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조각모음] ㉖ 탈성장 사회에서 성자(誠者)와 성지자(誠之者)

지금 여기에서 탈성장 사회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규모를 지금의 1/10 정도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탈성장 지향은 어떤 태도 어떤 화법으로 행하여져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과 계산능력

2022년 신승철은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을 하려면 IMF 사태 때의 감축 규모의 두 배를 매년 줄여 나가야 하며, 2030년까지 물질발자국을 1970년대 수준, 즉 현재의 1/10 정도로 맞추어야”1 한다고 하였다. 신승철은 이러한 대응에 따라 지금보다 나아질 세계상에 맞는 이름이 탈성장 사회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신승철은 다음과 같은 경계를 잊지 않았다.

“탈성장 사회는 가난을 신조로 한 도덕주의/영성주의가 장악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도덕주의/영성주의는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탈성장 사회가 이데올로기가 장악한 이념형 사회도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근대적 주체가 그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2

신승철은, 가난을 신조로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이기 때문에, 도덕주의/영성주의가 탈성장 사회를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는 듯하다. 신승철은 가난을 신조로 한 도덕주의/영성주의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가난을 신조로 한 도덕주의/영성주의를 견지함으로써 탈성장 사회로 이행하자고 권하고 독려하는 것은, 탈성장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사람으로서는, 저지르지 말아야 할 폭력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신승철은 탈성장 사회가 이데올로기가 장악한 이념형 사회가 아닐 것이라고 보았고,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근대적 주체가 탈성장 사회를 주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신승철은 이데올로기와 근대적 주체 두 가지를 경계한 것이다. 신승철이 경계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두 흐름으로 압축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으며, 욕망의 추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인간의 계산능력에 주목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인류애[연대가능성]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으면 주장조차 해보기 어려운 사상이 마르크스주의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인류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 분별력은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존재임을 알거나 느끼거나 알고자 하거나 느끼고자 하는 지정의(知情意) 미분(未分) 상태인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미분 상태인 마음의 움직임 속에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계산능력이 섞여있을 여지도 있을 듯하다. 요컨대 계산능력은, 자본주의이든 마르크스주의이든,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근대적 주체의 최소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신승철이 주목한 것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근대적 주체일 듯하다. 자본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그것을 주창하는 근대적 주체는 계산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평가한다고 볼 수 있는데, 신승철은 그런 관점을 가진 근대적 주체가 탈성장 사회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주도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본 듯하다.

몸을 가진 인공지능

사고가 근대화[Modernization]되던 과정에서 영성(靈性)[Spirituality]은 철학 사상 내에서 점차 자리를 잃어가는 듯 하였었다.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이 그러한 영성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정령신앙[애니미즘]은 모든 존재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근대에 철학사가 만들어질 때, 정령신앙[애니미즘]은 철학과 과학이 발생하기 전에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가지게 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만들어냈던 사고방식들 가운데 가장 원시적인 것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흔히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이 나란히 함께 열거되면서도 애니미즘이 가장 원시적인 종교적 사고방식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 이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임에도, 그 변화의 방향을 알지 못하였던, 물적 존재들에, 신격을 부여하여 자연현상을 영(靈)과 생명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물적 존재들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고 세밀하여짐에 따라 점차 영향력이 감소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의 등장과 함께 역전되는 듯하다. 신유물론은 물질을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힘과 생기를 가진 능동적 주체로 보는 사조다. 신유물론은 물질에 에너지가 내재함에 주목하면서 물질을 인간이 다루는 단순한 도구나 원료가 아닌 것으로 본다. 이는 인본주의[인간중심주의]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현실과 연관된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는 인간만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 주목하면서 신유물론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 특히 기계와 같은 인공물도 세상을 만드는 행위자로 자리매김한다. 신유물론은 모든 존재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보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원자론적 사고의 극단화에 대한 반정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신유물론은 물적 존재를 사람이 살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본다. 그리하여 비인간 존재의 힘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삶과 정치를 바꾸려 한다.

