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 조각모음] 오늘도 무사히, 별일 없이 산다

‘무사하다’는 말과 ‘일없다’는 말은, 뜻이 같아야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 사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이 말들을 보다 세심히 살펴보고, 이 말들이 지금 여기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고민들과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 살펴본다.

오늘도 무사히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1960~70년대에,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면, 기사님 눈에 뜨일만한 위치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작은 그림이 붙어있는 것을 거의 어김없이 볼 수 있었다. 그때 그 그림에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내려쓰기 2행으로 쓰여 있었다. 경북대 의대 교수 이재태 씨는 이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린 소녀가 기도하는 이 그림의 원본은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의 종교화인 《어린 사무엘》[1776년 작]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소녀가 아닌 사무엘이란 남아인 것이다. 그림은 제사장에게 맡겨진 어린 그가 혼자 자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경황 없이 기도하는 모습이다. 《구약 성서》〈사무엘서〉로 유명한 사무엘은 이스라엘 왕국의 지도자이자 선지자로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사울을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으로 옹립하였고, 후일 양치기 소년 다윗을 왕위에 올림으로써 이스라엘 왕권을 확립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산악 지대에 살던 그의 어머니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자, 잉태하게 해 주신다면 그를 주님께 바치겠다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애절한 기도의 결과로 주어진 아들이 사무엘이다. 한나는 어린 아들을 성전에 바쳤고, 제사장 엘리가 사무엘을 양육하였다. 사무엘은 제사장을 도우며 성장하였고, 장성한 후에는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되어 이웃 강대국인 블레셋 사람들의 압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사무엘은 신실하게 기다리며 기도한 결과로 얻은 귀한 아들이어서 인기 있는 남아의 이름이고, 우리나라에도 ‘삼열'(三悅)이란 기독교식 이름이 많다.”1

이 설명에 따르면 사무엘은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고, 귀하게 태어나 어려움 속에 성장하여 강력한 외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이런 설명을 보면, 기도하는 사무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버스나 택시에 붙어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사무엘은 수호신 같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그림은 기사님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사님의 가족이 붙여놓는 것이었을 수도 있었고, 가족들의 사랑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운전하기 위하여 기사님이 붙여놓는 것이었을 수도 있었고, 승객의 안전을 기원하며 기사님이 붙여놓는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나에게 그 그림은 그저 나를 조금 닮은 아이가 이상하게 그려있는 그림이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부모님의 보호 속에 거의 완벽하게 안전했기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도 이상해보였다. 그러나 그때 즉 “해방 후의 혼란과 이어진 전쟁으로 일상이 불안하던 그 시절, 안전보다는 생계가 우선이었던 급속 성장의 시대”2에 그 그림은 많은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주었을 듯하다. 그러다가, 살림살이가 점차 안전해져서인지, 점차 사라져가던 그 그림은,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모 언론사가가 기획 보도한 ‘국민들이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추억의 물품’에 선정되었다고 한다.3

일없다

그런데 그 그림 속 무사(無事) 즉 ‘무사하다’라는 형용사는 ‘일없다’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요즈음 ‘일없다’라는 말은, 북한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남한에서 만든 사전에도 들어있는 말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여볼 수 있는 사전은 ‘일ː-없다’를 ‘개의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라는 뜻의 형용사라고 설명한다. 한편 문자 그래도 ‘무사하다’를 읽으면 ‘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여본 사전에서도 ‘일ː 없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No work’가 된다고 예시하여 놓았다. ‘무사하다’, ‘일ː-없다’ ‘할 일이 없다’, ‘개의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 한 형용사에 대한 뜻풀이들인 이 말들은, 서로 그 뜻이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그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말의 다의성(多義性)은 드문 현상은 아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1919년생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이기영 씨는 빰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을 때 아들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웃으며 노래하듯 “일없다~♬”고 말하곤 하였다. 한편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일이 잘 풀지리 않을 때 아들이 놀아달라고 하면 다소 날카롭게 “일없다!”고 말하곤 하였다. 여기에서 “일없다~♬”는 ‘이거 별로 힘들지도 않고 재미도 있단다’로 의역될 수 있겠다. 한편 여기에서 “일없다!”는 ‘중요한 순간인데 끼어드는군. 나를 좀 혼자 내버려 둬!’로 의역될 수 있겠다.

