자는 주저 없이 자신의 능력과 삶의 자기원인의 영역을 벗어난 초월적인 종교와 국가권력에 대해선 괄호를 쳐버립니다. 대신 공동체와 삶, 욕망, 일상, 생활세계, 사랑 등의 내재성에 대한 긍정으로 향합니다. 이쯤 해서 “스피노자는 증여와 호혜의 공동체를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수많은 스피노자들의 공동체

사실 증여와 호혜의 공동체가 작동하는 내부 원리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상품을 사고파는 것과 다릅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서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제일 처음 받았던 선물은 커피 껌 하나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저와 책상을 함께 쓰던 짝꿍은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였는데, 제가 비밀스럽게 호감을 느끼던 여자아이였습니다. 우연히 손이라도 닿으면 금방 움츠러들었죠. 그런 짝꿍이 체육시간에 커피 껌 하나를 내밀었는데, 그 맛과 기쁨은 지금도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수줍게 웃으며 내밀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선생님이 껌 뱉으라고 야단칠 때까지 저는 수업 내내 단물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씹었지요. 그래서 언젠가 돈이 생기자 학교 앞 가게에서 그 껌을 사서 씹어봤는데, 그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겁니다. 사실 그때는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가졌을 뿐이지, 그 이유를 해명할 수 없었지요. 그 이유는 아마도 선물에는 사랑과 정성, 인격이 들어가 있지만, 상품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사물의 주변에 이야기와 느낌과 정동이 서식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나누는 음식이며 물건들에서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신적 본질인 사랑과 욕망이 물건에 들어가 있다고 보았던 스피노자의 생각이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근대적 합리론이 추앙해 마지않는 이성, 진리, 과학에 대해서도 스피노자는 사랑, 욕망, 정동 등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이성이 욕망에 달려 있다니 참 이상한 논리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책 『에티카』도 자로 재고 칼로 자른 듯한 논리적 형식을 가지고 기술하지만, 그 내용은 가장 비논리적인 영역에 있는 정서, 사랑, 욕망의 자기원인을 그려내는 과정입니다. 즉 아무리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술 방식이라 해도 결국엔 ‘삶의 내재성’이라는 살아가야 하는 이유, 즉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지요. 다시 보면 이성을 통해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 욕망, 자연, 생명 등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스피노자는 합리적인 이성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된 신체, 욕망, 정동이 평행을 달린다는 생각을 그려냅니다. 그래서 욕망과 신체의 능력이 상승한다면 이성의 능력도 상승한다는 생각을 주장합니다. 그의 사물에 대한 생각 역시 경계와 구분이 명확한 사물을 말하면서 신적 본질을 주장하는 것까지는 매우 합리주의자처럼 느껴지지만, 그 신적 본질이 경계가 모호한 사랑, 정동, 욕망이라고 말하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것이 논증의 핵심을 이룬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합리론자가 본다면 “맙소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지요. 마치 동생에 대한 유산반환소송 때는 지극히 소유권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재판에 승소하자 동생에게 사랑과 우애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하면서 돌연 유산 전부를 선물해버렸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반응처럼 말이지요.

긍정과 생성의 철학은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이 자연, 사물, 인간, 생명의 본성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사진:
Jametlene Reskp

그러고 보면 스피노자의 사상은 증여와 돌봄의 공동체를 기본 전제로 삼아 전개한 사상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사물을 그저 딱딱하고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삶, 욕망, 사랑의 지평이 아로새겨진 것으로 사유하니까요. 동시에 삶의 내재성, 생활세계, 일상에서는 증여와 호혜라는 사랑이 무늬와 결을 이룹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삶을 무한한 긍정의 영역으로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죄의식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아가도록 하는 초월성의 원리가 아닌 삶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욕망과 사랑, 정동의 원리에 따라 늘 소풍 나온 사람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긍정과 생성의 철학은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이 자연, 사물, 인간, 생명의 본성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이는 “그래서 스피노자는 너무 착해빠졌어! 그게 싫단 말이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한 삶에 대한 긍정, 살아가려는 의지에 대한 긍정, 자기보존 욕구로서의 욕망에 대한 긍정은, 공동체가 살아 있던 당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사회가 분리되고 분열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삶이 긍정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착해빠진 스피노자주의자가 무수히 등장하는 공동체를 상상해보게 됩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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