외형상 신유물론은 영성주의의 일종이다. 신유물론은 성장주의의 대척점에 서있는 사조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신유물론은 성장주의를 꾸며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몸을 가진 인공지능[Physical AI / Embodied AI]은 신유물론이 사람의 동반자로 보는 비인간 존재면서 성장의 주요 수단이기도 하다. 몸을 가진 인공지능은 가상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 현실 세계를 직접 인식하고 행동한다. 꽤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는 인공지능을 심어놓은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여 자동차를 조립하여왔다. 그 인공지능이 고도화됨에 따라, 그것을 심어놓은 기계를, 사람과 마찬가지인, 행위 주체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몸을 가진 인공지능의 ‘행위’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기계를 도덕적 행위 주체로 보고, 인간과 그런 기계에게 도덕적 책임을 동등하게 지도록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되었다.

신유물론을 지금 여기의 현실과 연관시켜보면,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을 모두에게 권하면서, 그것을 견지함으로써 탈성장 사회로 이행하자고 권하고 독려하는 것은, 신승철이 말한 바와 같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어려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새삼 더 강하게 든다. 신승철이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을 말할 때, 그 바탕에는 성장주의 사회가 가난에 대하여 허용하는 정의와는 다르게 가난을 정의하고 그것을 체화하여야 탈성장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기전환을 모두가 한꺼번에 할 수는 없을 듯하다. 타인들에게 형제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 넌 할 수 있어!” 라고 쉽사리 외치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외침은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타자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빌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신유물론은 몸을 가진 인공지능을 이간 주체와 같은 지평에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였다. 이런 가능성은 몸을 가진 인공지능이 인간 주체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리라는 기대를 부수적으로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계산능력 등 실행력의 여러 면에서 몸을 가진 인공지능과 비교되고 그 비교에서 번번히 열세에 놓이고 있음에도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여가를 획득하였다는 환상에 빠져들기 쉽게 되어간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연결망 서비스[SNS]로 대표되는 정동 자본주의의 대표상품이 이러한 환상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환상은 막상 탈성장 사회로 들어가는 ‘좁은 문’ 앞에 섰을 때 대부분의 인간이 뒤늦게 자신의 ‘준비 부족’을 자각하게 만들 수 있다.

신유물론은 몸을 가진 인공지능을 인간의 동반자로 보는데, 이는 성장주의를 꾸미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영성주의와 같이, 상인은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소박하게 사는 또 하나의 좁은 문을 권한다. 사진출처: Amos K

몸을 가진 인공지능의 일반화는 영성주의를,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공존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비인간 존재가 인간 존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할 수 있는 우회로로 사용할 수도 있다. 몸을 가진 인공지능은 어떤 상인이 돈벌이를 위해 만든 상품이다. 상인은 상품생산 단계에서 일하는 사람과 몸을 가진 인공지능을 동일선상에 놓고 다각도에서 저울질한다. 상인은 이윤의 증대를 위하여 불필요한 상품마저도 소비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조작한다. 이러한 과정은 몸을 가진 인공지능의 고도화와 함께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상인들은 몸을 가진 인공지능을 이해한 자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좁은 문을 만들고 그것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근대적 부유함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약속하는데, 그것이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옷을 입는 경우 그것이 자아내는 단순 소박함은 가난과 구분하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듯하다. 결국 탈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가난을 상인들이 전유(專有)[借用/盜用/appropriation]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은, 너무 좁아서도 문제이고, 비슷한 듯 판이한 좁은 문이 또 생겨서도 문제인 셈이다.

정동 자본주의

이미 19세기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탈근대적(postmodern) 사조들이 고도화되면서, 근대적 주체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킨 능력의 기반이었다고 볼 수 있는 계산 능력을 더욱 섬세한 세계 이해로 넘어가는 것을 어렵게 하는 문턱처럼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외부에서 더 많은 계산을 더 빨리 할 수 있는 외부 연산 장치3가 개발되고 급속도로 개선되면서, 추상적 계산능력에 기반한 세계 이해와 기술(記述) 방식은, 마음의 움직임[정동(情動)/Affect]에 따른 세계 이해와 기술 방식을 추월하고 있는 듯하다. 추월의 징후는 정동 자본주의라고 지칭되는 장사 방식을 주도하는 미국 테크기업들의 활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럽에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등장하여 활동하였을 때, 미국에서는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듀이[John Dewey 1859~1952] 등의 철학자가 연이어 활동하였다. 그들 모두는 2진법에 근거한 형식논리를 통일적 언어로 하는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난 사상을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니체가 정동의 영감을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불어넣었다면, 퍼스·제임스·듀이는 더 섬세해지고 더 현실적이라는 면에서 이전의 형식논리학과 다른 논리체계의 개발을 촉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플랫폼을 벌여놓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정동을 토로(吐露)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하고, 그 정동들을 통제하는 것을 통하여 돈을 버는 정동 자본주의는, 외견상 니체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 보이지만, 그런 자본주의를 존립 가능하게 하는 방법과 기술은 미국 내에서 자급자족 가능하였던 것들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이른바 빅테크 기업들은 대개 미국에서 생겨나고 성장한 것들이다.

