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면의 흐릿함, 가장자리효과와 생태계

생명, 사물, 인간 간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무수한 영역들이 있다. 경계를 분명히 하는 과학적 시선에서 보자면, 경계의 모호함, 중간현실, 혼합현실이 인간사에 늘 붙어 다닌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 모호한 지점을 해석학자 가다머는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이주체성이라고, 전남대 김상봉 교수는 서로주체성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모호하고 흐릿한 지점들을 없애기 위해서 합리적인 사유방식이나 과학기술의 객관적 진리론은 노력해 왔지만,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모호한 지점과 더 자주 조우한다.

들어가며 : 너와 나의 경계의 모호함, 사이주체성

모호한 얘기가 오갈 때는 난처하고 뭐라 딱히 할 말이 없어질 때도 있다. 특히 기능, 역할, 직분이 딱 떨어지게 나누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묘한 여운이 남는 이야기, “누가 한다는 겁니까?”, “너일 수도 나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고….” 그건 ‘우리 중 어느 누군가’라는 건데, 딱히 ‘누구다’를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애매하다.

이는 너와 나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경계가 없을 때 생기는 일이다. 경계를 분명히 하는 광학적 시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계의 모호함, 중간현실, 혼합현실이 인간사에 늘 붙어 다닌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 모호한 지점을 해석학자 가다머는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이주체성이라고, 전남대 김상봉 교수는 서로주체성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모호하고 흐릿한 지점들을 없애기 위해서 합리적인 사유방식이나 과학기술의 객관적 진리론은 노력해 왔지만, 웬걸 삶을 살다보면 더 모호한 지점이 있다는 점만 드러나는 것이 현실이다.

“너일 수도 나일 수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러한 미션을 부여한 사람들의 경우에 문제는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나서서 하라는 얘기다. 시켜서 하는 일이나 기능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뜻, 지혜, 아이디어를 가지고 직접 할 때, 그 일이 의미가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렇게 나서서 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공동체에서면 문제가 다르다. 공동체는 늘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많고 너와 나 사이를 딱 잘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주체성은 도시문명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공동체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한정된 용어처럼 느껴진다.

광학적 시각(원근법)과 촉지적 시각(채색법) 사이에서

우리에게 응시의 시선이 있다고 하자, 응시는 ‘1인칭 나’와 구분되는 ‘3인칭 나’를 만들어낸다. 나쁜 짓을 하는 나가 있고, 그것을 응시하는 나가 있다. 내가 화를 낼 때 그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나라는 얘기가 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기 이전에 내가 먼저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문제다, 이러한 내부응시의 시각은 우리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자기검열 때문에 힘들어지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논문 한 편 쓰는데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울 때가 많다.

채색법은 “눈으로 어루만지는 듯한 입체적 시각”을 만들어낸다. 광학적 시각처럼 경계가 명암으로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빨갛다가 파랗고 보랏빛이었다가 회색이다. by Anthony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dewdrops-794494/
채색법은 “눈으로 어루만지는 듯한 입체적 시각”을 만들어낸다. 광학적 시각처럼 경계가 명암으로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빨갛다가 파랗고 보랏빛이었다가 회색이다.
사진 출처 : Anthony

시각의 측면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말하는 원근법, 명암법에 따르는 광학적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빛과 어둠의 명확한 이분법에 따라 빛은 선(善)이고, 어둠은 악(惡)이라는 서구의 이원론을 설립했던 광학적 시각이 그것이다. 빛 중심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명암법, 원근법 등의 광학적 시각은 인류문명의 자연스러운 본능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멀리서 바라볼 때 구분이 정확하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접촉할 때 그 경계가 모호하고 다양한 색채의 자취들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점이 드러날 때가 많다는 점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모호한 경계에 있는 색채의 향연을 말한다. 이른바 채색법이다. 채색법은 “눈으로 어루만지는 듯한 입체적 시각”을 만들어낸다. 광학적 시각처럼 경계가 명암으로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빨갛다가 파랗고 보랏빛이었다가 회색이다. 그 색채는 오색찬연하게 뒤섞여서 그 경계지대에 하나의 모호함이 만드는 향연과 축제를 만들어낸다. 물론 미술에 있어서 광학적 시각과 촉지적 시각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명암법, 원근법과 함께 채색법이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빛 중심주의는 색채의 향연에 의해서 비로소 미학(美學)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색채적인 것은 생명에게 더 어울리는 시각이지 않을까?

