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승철 교수님의 2주기 추모제에서 제가 발표한 내용을 다듬은 글입니다. 짧은 시간의 발표라 논증이 있는 글은 아닙니다만, 교수님과 제가 항상 나누던 질의응답 중 일부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발표한 것보다는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살을 덧붙였습니다. |
제가 오늘 발표할 주제는 욕망이 다시 쓰는 민주주의입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테니 소개를 하자면, 저는 대학에서 신승철 교수님을 만나서 문래동 철학공방 별난에서 약 1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었던,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이 만남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지만, 오늘은 교수님과 별난에서 나누던 대화의 핵심 질문 하나를 이 자리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교수님은 항상 이야기하셨습니다. 욕망은 사랑입니다. 그럼 저는 반문합니다. 교수님, 욕망은 파괴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윤석열과 그 일당들을 보십시오. 그 무리의 힘에 대한 갈급함과 권력을 향한 파괴적 욕망이 사회공동체를 이토록 소진시켰습니다. 욕망을 사랑이라고만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 아닙니까.
근데 제가 어떻게 반문하든 교수님은 욕망은 사랑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과 돌봄의 영토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한때는 그런 교수님이 답답했습니다. 당위와 현상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도 내심 항상 신기했던 건, 실제로 교수님의 주위에는 사랑의 장면들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제가 애정하고 존경하는 윤경 님과의 일상, 고양이들을 수고롭게 돌보는 가운데 느껴지는 행복함, 제가 질문을 집요하게 할 때 웃음으로 넘기시며 내려주시던 커피 한 잔, 대학원생도 아니었는데 슬그머니 제 책상에 두고 가시던 몇 천 페이지의 철학 자료들, 그런데도 좋다고 읽고 글 쓰는 제 모습까지도. 교수님과 함께 하던 하루하루가 좋고 행복했고 따듯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과 욕망에 대해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그랬는지, 당시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저에게 너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욕망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교수님에게도 욕망은 중요한 개념이었고요. 욕망과 민주주의에 대해서 저에게 깊이 남아 있는 교수님의 짧은 글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성소수자 동아리를 만들었는데요. 이 동아리를 학생자치회인 중앙동아리연합회에 등록하던 일 때문에 교수님이 써주신 추천사가 있습니다. 잠시 낭독해보겠습니다.
“동아리연합회가 성소수자 동아리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할 때, 그것은 성소수자 동아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동아리연합회 자신이 더 성숙하고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80년대 뜨거운 민주화 시대가 지나고 전 세계적인 보수화 열풍에 휩싸여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도 성 소수자들의 열정과 욕망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판을 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 소수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LGBT입니다. 뜨거운 연대의 감정으로 우리 자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인 이들에게 연대의 박수를 보냅시다.”
욕망이 민주주의를 새롭고 풍성하게 한다는 말씀은 저에게 너무 많은 감동을 줬었습니다. 물론 욕망 자체가 반드시 사랑이라는 구도를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증언하고 공동체를 풍요롭게 한다는 말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성애중심적인 남녀 성별이분법이 인간의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성별표현, 성특징의 다양성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해방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임을 꽤 명확했습니다.
한참 신 교수님과 욕망과 사랑에 대해서 논쟁하던 시기가 10년 전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여러 일들 겪고 나니 신승철 교수님께서 어떤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제 조금 비슷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늦어서 아쉽지만. 교수님의 표현을 제 식대로 조금 수정하자면, 욕망은 사랑일 때 비로소 욕망다워집니다.
사랑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잘 흐르게끔 돌보게 되는 욕망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욕망을 흐르게끔 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욕망은 사랑이겠구나. 오히려 타인을 지배하고 자유로운 흐름을 억압하는 행태야말로 욕망의 적이겠구나. 왜냐면 욕망은 흐르는 것이니까요.
