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성탄절 이야기 –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 한 사람을 위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성탄의 이야기, 즉 동물의 밥통인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왕으로 알아본 이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난과 무력함에 둘러싸인 아기에게서 가난 뒤에 감추어진 사랑의 부유함과 무력함 속에 감추어진 사랑의 강력함을 읽어낸 이들의 영성적 시각을 접할 수 있다.

탈성장의 예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죄책감에서의 해방을 제공하는 것은 “싸구려 은총”,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하는 것은 “값진 은총”이며 우리가 추구할 것은 “값진 은총”이라고 보았다. 임박한 기후 위기와 재앙 앞에서 ‘싸구려 은총’은 “그린 워시”에 해당한다. 성장의 욕망에 면책을 줌으로써 성장 담론과의 단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사복사화의 설교”를 행한 예수는 탈성장 옹호자다. 성장 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복 있는 자들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과 기후위기

성육신 신앙은 무한성과 전능성의 포기야말로 신의 길이며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은 상승이 아닌 하강의 영성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은 성장의 무한성과 기술혁신의 전능성에 현혹되어 기후위기를 자초하면서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경제적 풍요와 편리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단초가 될 수 있다.

폭염에 의한 집단타살, 1995년 시카고 사례 – 『폭염 사회』를 읽고

기후 온난화는 수많은 기상 이변을 일으킨다. 여러 가지 기상 이변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형태는 폭염이다. 폭염은 소리도 형체도 없이 다가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 폭염 사망자의 지형도는 인종차별 및 경제적 불평등의 지형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폭염은 자연재해인 동시에 사회적 재난이다. 사회적 재난의 해결은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사회적 관계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연적, 사회적 재난의 컨트롤 타워인 정부 행정당국은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커먼즈를 지키기 위한 기독교적 반란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읽고

자기의 소유로 된 토지라 하더라도 빈틈없는 자기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 자신의 토지 안에서 남과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통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상생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말하는 인간과 삶의 거룩함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러한 신앙에 기반하여 공유지를 빈틈없이 사유화하려는 종획운동에 맞선 반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를 읽고

인간의 모든 가치가 경제적인 가치에 종속될 때,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경제는 인간의 주인이 되고 인간은 경제의 노예가 된다. 인간과 경제의 전복된 관계가 복원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수록 불행해지고 성공할수록 더 깊은 파멸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동 자본주의와 자유노동의 보상』을 읽고

지식검색을 위해 구글을, 상품검색을 위해 아마존을, 동영상 검색과 업로드를 위해 유튜브를, 사회적 소통을 위해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방대한 데이터와 콘텐츠가 생산되지만, 그것은 플랫폼을 제공한 회사의 소유가 되어 천문학적인 돈벌이의 재료가 된다. 플랫폼의 이용자들은 돈벌이의 원천인 데이터와 콘텐츠를 생산했으나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즐겼으나 착취당했다.” 인간의 정동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에 대한 적절하고 새로운 정의와 자유/무료노동에 대한 보상문제를 이 책은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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