커먼즈(Commons)의 두 가지 양상

커먼즈는 공유재, 공유지, 공유자산을 뜻한다. 너와 나 사이에서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혼합현실이 공통의 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모호하고 흐릿한 중간현실, 혼합현실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 섞이고 서로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참견하고 개입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프라이버시(privacy)가 중심이 된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커먼즈는 달갑지 않다. 뭔가 내 것 네 것, 내 영역 네 영역이 딱 나누어져야 할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 도시문명의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문을 열고 불쑥 등장하는 이웃이 있다면 도시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와 너는 경계가 분명한데, 둘 사이에 강한 상호작용, 즉 인터렉션(interaction)이 강렬도를 더해서 공통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이다. 이 경우에는 광학적인 시각에 기반하고 있지만 색채적인 시각을 지향하는 ‘따로 또 같이’ 방식의 최근의 공동체의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커먼즈가 생기는 것이 기존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이웃과 친구와 같이 밥 먹고, 놀고, 생활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커먼즈라는 중간현실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개인주의, 사생활이 중시되는 현실에서는 너와 나의 구분이 비교적 명료하면서도 동시에 공유지, 공동체, 공유자산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 있을 수 있다. 프라이버시는 지키면서도 더불어 할 것, 연대의 관계를 만들자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광학적 시각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개인주의의 습속을 노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가장자리효과와 생태계

생태학에서는 중간현실, 혼합현실과 같이 희미하고 모호한 경계지점이 오히려 생명탄생의 원천이 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른바 가장자리효과(edge effect)라는 것이다. 산과 들, 바다와 육지, 들과 하천 사이의 경계지점에서 바람과 물의 차이나는 반복, 비스듬한 운동의 반복이 생명탄생을 잉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자리는 주변부로서의 취약한 영역이 아니라, 강렬한 에너지의 흐름이 감도는 영역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주변부에 대한 생각도 재편된다. 기존에 가장자리에 있는 주변인, 양적 소수, 사회적 약자를 말할 때 마이너(minor)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주변인적 시선이 아니라, 강렬한 욕망과 사랑, 돌봄의 흐름이 관통하는 특이점(singularity)으로서의 소수자(minority)라는 개념이 가장자리효과에 어울리는 개념이다. 소수자는 감초나 효소, 촉매제와 같아서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특이한 존재들이다.

더불어 소수자는 특이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강건하게 자신의 자리, 위치, 배치를 만들어낼 욕망과 사랑의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구성원 중 한분이 생태철학 세미나 자리에서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데리고 온 경우가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세미나 진행은 상당히 어려웠지만 나름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덧 가장자리에 있는 아이의 강렬도에 모두 감응하고 있었고, 세미나는 어쩐지 어수선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 찾고자 세미나를 하는 이유를 바로 아이가 현실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세미나는 왠지 풍성하고 풍부했다.

피터싱어와 가장자리 상황논증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유인원계획》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를 연결하는 경계지점에 유인원이 있으며, 동물실험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먼저 유인원에 대한 실험부터 없애자는 프로젝트였다. 이 때 가장자리 상황 논증이 선보였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자리에 유인원이 있으며, 유인원은 IQ라는 척도로 보자면 6살 지능을 가진 아이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명확히 구분되며, 인간이 동물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던 문명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은 경계가 모호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호르크하이머가 이끌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 독일사회에서 나치라는 파시즘이 발호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묻는 프로젝트를 한 바 있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의 결과는 놀랍게도 생명과 자연을 도구화하는 것 즉 도구적 이성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 말해 생명을 도구화하면 신체로 연결된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서 인간을 도구화하는 것으로 향하고, 결국 노동자를 착취하고, 소수자를 차별하고, 이주민을 혐오하고, 장애인을 분리하는 행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자리 상황논증은 코로나 19사태를 일으켰던 바이러스에게도 해당된다. 바이러스는 생명처럼 복제하지만, 신진대사가 없다는 점에서 사물성조차도 갖고 있다. 즉, 생명과 사물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바이러스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바이러스가 생명인지 사물인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하며 논쟁을 끌어갔지만, 생명과 사물 사이에 중간현실, 혼합현실로서의 바이러스가 있다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생명, 사물, 인간 간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무수한 영역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나오며 : 혼재면(plan of consistence)과 빛의 마술로서의 색채의 향연

공동체와 마주치면 혼돈이 찾아온다. 서로 딴소리를 하면서도 놀랍게도 서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사랑이야기를 하다가, 이웃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묘하게 공감대가 형성되어 서로의 말에 대해서 이해한다. 이것을 일관성의 구도, 혹은 혼재면(混在面)이라고 한다. 너와 나의 모호한 지점은 칵테일이 섞이듯 크림이 뒤섞이듯 카오스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 카오스는 정서적/심리적 공감대를 저변에 깔고 그 위에서 뛰어노는 색채의 향연이다. 공동체에서는 빛이 마술이 되어 수많은 색채의 프리즘으로 전개된다. 그런 점에서 그 다양한 색채의 향연을 만드는 광학회라는 하나의 연구공동체가 중요한 점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광학회 2021년 4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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