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유토피아 안내서] ③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이야기로 -메타 내러티브의 대전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하게 된 이유부터 지구를 망치게 된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이야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선택설계’ 때문이며, 이는 우리가 믿고 있는 이야기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3장에서는 ‘이야기’에 대해 다룹니다. 헌법과 민주주의의 현대적 적용인 시민의회까지는 거대한 주제이지만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이야기’를 가져와서 조금 당황스러우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논리를 뛰어넘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이죠. 그래서 연재 초반에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참고로, 이 글에서는 이야기와 내러티브(서사), 스토리텔링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이번 글의 주제로 수년 전 필자가 제작한 영상인데, 참고자료로 공유드립니다.

[기후도시 8] 기후위기를 해결할 새로운 이야기 전략(기후도시들의 연합)

이야기의 중요성

탈성장 연구로 주목받는 정치경제학자 제이슨 히켈이 저술한 『적을수록 풍요롭다』란 책은 꽤 많이 회자되며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지금의 기후생태위기를 가져 온 ‘자본주의’의 문제를 여러 측면으로 파헤치더니 책 말미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는 위기의 동력일 뿐 기저의 실제 원인이 아니다.”1 곧바로 의문이 들더군요. ‘아니 책 절반을 할애해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더니 갑자기 실제 원인이 아니다? 그럼 대체 기저의 실제 원인은 무엇이란 거지?’ 그는, 그건 바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에 대해 과거와는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 오랫동안 인류가 믿어왔던 것(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과 달리, 지금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자연은 영혼이 있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우위에 있고,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 뭐든 취할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지자 모든 게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현재 위기의 근원이 바로 이야기의 변화라는 진단입니다. ‘세계관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프롤로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야기는 강력합니다. 문자로 기록하기 어려웠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몇 백 년 몇 천 년 씩 구전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의 힘이겠지요. 인간은 이야기에 살고 이야기에 죽습니다. 이야기가 우리 행동을 이끌고 결국 우리 삶까지 좌지우지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전 지구적 위기도 어쩌면 우리가 믿고 있는 이야기가 잘못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번 글에서는 특별히 《Demain(내일)》이라는 다큐영화의 감독이자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의 저자 ‘시릴 디옹’의 주장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그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선택설계’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우리가 믿고 있는 이야기에 따라 구성된다고 합니다. 그럼 우선 이야기가 왜 중요하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두 가지 정보처리 시스템(감정뇌, 이성뇌)2

기후변화의 심리학
『기후변화의 심리학』

『기후변화의 심리학』 저자 조지 마셜은, 그의 책에서 인간은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구별되는 정보 처리 시스템을 발달시켜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둘은 별개의 단절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는 시스템입니다. 분석과 논리 시스템은 현실을 추상적인 상징, 단어, 숫자로 바꾸고, 감정 시스템은 현실을 이미지, 직감, 경험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데, “두 시스템 모두 언어를 사용하나, 분석시스템에서는 설명하고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고, 감정 시스템에서는 주로 이야기 형태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론, 그래프, 프로젝트, 데이터는 거의 전적으로 이성적 뇌에 호소하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증거를 평가하고 대개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행동하도록 박차를 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와 이야기를 통해 감정적 뇌를 움직여야 합니다. “실제로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시각에서 보기 위해 문제를 좀 더 거리를 두고 살핀 다음 감정적으로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단기적인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그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조지 마셜은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행동을 촉구하려면 최선을 다해 양쪽 뇌 모두에 호소해야 한다. 먼저, 믿을 만한 출처에서 나온 정보임을 이성적 뇌가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데이터와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긴급성, 근접성, 사회적 의미, 이야기, 경험에서 나온 비유 등의 도구를 활용하여 감정적 뇌를 끌어들이고 자극하는 형태로 그 데이터를 변환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즉 “이야기라는 수단을 통해 감정 뇌는 이성 뇌가 접수한 정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지요. 이성적으로 이해한 기후변화 관련 정보들이 의미를 얻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짜 능력

시릴 디옹은 “우리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배우며, 믿음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사고와 꿈, 희망과 두려움에 형태를 부여한다. … 어느 시대에나 일련의 이야기와 믿음이 있었기에 사회는 공통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3 이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먹이사슬 중간밖에 안 되던 현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허구(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즉 ‘허구’를 통해 대규모의 집단이 하나의 이야기, 신화 같은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이런 협력을 토대로 대규모 전쟁까지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인지 혁명’이라고 합니다. ‘왕권’, ‘인권’ 같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개념까지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인간은 다른 모든 종들을 재치고 정점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결국 ‘이야기’가 인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이야기’는 인간을 하나로 묶어내고 움직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를 믿는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장주의, 현대의 메타 내러티브(Meta narrative)

