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는 기상 이변을 동반하여 식량뿐만 아니라 에너지 수급의 혼란 등으로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이에 기후난민을 비롯해 생존권의 위협으로 인한 폭동과 시민불복종 등이 촉발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져, 모든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기후변화를 임박한 중차대한 위험 요소로 보고 있다. 오늘날의 기후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바로 인간의 경제활동이기에, 현대를 ‘인류세’라고도 부른다. 한편, 일각에서는 지구상의 전 인류가 아닌 선진국의 일부 인류가 기후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인류세’ 대신에 ‘자본세’라고 부르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 책의 부제는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문명의 종말을 현재의 우리로서는 막을 수가 없는데, 이 문제가 가장 복잡한 ‘집단행동 문제’인 까닭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부 똑똑하고 대의에 헌신적이고 사려 깊은 환경 운동가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동안, 우리 모두는 자가용을 몰고, 비행기를 타고, 난방기와 에어컨을 틀고, 각종 기기를 충전하는 등 안락한 소비에 기초한 지속 불가능한 삶을 즐기기에 바쁘니, 인류에게 대재앙이 될 기후변화는 제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다.
인류 문명을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 이 시기는, 바로 우리가 개인 차원이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철학 시대에 들어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의 저자 스크랜턴은 미 육군 이등병으로 이라크에 배치되었을 때, 그곳에서 죽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가 전쟁터에서 깨달은 ‘죽는 법’은 다름 아니라 “자아, 미래, 확실성, 애착, 쾌락, 영속성, 안정 등을 버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기후변화 위기 속에서 우리가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우리의 성향과 두려움을 버린다는 것이지만, 문명의 차원에서는 특정한 생활 방식과 정체성, 성공, 진보에 대한 특정한 생각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온 인류 문명의 위기를 선고받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고전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작품이야말로 저항할 수 없는 투쟁의 욕망, 폭력과 피의 복수, 두려움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들은 의식적 성찰과 사회적 제재의 두려움 등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사회를 통제할 것인가’를 통찰한 끝에 오늘날의 정의, 인권, 민주주의 등과 같은 개념들을 창출해 냈다. 두려움과 증오 등은 인류에게 위험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표면화시키면 오히려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고, 또한 협력하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비록 가까운 미래에 화석 연료 문명이 사라진다고 해도 소수는 살아남을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멸종 위기에 놓인 유전적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생물학적 방주뿐만이 아니라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도 함께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중한 인문학적 자산을 활용하여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리의 대응 역시 동일하다고 저자는 전망하고 있다. 즉, 기후변화로 인한 두려움을 표면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의 자본주의처럼 기후변화로 인한 항시적이고 일반화된 불안만을 전파한다면, 사람들은 눈앞에 놓인 두려움을 상쇄시키기 위해 소비재 상품들이 주는 안도감에서 위안을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공부하는 것은 결국 잘 살기 위해서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철학적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을 크게 훼손시켜 가면서까지 현대의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장치인 욕망과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성화하는 생태적인 삶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