빅테크 기업들은 디지털 인프라를 독점하여 나갔는데, 이러한 추세와 그 결과가 중세 봉건제와 유사한 지배 구조를, 디지털 인프라들의 독점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에 재현하고 있는 듯한 추세는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라는 말을 낳았다. 이 말은 개인의 일상생활, 기업의 업무, 국가의 인프라가 특정 빅테크 플랫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국가나 사회가 담당하던 통계, 조정, 관리, 예측 역량이 빅테크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며 공공성이 훼손된다. 판데믹 시기에 카카오톡을 활용하여 예방접종을 관리한 것은 그 작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때 카카오가 이용자에게 지속적인 접속료와 이용료를 요구하였다고 상상해 보면, 이는 공권력도 왕권도 아닌 봉건 영주가 자의적으로 농노를 수탈하는 풍경과 유사하다. 이때 플랫폼은 영지의 중심에 있었다는 교회를 떠올릴 수 있고, 라틴어로 된 성경과 1:1 교환되는 것을 정동 자본주의에서 찾게 하며, 알고리즘과 1:1로 교환될 만한 것이 중세의 영지에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부추긴다.

빅테크 기업은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이윤 추구를 기준으로 네트워크의 공공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는 이미 발생한 일이다. 초국적 자본이기도 한 빅테크 기업들은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민주주의와 심각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팔란티어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업이 국가의 주문을 받아 전쟁과 전투를 기획 통제하는 현상의 저변에는 민주주의와 이윤 추구 사이의 심각한 긴장 관계가 깔려있다.

성자(誠者)와 성지자(誠之者)

정동 자본주의라는 존재양식과 기술봉건주의라는 우화가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이면에서 증식을 멈추지 않고 있는 빅테크 기업의 원초적인 힘은 외부 연산 장치로 상징되는 계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계산능력은 사람[인간 주체]을 몸을 가진 인공지능[비인간 주체]과 동일 평면 위에 놓고 평가할 수 있게 하여주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산능력에 주목할 때, 정동 자본주의와 탈성장 사회 사이의 차이와 거리는 한결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빅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정동 자본주의와 그로부터 파생된 중후 장대 상품들 예컨대 X의 스타링크나 회수되는 발사체를 가진 우주비행체계 등은 사람들에게 이윤과 환상을 제공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들은 현 단계가 처한 한계선 위에 좁은 문을 가설하고 그 안쪽에 미니멀하고 스타일리쉬한 삶이 약속 되어있다는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탈성장 사회로 통하는 지극히 좁은 문인 수축 또는 ‘스스로 가난해짐’이 모두에게 가능한 선택인 듯한 분위기를 유포하고는, 역으로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은유(隱喩)에 미니멀하고 스타일리쉬한 삶의 양식을 끼워 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판매 방식 앞에 인간은 환상 속에서 흥분하였다 좌절하고 곧바로 끼워팔기 상품의 천박한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끼워팔기가 가능하게 하여주는 틈새가 있는 듯한데, 그 틈새는 인간관의 교란에 의하여 가능한 듯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제1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여기에 보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정당화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모든 삶의 ’일회성’이다. 똑같은 삶이 되풀이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산 사람이 죽어 사라지면 삶의 양식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모든 삶은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비루해 보였던 삶의 양식이 언젠가는 인류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하찮아 보이는 삶의 흔적도 소중히 여기게 될 듯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존엄의 다른 근거를 뚜렷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헌법〉과는 달리 〈형법〉은, 인간이 존엄하다고 하지는 않지만, 인간을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가정하여 자유의지에 따른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이는 실제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듯하다. 인간들의 서로 다른 감정, 그들이 처한 환경의 차이, 태생적으로 정하여지는 생체적 특이점의 차이 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가정하는 것은 인간을 이성이라는 나무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한 후 그가 떨어지도록 아래에서 흔들어 대려는 음모라는 비아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가정하면,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그 이면의 빈곤, 학대, 불평등 등 사회구조적 원인과 환경적 제약을 무시하고 오직 개인의 이성적 결단의 미흡함 만을 탓하는 투의 비난이나 처벌을 하게 될 것 같다. “적법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법을 선택했다”는 기조의 판결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신한 위에서 가능한데, 이를 공허하다며 대중이 공분을 느끼는 경우는 허다하다. 더구나 인간이 계산능력을 이성적으로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하고 내린 엄벌은 충동적인 상태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을 효과적으로 예방하지 못하는 듯하다는 의혹도 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고려하고 보면, 존엄이란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헌법상의 인간상은 자기결정권을 지닌 창의적이고 성숙한 개체로서의 국민이다. 우리 국민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자신의 책임 하에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민주적 시민이다” 라는 식의 말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잔인해 보이기까지 할 때가 있다.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는 사상처럼 알려져 있는 유교는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에 대한 확신 위에 서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다음 인용문은 유교의 인간관과 관련하여 살펴볼 만하다.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는 今人이 乍見孺子將入於井하고 皆有怵惕惻隱之心하나니 非所以內(納)交於孺子之父母也며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며 非惡其聲而然也니라