그럼 현재 우리 대부분의 인류가 믿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성장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가 성장해야 나눌 몫이 커지면서 모두가 풍요로울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경제성장을 국가의 제1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GDP(국내총생산)를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러한 큰 이야기, 거대 서사를 ‘메타 내러티브’라고도 하는데, “특정 사회나 문화 집단에서 보편적 진리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야기나 담론을 의미”합니다.4 이를테면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인간들이 타락했고, 결국 신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을 구원했다.”라는 것이 메타 내러티브인 셈이지요.

이후 연재글에서 다루겠지만, 최근 많은 학자들과 기후운동 진영에서는, 기후위기의 근본원인을 ‘성장주의’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습니다. 성장을 하려면 지구의 막대한 자원을 채취해야 하고(물질발자국), 개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화석연료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엄청난 탄소 배출로 지구가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대표하는 지표인 GDP 그래프와 물질발자국 그래프, 이산화탄소 그래프가 비슷하게 우상향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장주의가 기후위기의 근본원인이라고 할 때, 결국 이 서사가 바뀌어야만 온전한 기후위기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선택설계과 이를 극복할 세 가지 목표의 새로운 이야기

시릴 디옹은 또 중요한 개념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라는 것은 일련의 선택 설계들로 나타난다. 선택설계(보이지 않는 설계)는 우리가 반드시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적 요소들을 가리킨다. 선택 설계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 또는 우리가 하기로 선택했다고 믿는 것을 결정하는 틀이다.”라고 설명합니다.5 그리고 “주요한 선택 설계 세 가지는 ‘돈 벌기, 재미에 지배당한 삶, 법’이며,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허구(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성장의 종교이다.”라면서 우리의 근원적 문제를 파헤칩니다. 다시 말해, 성장주의라는 강력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선택설계를 통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돈 벌기, 재미에 지배당한 삶, 법을 통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성장’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행동을 추동하는 ‘선택설계’를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세 가지 목표와 새로운 이야기

그는 ‘선택설계’를 바꿀 새로운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야 할 세 가지 큰 목표를 제시하는데요, 첫 번째는 파괴와 온난화를 멈추는 것이고, 두 번째는 회복 탄력성을 만드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재생하는 것(지구와 우리의 경제 및 사회 모델)입니다.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파괴와 온난화를 멈추다.

새로운 “우리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우리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것, 우리를 제약할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생태계, 사회복지 시스템, 함께하는 삶의 파괴와 이상기후를 멈출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2) 회복 탄력성을 만들다.

현재 우리 시스템들은 회복 탄력성은 무시하고 효율성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울라노위츠와 그의 연구팀은 복잡계(경제, 사회, 정치 시스템 등)의 생존은 효율성과 회복 탄력성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회복 탄력성’이란 “붕괴되지 않고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적응하고 생존하는 능력”입니다. “이 말은 지역 차원에서 최대한 많은 식량과 에너지를 생산하고, 대규모 중앙 상수도망에만 의존하지 않는 식수관리를 실시하고, 기존 재료의 재사용, 수리, 재활용뿐만 아니라 전통 또는 재창조된 방식의 수공업을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러한 활동에 필요한 노하우를 찾아야” 합니다.

(3) 재생하다(지구와 우리의 경제 및 사회 모델)

“생산, 이동, 주거, 교역의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숲을 살리고, 야생의 공간을 늘리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포집해야” 합니다. 여기서 탄소포집은 CCUS(탄소포집저장기술)와 같은 기술적 개념이라기보다 바다와 숲을 회복시켜 자연적으로 포집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지성과 도구, 그리고 혼자서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연의 생태계가 갖는 공생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사회”인 공생경제가 필요합니다.

협력을 가능케 한 이야기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생물종을 지배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도구를 만들 줄 아는 능력도 지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생물계에서 전적으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협력의 능력’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기후위기처럼 전 지구적, 전 인류적 노력이 필요한 규모의 사안은 더욱 더 이 협력의 능력이 절실합니다.

