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한 몸엔 타인의 손길이 닿는다. 치료가 필요할 때, 휠체어에 앉을 때, 뱃줄을 통해 밥 먹을 때, 눈곱을 뗄 때, 어쩌면 숨이 붙어 있는 모든 순간에 타인의 손길이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언니 몸과 맞닿는 순간을 보았다. 그럴 때면 그 사람의 태도와 감정도 함께 언니 몸을 스치는 걸 느낀다. 엄마는 지독한 사랑으로 언니를 보듬고, 나는 존중과 우정으로 그를 만진다. 그렇지만 모두가 꼭 애틋한 몸짓만을 보이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길어졌다. 응급실부터 3차 병원, 요양 병원까지 여러 곳을 언니와 전전했다. 그만큼 언니를 만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언니 또래 간호사나 의사, 재활치료사가 올 때면 그들 모습에 샘이 났다. 나의 언니도 저들처럼 어엿한 사회인이었다. 그들이 언니를 부를 땐 심장에 비수가 박혔다.
“진솔이, 진솔아.”
언니가 지금 모습이 아니었다면 처음 만난 사이에서 그렇게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존댓말을 했을 것이고, “진솔 씨”라 칭했을 것이다. 왜 우리 언니는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 아기도 처음 만난 사이라면 존대하는 게 맞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사진 출처: Hannah Barata
언니가 CT를 찍는 날이면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방사선사는 언니를 이동식 침대에서 촬영 기계 안으로 옮겼다. 바빠서인지 그 과정은 늘 과격했다. 시트지로 언니를 감싸 단숨에 들었고, 거의 던지다시피 언니를 놓았다. 하얀 덮개가-마치 숨이 멎은 사람에게 하듯-언니 얼굴을 덮어도, 갑작스러운 속도감에 언니 눈이 동그래져도 그들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심해 달라 부탁해 보고 날 선 짜증도 내봤지만 늘 똑같았다.
몇 해 전이 떠오른다. 언니와 정기검진에 함께 갔던 날이었다. 그때도 언니는 촬영 기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종양 재발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였는데도 기계실 밖으로 나온 언니의 얼굴이 웬일인지 밝았다. 그에게 왜 이렇게 들떠 보이냐고 장난치듯 묻자 언니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내 귀에 속삭였다. 검사실에 있던 방사선사가 자기 스타일이라 괜히 신경 쓰이고 설렜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꺄르르 웃었다. 다음에 만날 땐 말을 한번 걸어보자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보고 설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그와 지금의 언니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몸 상태가 달랐지만, 한 생명의 존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 마음과 같지 않은 타인의 태도를 볼 때면 나는 언니에게 일어난 변화를 유난히 실감한다.
의료진은 바쁘다. 현대 사회에서의 병원은 효율이 필요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일하려면 숙련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어쩌면 그들은 환자와의 거리감을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아픈 몸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만큼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언니처럼 의식이 없는 사람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선 안 된다. 몸을 만지는 사람의 태도와 감정은 맞닿은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니까. 아무리 의식이 없어도 하나의 생명이라면 으레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살과 살이 닿는 것, 연결된다는 것은 우주만물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니까.
어떤 이가 생각난다. 언니가 사고를 당한 직후 입원했던 응급실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였다. 그는 언니를 ‘진솔 씨’라고 칭했다. 자주 가족에게 다가와 언니의 상황을 알려줬다. 그가 근무하는 날이면 유난히 마음이 놓였다.
하루는 그 간호사에게 당혹스러울 수 있는 부탁을 했다. 언니 침대 머리맡에 학교 아이들이 써준 편지와 인형을 놓아달라고 했다. 또, 언니를 확인할 때마다 노트북에 담긴 언니 어린 시절 영상을 틀어 달라고 부탁했다. 남자 간호사는 귀찮을 수 있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 사람이 일하는 날에 병실에 들어서면 편지와 인형이 정돈돼 있었고, 영상도 늘 재생되고 있었다.
응급실을 떠나던 길,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믿을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믿을 수 있었다고. 당신의 친절함이 우리 가족의 어느 시절을 지탱했다고.
아픈 몸을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는 그 사람을 돌보는 이의 마음까지 돌본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그 몸을 어떤 속도로 어루만지는지, 의료행위를 얼마나 친절하게 설명하는지.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한 사람을 의식불명의 무생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고 있다는 신호가 된다.
언니를 스친 수많은 손길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떤 손길은 상처보다 깊은 모멸감을 남겼다. 어떤 손길은 절망 속에서 희망이 되어 주었다. 어떤 손길이 옳은 지는 언니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