사람들이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에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 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惻隱(측은)해하는 마음을 갖으니, 이것은 어린 아이의 父母(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鄕黨(향당)과 朋友(붕우)들에게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 名聲(명성)을 싫어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4

맹자는 모든 사람에게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더라도 잠깐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도덕적 감수성이 있다고 보았다. 사진 출처: Kindel Media

이 인용문에서 맹자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위험에 처해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모두 예외 없이,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가 우물에 뛰어든다고 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는, 내 일에 너무 바쁜 나머지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위험에 처해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잠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확할 듯하다. 목격 후 바로 자기 볼 일을 보러 가더라도, 스치듯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가져볼 수는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모든 사람이 선한 본성을 발휘하는 도덕성으로 충만한 행동가라고 보지 않은 듯하다. 맹자는, 지극히 가늘고 여리다 하더라도, 도덕적 감수성이, 특정한 몇몇이 아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맹자는 측은해 할 줄 아는 마음이 어짐[인(仁)]이라는 덕의 실마리가 된다고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서 맹자가 대화 상대에게 강조하고자 한 것은 위험에 처한 타인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역경을 무릅쓰는 도덕적 영웅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미약하나마 도덕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키워나갈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맹자의 생각은 『중용』에 보이는 성자(誠者)와 성지자(誠之者)에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중용』 제20장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誠者는 天之道也요 誠之者는 人之道也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여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요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라.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道)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사람의 도(道)이니,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고 도(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알아서 종용(從容)히 도(道)에 맞으니 성인(聖人)이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5

여기에서 우월한 존재는 성실히 하려는 자[성지자(誠之者)]라기보다는 성실한 자[성자(誠者] 임이 명백하다. 글은 성자(誠者)를 성인(聖人)이라고 하였다. 글은 성자(誠者)에게 힘씀[勉(면)]과 생각함[思(사)]을 요구하지 않았다. 글은 성자(誠者)가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맞게[中(중)] 행동하지 못하는 법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성지자(誠之者)에게는 선을 택함[擇善(택선)]과 굳게 잡음[固執(고집)]이라는 순차적 행동방침이 제시되어있다. 이 글은 완성된 존재인 성자(誠者)보다는 미완의 존재인 성지자(誠之者)에 초점을 맞추고 쓰여진 것 같다. 당나라 이후 중국에서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세우고 황제의 예로 공자에게 제향하면서 공자를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라고 칭하였다. 이 칭호에서 크게 이룸[대성(大成)]도 중요하지만 선배이자 스승[선사(先師)]이라고 한 것에도 주목할 만하다. 이에 주목하면, 유교 문화 전통 속에서는 최고의 성자(誠者)·성인(聖人)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도 완성된 상태로 태어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여기에서 몸을 가진 인공지능과 정동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스스로에 대한 환상에 빠지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를 비인간 존재와 같은 지평에 놓으면서 가차없이 대상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몸을 가진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실행력을 인간 존재의 실행력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듯하다. 인간의 계산능력은 나날이 정교해지는 외부 연산 장치의 계산능력 앞에서 좌절조차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장 지향의 문화와 체제는 이러한 경향을 북돋운다.