데이비드 슬론 월슨, 엘리엇 소버, 에드워드 O. 윌슨, 마튼 노왁 등의 학자들은 인간을 ‘초협력자’로 간주하는데, 이것이 다른 생물종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수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라리가 말하는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통해서 가능한데, “그것은 공통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들이며,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결국 언어를 통한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진 현실이 인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사회 곳곳의 수많은 영역과 사람들이 협력해야 가능한데, 그런 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6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

그런데 이러한 협력을 방해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다.”라는 서사입니다. 이 서사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주류 경제학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이 명제를 뒷받침하는 잘 알려진 사례가 있는데, 그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 실험’으로,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 교수가 그의 책 『휴먼카인드』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 《더 스탠포드 프리즌 엑스페리먼트》(2015)

1970년대 초,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스탠포드 대학 지하에 가짜 감옥을 만들고 24명의 학생(간수 12명, 죄수 12명)을 대상으로 이 실험을 진행하였는데, 초기에는 평화롭게 진행되었으나 실험이 진행되면서 간수들은 잔인한 행동을 보였고, 결국 6일 만에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깊이 보면 꽤 괜찮은 존재이지만, 문명이라는 얇은 껍질 아래에는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본성이 숨어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베니어 이론(얇은 막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훗날 프랑스 사회학자 ‘티보 르 텍시에르(Thibault Le Texier)’는 『거짓말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 실험이 사실상 조작되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실험에서 학생들은 짐바르도의 지시에 따라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가 여전히 심리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로 남아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20년 전 BBC는 다시 이 실험을 반복했지만, 방해 없이 진행된 결과는 예상과 달리 학생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으로, 인간 본성이 본래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은 아니며, 그렇기에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 번 널리 알려진 서사는 바꾸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거짓을 이기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이라는 어떤 드라마의 대사처럼, 어쩌면 이제는 사실 증명을 넘어 더 많은 사실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협력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성장’을 외치는 지금의 주류 경제시스템에 균열을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의 저자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이 “한 명 이상의 사람이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믿으면 곧 그 내러티브는 사회나 국가와 같은 상위 집단에도 – 예를 들면 정치적 움직임을 위해 –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라고 했듯이,7 이제 인간 본성에 대한 좋은 내러티브들이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야기의 전략, 마음을 뺏는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후위기 영화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그 전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원래 “사냥이나 결혼의 구체적인 조언까지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간수하고 전달하는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어떻게 이 모든 지혜를 이해 가능하고 전달 가능하고 설득 가능하고 실행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한 마디로 어떻게 착 달라붙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해법이 발견되었다. 스토리텔링이 해법이었다”라고 말합니다.8 이를테면 할머니가 들려주는 부족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여러 지혜들과 가치관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를 형성해 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도 매체는 바뀌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영화나 유튜브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대부분 스토리텔링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화 《워터월드》(1995), 《투모로우》(2004), 《인터스텔라》(2014), 《설국열차》(2013) 포스터

이런 스토리텔링을 통해 큰 영향을 미치는 매체는 누가 뭐래도 영화일 것입니다. 기후위기 관련해서도 여러 영화들이 등장했고 제법 흥행한 영화들도 있습니다. 《워터월드》, 《투모로우》, 《설국열차》, 《인터스텔라》 등.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영화는 지구 온난화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다루지 않고, 단지 그 결과를 배경으로 사용하여 가족사, 모험, 반란 등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생태위기는 그저 서사적 무대를 제공할 뿐 실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흥행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과학소설이라고도 하는 기후물(클라이파이 Cli-Fi)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지구온난화의 결과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결국 “기후를 핵심 주제로 다루는 제작물은 대부분 다큐멘터리 영화에 그친다”다는 것이 한계입니다. 특정한 인물과 집단만을 악당으로 설정하기 어렵거나, 주인공 한 명의 영웅서사로 묘사하기에도 허황될 수 있기에 이를 극복한 픽션을 만들기가 매우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투모로우》라는 영화는 그래도 가장 과학적으로 묘사했다고 평가받기도 하고(몇 달 만에 빙하기가 온 것을 제외하고), 실제 사람들로 하여금 기후 보호 캠페인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스펙터클하게 파괴되는 지구의 모습이 자주 비춰지면서 재앙 이미지가 낡은 소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9 따라서 이런 문제들을 뚫고 허황되지 않으면서도 집단이 서로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해 가는, 그러면서도 재미를 갖춰 어느 정도 흥행도 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너무 어려워 보이는 미션이기는 합니다만.

