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성탄절 이야기 –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 한 사람을 위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성탄의 이야기, 즉 동물의 밥통인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왕으로 알아본 이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난과 무력함에 둘러싸인 아기에게서 가난 뒤에 감추어진 사랑의 부유함과 무력함 속에 감추어진 사랑의 강력함을 읽어낸 이들의 영성적 시각을 접할 수 있다.

성탄 이야기 하나.

마태복음이 전하는 성탄 이야기에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별을 연구하던 자들로서 왕이 태어날 징조를 보이는 별을 따라 산 넘고 물을 건너 유대까지 왔다. 유대의 왕이라면 당연히 유대의 왕궁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믿고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의 궁전으로 찾아가 새로 태어난 유대의 왕을 친견하고자 청했다. 그러나 왕궁엔 태어난 아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 태어난 왕은 어디에 있는가? 헤롯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경전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을 불러 묻자, 그들은 유대의 베들레헴을 지목했다. 동방박사들을 궁전을 나와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세주로 오시는 아기를 보고 기뻐하며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준비한 예물을 드린 후 고국을 돌아갔다.

성탄 이야기 둘.

동방박사들을 보내며 ‘구세주 아기를 발견하거든 자신에게도 알려 자신도 경배하도록 하라’고 명령한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나타나지 않자, 자기의 왕좌를 위협할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그리스도와 비슷한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학살의 와중에 살아남은 한 명의 아기가 있었고 그 아기는 결국 그리스도로 자라났다.

성탄 이야기 셋,

가난하고 연약한 어린아이의 몸으로 태어난 구원자 아기 예수. 사진출처: mccartyv
가난하고 연약한 어린아이의 몸으로 태어난 구원자 아기 예수.
사진출처: mccartyv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구세주가 나던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를 위한 구세주가 나셨다. 너희를 위한 구세주를 알아볼 징표는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동물의 밥통인 구유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 아기가 바로 너희를 위한 구세주다.”라고 전해 주고 사라졌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러 베들레헴으로 가니 가난한 목수의 부부가 해산할 방을 잡지 못해 동물의 우리로 들어가 아기를 낳고 그 아이기를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뉘어 놓은 것을 보고 구세주를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가난과 무력함 뒤에 감추어진 사랑의 부유함과 강력함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의 징표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다. 구유는 가난과 비천함을, 아기는 연약함과 무력함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가난과 비천에 둘러싸인 아기를 구세주로 소개하는 두 복음서의 이야기는 가난과 비천 그리고 연약함과 무력함은 절망과 저주의 계기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참된 희망과 구원의 실마리라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가난과 연약함에 둘러싸인 구세주의 탄생을 전하는 성탄절 이야기는 구원과 희망에 관한 독특한 기독교 영성을 전해 준다. 인간(역사)의 구원과 희망이 부와 권력에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과 연약함을 받아들일 수 있음이야말로 진정한 부유함이며 능력으로서 구원과 희망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며 영성이다.

숨 쉬고 있는 한, 희망은 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학살의 희생자가 되어 버린 베들레헴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리스도의 탄생, 곧 구원과 희망의 도래는 박수갈채 속에서가 아니라 탄식과 통곡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마태복음 2장 18절).” 그리고 다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처참한 유아 학살의 현장에서 아기 예수가 살아남은 것은, 그 아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한 명의 아기가 그리스도로 성장한 것일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전달되는 메시지는 같을 것이다. 즉, 희망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살아있는 한, 희망 역시 살아있다는 것이며 살아있는 한 사람이 곧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숨 쉬고 있는 한, 희망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숨 쉬고 있는,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 한 사람이 곧 희망의, 구원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 아이들의 잔혹사를 담고 있는 성탄의 이야기 역시 구원과 희망에 관한 기독교의 독특한 영성을 전해 준다. 인간(역사)의 참된 구원과 희망은 박수갈채 속에서가 아니라 맹렬한 저항 속에서, 그로 인한 탄식과 통곡 속에서 도래한다는 것이다. 희망하는 한 사람이 남아 있는 한, 그 어떠한 맹렬한 저항도 구원과 희망의 도래를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희망하기를 지속해야 한다는 관점을 전해 준다.

성탄절 영성과 탈성장 영성

구세주가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성탄절 이야기에서 부유함과 강함이 아닌 가난과 연약함을 참된 구원과 희망의 실마리로 보는 기독교 영성을 엿볼 수 있다. 가난과 연약함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즉, 그리스도의 가난을 가난조차 개의치 않는 사랑의 부유함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며 그리스도의 연약함을 자신의 강함을 포기하는 강력한 사랑의 의지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스스로 가난해질 수 있고 연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학살을 면치 못했던 베들레헴 아이들의 이야기에서는 어떠한 저항에도 꺾이지 않는 참된 희망이 가진 고유한 능력에 관한, 살아있는 한 사람을 희망으로 보는, 그리하여 살아있는 한, 숨 쉬고 있는 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기독교적 영성을 접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성탄절 영성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의 임박한 도래 앞에서 탈성장을 요구받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는 것일까? 기후위기와 기후재앙의 임박한 현실은 우리에게 탈성장을 넘어 기존의 성장조차 뒤로 물려야만 우리의 미래가 보존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현재의 부유함과 강함을 버리고 가난과 약함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탈성장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두려움은 아마도 가난과 약함을, 탈성장의 과제를 서로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부유함과 강함은 여전히 유지하려는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두려움은 경고를 전달한다는 목적에는 부합할 수 있지만, 삶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목적에는 그다지 적합한 수단이 아니다.

필자는 탈성장이라는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사랑이라고 본다.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 비할 데 없이 부유하고 강력했기에 신은 끝없이 가난해지고 한없이 약해질 수 있었다고 성탄절 영성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사랑으로 깨어날 때, 비로소 기꺼이 가난과 약함을, 탈성장의 과제를 자기의 짐으로 짊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누가, 먼저 사랑으로 깨어나 기꺼이 가난과 약함을 짊어지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미 눈앞에 닥친 지구적 기후위기가 사랑으로 깨어난 몇 명의 영성가의 존재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는 결국 현재의 기후위기가 심화하여 지구 인류 대부분이 기후재앙의 희생자가 될 것으로 본다. 최선을 다해 기후재앙을 회피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우리는 기후재앙의 현실을 살아가게 될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성탄절 영성을 묵상하는 것은, 곧 가난과 약함이야말로 인간을 구하기 위한 신의 사랑이 비할 데 없이 부유하고 강력하다는 방증으로 보는 관점을 묵상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인 동시에 기후재앙의 시대를 살아갈 미래의 우리를 위한 것이다.

기후위기에 관심 없는 사람들, 냉소적인 사람들, 회의적인 사람들 속에서 기후위기는 기후재앙으로 비화해 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깨어나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한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놓치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은 기후위기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의 희망이 될 것을 믿는다.

김희룡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성문밖교회의 목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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