신승철 선생님의 개념에서 욕망이란 초월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주어지는 필요로서 욕구에 영향을 받는 지점이 있지만, 반드시 환원되는 것은 아니고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욕망은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발생한 여러 배치들에 의해 국지적으로 구성되어,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게끔 하는 원인입니다. 특이점이 되는 사건들로 인해 배치와 흐름이 바뀌면 욕망도 바뀝니다. 우리는 욕망을 부추기기도 하고, 제지하기도 하는 등 욕망에 대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합니다. 정해진 욕구가 우리의 선택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체들이 어울림을 통해 욕망을 형성하면서 더 다채로운 사건들을 만들어냅니다. 그 욕망의 흐름을 서로 더 잘 흐르게끔 만들고자 할 때, 우리는 욕망이 사랑과 돌봄의 영토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 : 조해민
이런 인식에 의하면, 누군가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괴하는 일이고, 욕망을 적대적 이해관계로 치환해버리는 일입니다. 욕망은 얽힘과 어울림을 통해 국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이익과 너의 이익이 명확하게 선 그어지는 이해관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제가 성소수자로서 제 욕망을 드러낼 때 그것은 저의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저와 성소수자 구성원들의 욕망을 흘러가게 만드는 시도가 됩니다. 중앙동아리연합회가 성소수자 동아리를 수용하는 일은 성소수자에게 구조적으로 주어지는 견고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서, 지금 함께 살아가는 학우로서 성소수자들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풍성한 공동체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근대적 권리 개념을 설명할 때,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앞에서 멈춘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멋있는 표현이죠.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다른 사람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얽히며 더 다양하고 풍성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사랑일 때 비로소 욕망다워집니다.
저는 사랑이 이긴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연히 자본의 영토, 이해관계의 영토에서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토에서의 생존방식을 훨씬 더 엄중하게 생각하고, 극단적으로는 그 영토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국지적인 배치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욕망은 발생하고, 따라서 사랑과 돌봄의 영토를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신승철 교수님이 ‘공동체가 자본을 착취하도록 만들자’는 취지로 제안하시는 것은 자본이 공동체를 착취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할 만큼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가 힘이 강하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항상 공동체적인 전략과 전술이 뒤따라와야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감초 같은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우리를 말-하게 하고,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합니다. 휴식도 취해야 하고, 서로 거리두기도 잘해야 하죠. 그를 위한 통찰력을 우리는 생태적 지혜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생태적 지혜는 사랑(욕망)하면 할수록 더 깊고 넓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욕망)할수록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승철 교수님에게 공동체란 당위적 필요성으로 기획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강줄기가 되는 흐름이 생기긴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중 어느 누군가가 욕망의 흐름을 타고 ‘무언가 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생길 때 공동체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흐름을 잘 읽고 감지하고 행동하는 역량이 소중합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계의 보수화를 우려하셨던 신승철 교수님이 왜 욕망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얘기하시려고 했는지 오늘날에서야 더 많이 체감합니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만, 이 욕망이 순환하는 사랑과 돌봄의 관계망이 곳곳에 눈덩이 같이 불어나야 합니다. 특히 경쟁 속에서 고립된 사람들에게 욕망의 삶, 사랑과 돌봄의 삶, 생태적지혜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의 삶’을 제안하는 것은 단순히 대안적인 게토를 만드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다른 민주주의를 위해 판을 짜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게 철학이냐? 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철학을 진리를 찾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제가 해석한 진리란 ‘이 외 없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지점에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근데 신승철 선생님의 철학이란, 공동체와 욕망의 흐름을 활성화하기 위한 전략 전술 도구에 가깝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그래서 기존 철학연구자들과 결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 철학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고, 때문에 학술적으로도 신승철 교수님의 주장이 당연히 유의미하고 개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그 철학적 함의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학문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태적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훨씬 실천적인 일이고, 지식과 언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적지혜연구소가 서로를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들의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압도하기보다, 서로의 욕망을 흐르게끔 하는, 강력한 동력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이런 지금의 생각을 교수님께 전달해드리면, 분명 책을 하나 쓰자고 말을 하셨고 일을 늘리셨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너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기도 하네요. 농담입니다. 마지막으로 추천사를 조금 수정해서 여러분들과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전 세계가 보수화 열풍에 휩싸여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도 소수자들, 우리들의 열정과 욕망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판을 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소수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특이성입니다. 뜨거운 연대의 감정으로 우리 자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인 이들에게 연대의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