이야기의 마법, 논증보다는 이야기로

스탠퍼드대학교의 미디어 연구자 클리퍼드 내스와 바이런 리브스는 “미디어를 현실로 혼동하는 현상을 ‘미디어 등식(media equation)’”, 즉 ‘미디어=현실의 삶’이라고 합니다. 어떤 드라마에 등장한 악당을 연기한 연기자가 실제로도 그런 악당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믿게 된다거나 온라인에 화풀이 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디어 등식은 ‘서사이동’이란 개념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서사이동이란 책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일상에서 벗어나 대안적 이야기 세계로 정신적 순간이동을 하는 미묘한 감각을 말한다. 서사이동을 할 때 우리는 현실 세계로부터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부분적으로 분리된다.” 즉 스스로를 좋은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편견을 내려놓게 되거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게 된다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닫혀 있던 마음이 이야기나라에서는 활짝 열리”는 것이며, “이야기가 변화를 일으키는 막강한 원동력인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0 우리가 너무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노래의 세계로 순간이동을 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 좋은 스토리텔링은 고정된 우리의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에서 잠시 벗어나 사태를 좀 더 객관적 또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정책을 설득하고 싶을 때, 사실에 기반해 논증하게 되면 오히려 경계 태세를 취하고,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논증이 자신의 기존 신념과 어긋날 때는 더욱더 경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서사학 교수 톰 판라르는 “반면에 이야기에 빠져들면 지적 방어망이 느슨해진다.”고 하면서 “서사이동은 신중한 판단과 논증 없이도 지속적 설득 효과를 낳는 정신 상태다. … 그들은 독자의 합리적 사유 능력을 무력화한 채 정보와 믿음을 주입할 수 있다.”11 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의 힘은 엄청나며, 기후위기를 비롯한 현대의 다중적 위기 극복을 위한 통찰을 던져줍니다.

그럼 어떻게 이야기할까?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12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J. 실러는 자신의 『내러티브 경제학: 경제를 움직이는 입소문의 힘』에서 내러티브의 확산을 바이러스와 비교하면서, “내러티브의 전염은 만남이나 전화 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개인에서 개인으로 이뤄진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언론 매체나 토크쇼를 통해 다른 매체로 전염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생각 바이러스’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상호 소통을 하며, 믿을 만하고, 비트코인처럼 흥미진진하고 자유로운, 그러나 생태학적으로 생산적이고 진보적인 바이러스”일 것입니다. 그 방향은 당연히 새로운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주제를 다루면 늘 나오는 뻔한 상상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작가 닐 게이먼은 “상상력은 근육과 같다. 근육은 단련하지 않으면 쇠약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즉 갑자기 우연히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단련하고 훈련시켜 키워야 하는 상상력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조금씩 우리를 전염시킬 것입니다. 물론 하나의 이야기로 가능하지 않겠지요. 아주 많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상상은 행동에 앞서고,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우리의 인식, 믿음, 문화를 만든다. 특히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는 강력한 채널을 만났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는 시릴 디옹의 말도 기억해야겠습니다.13

이제 결론을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수백 만 명이 우리 운동에 동참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줘야”합니다.14 그런데 그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메타 내러티브인 ‘성장주의’를 바꾸어 기후생태위기로부터 우리 자신과 모든 생명들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는 공간, 도시

앞서 시릴 디옹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도시’라고 하면서, ‘도시 기후 리더십 그룹(C40)’, ‘탄소배출 제로도시 연맹’ 등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의 기후위기 대응과 협력 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우리 삶을 가까이에서 규정하는 공간이 바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온실가스의 70%가 도시에서 배출되기 때문에 도시의 역할과 힘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시릴은 말합니다. 그는 또한 “나는 도시가 국가보다 더 빠르게 변할 수 있고 문화적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허구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15

그렇다면 이제 성장주의란 강력한 서사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 ‘도시’에 대한 탐험을 시작해볼 때가 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기후도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적을수록 풍요롭다』, 제이슨 히켈, p.334.

  2. 『기후변화의 심리학』, 조지 마셜, p.77~81.

  3.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시릴 디옹, p.66, 68.

  4. newsnjoy.or.kr 참조.

  5.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시릴 디옹, p.78.

  6.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시릴 디옹, p.67.

  7.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p.164.

  8.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너선 갓셜, p.46.

  9.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p.430~434.

  10.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너선 갓셜, p.49~52.

  11.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너선 갓셜, p.53~54.

  12.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p.516~523.

  13.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시릴 디옹, p.70.

  14.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시릴 디옹, p.65.

  15. 『작은 행성을 위한 몇 가지 혁명』, 시릴 디옹, p.171, 173.

김영준

기후위기를 극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은 두 아이의 아빠이자, 예술의 힘을 믿으며 '월간 기후송'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싱어송라이터. 교육의 중요성을 고민하는 기후환경강사이면서, 종교(신앙)의 힘을 아직 믿는 기후위기기독인연대 활동가, 그리고 정치에 희망을 버리지 않은 녹색당 당원. 생태전환Lab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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