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픈 과외생활] ④ 유리가면 살포작전

한마디로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그런 긴 장편 만화를 굳이 자기 돈 들여서 친히 빌려 와서 반 친구들에게 무료로 서비스 한 거다. 무슨 심보인지 아님 사해동포주의 정신인지 알 수 없으나, 진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젠장. 하루 종일 그 유리가면만 생각나요. 아니 매일매일이요.”

입시 막바지에 생기는 일들은 불가피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생기곤 했는데, 그 일들은 매우 기형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푸흡 하고 헛웃음이 나기도, 흐뭇한 기억도 넝쿨처럼 잇달아 길어 올려지기도 한다.

수능 이후에 연락이 닿은 경우는 많지 않은데, 연주에게서는 이름도 범상치 않은 ‘범죄심리학과’에 붙었다고 연락이 왔다. 아동심리를 지망했었는데 점수에 맞추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어머님은 나에게 굉장히 친절하셨는데, 이사를 앞두고 집에 걸어둔 풍경화 두 점과 쓰지 않은 금도금 수저 세트를 가져다 쓰라는 일도 있었다. 수능을 몇 주 남긴 어느 날, 연주는 손가락에 깁스를 하고 왔다.

“체육 시간에 배구 연습을 하는데, 토스를 하다 으악, 손가락이 뒤로 젖혀졌어요”

세상에나. 얼마나 아팠을지… 그런데 하필 ‘가운데 손가락’에 ‘살색 깁스’를 한 것이다. 센스가 있는 건지 센스 꽝인지 알 수 없는 의사 선생의 배려(?)로 불쌍한 연주는 욕설을 연상케 하는 포즈가 되어 버렸다. 도저히 ‘접을 수 없어 슬픈’ 손가락이여! 하긴 ‘흰색 깁스’라 해도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으리라. 결국 수능 당일, 시험장으로 의무실을 배정받아 따로 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액땜을 한 건지 아무튼 대학에 붙었다.

이미지 출처: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1권, 대원씨아이(대원문고), 1996

진우의 아버지는 시계 수리 기술자로 잘 알려진 분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 연예인들이 고가의 수입 손목시계가 고장 났을 때면 여지없이 찾는 베테랑이라 했다. 그런데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진우의 같은 반 친구가 교실에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만화로 말하자면 미완으로 남은 불후의 명작1이자, 이후에 20권에 달하는 애장판도 출판됐다. 연극과 극단을 배경으로, 불운한 스승과 팔색조 상경 소녀 사이의 애증(?), 잘 나가는 라이벌과 살 떨리는 경쟁, 그리고 그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공과 비밀의 후원인인 ‘보라색 장미의 그’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 대서사라고 할 밖에.

한마디로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그런 긴 장편 만화를 굳이 자기 돈 들여서 친히 빌려 와서 반 친구들에게 무료로 서비스 한 거다. 무슨 심보인지 아님 사해동포주의 정신인지 알 수 없으나, 진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젠장. 하루 종일 그 유리가면만 생각나요. 아니 매일매일이요.”

반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코앞의 입시 걱정 따위, 촉박한 시간 안에 몰두하는 대동일치의 숨결을.

10월에 만화책에 빠져 허우적대던 녀석은 앞서 9월 모·평 때는 시험을 곧잘 봐서, 생각지 않은 특별 보너스를 받았다. 정말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총점 48점의 사회탐구 네 과목과 총점 72점의 과학탐구 네 과목을 응시해야 했던 6차 교육과정에서, 이과생 진우는 과·탐보다 사·탐점수가 더 높게 나왔다며 포복절도했다. 하지만 이과 입시에 큰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진우의 아버지가 진우의 과외비를 버느라 고생하실 생각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략 난감한…

진희의 아버지는 XX대학 의과대 학장이었다. 진희는 그 대학 한의대를 너무 가고 싶어 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늦은 밤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나서 과외수업을 연달아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수시에 응시해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는데, 동점자는 붙었지만 면접 점수에서 1점 차이로 탈락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지위가 딸의 입시에 불똥을 튀게 했던 것인데, 얼핏 역차별인 듯, 한편으론 공정해 보이는 수시 낙방이었다. 결국 진희는 정시에서 타 대학 영어영문과로 전향하여 붙었다.

그 애는 항상 명랑소녀였는데 “고3 수험생활에서 딱 12kg 쪘어요. 헤헤.” 진희의 말이 생생하다. “도서관에서 집에 오면 매일 12시 넘거든요.” 뒤이어 감칠맛 나는 야무진 설명이 뒤따랐다.

“선생님! 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고 마카로니를 먼저 볶아요. 불 끄고 거기에 치즈 세장을 얹어요, 그럼 끝이에요. 얼마나 맛있게요.”

식구들이 모두 잠든 그 야밤에, 나름 종일토록 고생한 자신에게 기름지고 야무진 하루의 보상을 매일 같이 제공했던 것이다. 비록 살이 포동포동 올랐지만 결코 후회는 없었으리라.


  1. 『유리가면』의 작가 미우치 스즈에는 현재 생존 작가이지만, 연재가 장기 중단된 상태다. 연재가 10년 넘게 멈춰 있는 데다, ‘홍천녀’ 결말을 눈앞에 두고 감감무소식이다 보니 만화계 3대 ‘미완의 전설’처럼 굳어져서 자연스럽게 작가 사망설이 돌기도 했다. 오히려 “작가가 살아있는데도 결말을 안 내주는 영겁의 고통”이라는 점이 독자들에게는 더 지독한 미완의 매력(?)으로 통하기도 한다.

마이티

‘마이티’는 ‘힘센’이라는 뜻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던 카드놀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우누리 시절, 나의 아이디였다.

한살림 조합원 오 년 차.
녹색당원 육 년 차.
생태적지혜 연구소 조합원 이 년 차.

나는 스러지는 불처럼 살고,
흐르는 물처럼 글 쓰며,
상처입은 나무처럼 남고 싶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