신승철에 따르면, 탈성장 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은,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바로 그 소수를 앞세우지 않아야 하며, 계산능력으로 귀결되는 이성의 합리성에 사로잡히지 않음으로써, 인간 주체가 몸을 가진 인공지능과 계산능력을 두고 경쟁하기를 자초하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 탈성장 사회를 지향하는 존재들은, 모두의 완전하지 않음과 안정적이지 못함을 서로 관용하고, 완전자가 되기 위해 혹은 완전자처럼 보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것을 조장하는 성장주의를 한갓 음모로 평가절하하면서, 적정한 삶의 규모와 색깔을 선택해 나가는 존재로 자신을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런 존재는 성자(誠者)보다는 성지자(誠之者)를 연상시킨다.

추기(追記): 신승철이 제시한 탈성장 비전과 전략들

앞에서 ‘소수만이 허락된 좁은 문과 계산능력’을 문제삼은 것으로 정리한 2022년의 글6에 신승철은 16개의 탈성장 비전과 전략들을 담아 놓았다. 그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생활양식의 적극적인 재편

(2) 녹색전환의 가시화

(3) 산업 재편 시 협동조합으로 다시 모이기

(4) 돌봄 모듈의 강화와 돌봄의 가치화

(5) 관계 중심의 풍요 모델

(6) 기본소득의 전면화

(7) 농(農) 가치의 실현

(8) 커먼즈 중심의 경제 구조 설립하기

(9) 수직은 수축, 수평은 팽창

(10) 노동에서 정동(affect)으로의 이행

(11) 생태적 지혜의 전면화

(12) 네트워크의 보존과 다이내믹 시스템 구상

(13) 호혜와 증여의 커뮤니티 조직화

(14) 나서는 자가 아닌 판 짜는 자 중심의 양육자 모델

(15) 공생과 공-산(synpoiesis)의 모델

(16) 생태민주주의의 가속화와 시민회의

2022년으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2026년, 이 비전과 전략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직도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인공지능 관련 산업의 폭발적 성장이 기회로 인식되면서, 경제의 금융 자본주의적 부문이 급격한 변동을 겪으며, 지대 추구와 함께, 탈성장 사회를 지향할 여력을 사람들로부터 빼앗고 있다. 사회가 특정한 측면에서는 역진 혹은 퇴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최근 변화를 관조하는 데 있어서 신승철이 제시한 비전과 전략들은 유용한 기준이 되어주는 것 같다. 이들 가운데 하나인 ‘(16) 생태민주주의의 가속화와 시민회의’에서 신승철은 ‘탈성장 전환사회 제헌의회’를 말하였는데, 이 제헌의회는 ‘인공지능이 가져오고 반도체의 생산과 전기 에너지의 대량 공급을 강제하고 있는 산업혁명’의 와중에 공동체의 판을 완전히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여, 관심을 가질 만한 발상 같다.


  1. 신승철, 「탈성장 사회 비전과 전략」,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06-05, 123~149쪽. 이 글은 2022년 봄 모심과살림연구소 생명포럼에서 한 발표를 정리한 것이다.

  2. 위의 책, 124쪽.

  3. 이것은 컴퓨터 본체 외부에 별도의 케이스와 전원장치를 두고 고성능 그래픽 카드를 연결해 그래픽 처리 능력을 높여주는 장치인 eGPU를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단순한 계산기를 의미하였던 컴퓨터에서 시작하여 계속 성능이 개선되고 있는 컴퓨터의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4.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孟子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2,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1, 102~103쪽.

  5. 위의 책, 1991, 93쪽.

  6. 신승철, 『탈성장을 상상하라』, 「탈성장 사회 비전과 전략」, 123~149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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