한편, 보통은 누군가가 당장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이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걱정해준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무사하다고 하면 우호적인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다행(多幸)이라고 말하여 주며 함께 안도할 것이다. 이런 예를 보면 ‘무사하다’ 라는 말과 ‘일없다’ 라는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이나 정보는 크게 다를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별일 없이 산다

그러나 ‘무사하다’와 ‘일없다’는 근원적으로 같은 뜻의 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사하다’는 곧 ‘일없다’ 혹은 ‘할 일이 없다’ 혹은 ‘당장 해야 할 일은 없다’이며, 그런 상태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는 상태가 아니라, 사실은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듯한 사람이 만든 노래도 있다. 2009년에 발매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규 1집 앨범 《별일 없이 산다》에 수록된 노래 〈별일 없이 산다〉를 말하는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번 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좋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아주 그냥

장기하와 얼굴들(Kiha & The Faces) – 별일 없이 산다

이 가사는, 누군가가 별일 없이 살면서도 걱정과 고민이 없다면,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기뻐하지 못하고, 불쾌해 하고, 그걸 안 날 밤에는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또한 별일 없이 살면서도 사는 게 재미있을 수 있다고 노래하였다.

‘일없다’는 ‘걱정 없다’, ‘신경 쓰지 마라’ 등의 뜻을 내포한다. 실제 대화에서 맥락에 따라 위로, 평온, 혹은 짜증 등 다양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다.
사진출처 : Antranias

일이 신성시되거나, 일 만이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믿음이 강력 세상에서라면, 대다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고 할 것이다. 다들 그러하니, 그런 세상에 할 일이 없으면서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이 너무 고되지 않으면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나아가 그런 세상에서 할 일이 없으면서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의 존재를 위험시될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겉으로라도, 일이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 만이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것처럼 꾸미거나,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도록 의식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일의 성격과 그에 대한 이해와 자리매김은 끊임없이 변화하여왔으며, 지금 여기에서도, 그러한 변화는 이어지고 있다. 인류는 기억의 상당 부분을 외부 기억 장치에 맡겨왔다. 문자·종이·인쇄술 등의 발명과 함께하여 온 것이 바로 그러한 흐름이다. 인류는 계산도 외부 연산 장치에 맡겼는데, 그 속도와 기능이 지금도 급속히 개선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근육을 사용한 일들을 주먹도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외주화’하는 추세도 인류사의 여명기로 그 시작점이 소급되면서, 그 속도와 기능이 지금도 급속히 개선되고 있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도구들의 발달은 몸을 써서 일한다는 생각에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와중에 일의 변화와 일에 대한 생각 사이의 간격을 사람들이 메우기 어려워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듯하다. 노래 〈별일 없이 산다〉는 이러한 간격을 소재로 한 것인 듯하다.

어찌 보면 한국 사람들은 장기하 씨의 노래 〈별일 없이 산다〉가 사랑받고 있는 21세기에 이르러서야 일의 변화와 일에 대한 생각 사이의 간격을 고민하게 된 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은, 길게 잡으면 ‘무사하다’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조금 짧게 잡으면 ‘일없다’라는 말이 일상 속에서 쓰이던 시절부터, 이미 한국인의 중요한 관심사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정이 적절한 것이라면, 지금 여기의 한국인들은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기본소득 도입 등등의 논의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1. 이재태, 〈[이재태의 세상속의 종소리] ‘오늘도 무사히’〉, 《매일신문》 2020-09-21.

  2. 이재태, 〈[이재태의 세상속의 종소리] ‘오늘도 무사히’〉

  3. 이재태, 〈[이재태의 세상속의 종소리] ‘오늘도 무사히’〉 참조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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