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장으로의 문명의 전환, 생태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의 전략지도] ➁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

이 글은 바야흐로 저성장, 역성장, 탈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협동조합이 어떤 대응과 적응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지 그 전략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성장을 몰적인 것으로, 저성장을 분자적인 것으로, 제로성장을 원자적인 것으로, 역성장을 양자적인 것으로 보는 초극미세전략의 일부이다. 여기서 몰은 집중성으로, 분자는 유한성으로, 원자는 순환성으로, 양자는 확률성에 대당(對當)된다는 이론적 가추법(abduction)을 적용해 보았다. 이 글은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주관으로 2019년도에 수행된 연구과제 결과물이며, 원문을 나누어 총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

  1. 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성장의 블랙홀(몰mole : 집중과 수렴의 단계)
  2. 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지속가능한 발전전략(분자molecular : 유한성과 특이성의 단계)
  3. 제로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내발적 발전전략(원자atom : 순환성의 단계)
  4. 역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질서 있는 감축전략(양자quantum : 경우의 수의 초미세전략)

(2) 저성장 시기의 민주주의_지속가능한 발전전략(분자molecular : 유한성과 특이성의 단계)

성장의 한계, 한계테제의 등장

자연과 생명, 제3세계 등이 외부로서 무한히 펼쳐져 있지 않으며 유한하다. 위키피디아 ‘상아거래’ 항목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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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생명, 제3세계 등이 외부로서 무한히 펼쳐져 있지 않으며 유한하다. 위키피디아 ‘상아거래’ 항목 자료사진.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보고서 이후 지구와 자연의 유한성이 제도와 정책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성장의 폭주기관차가 멈추지 않는 상황에서 마치 간주곡과 같이 석유파동이 있었고, 이에 따라 ‘석유가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생겨났다. 더불어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생물 종 멸종에 대한 경각심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자연과 생명, 제3세계 등이 외부로서 무한히 펼쳐져 있지 않으며 유한하다는 깨달음은, 이내 우주 진출이라는 상당히 허황한 꿈으로 향하게 만든 이유가 되기도 했다. 성장의 한계는 바로 지구의 한계, 생명의 한계, 자연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우주까지 뻗어나갈 기세였던 자본의 걸림돌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였다. 유한성 테제는 모든 것에 끝, 폐지,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당시 풍미했던 실존주의적 맥락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끝이 있다는 것 즉 유한함에 대한 실존적 불안은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는 반증이며, 저성장 시대의 삶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970년대 제르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엔트로피』라는 책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열역학 1법칙과 같은 에너지보존법칙이 아닌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하는 열역학 2법칙을 엔트로피의 법칙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그는 인류가 지구에 발자취를 많이 남길수록 지구환경과 자원,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질서나 회복 불가능하거나 재생 불가능한 상태로 바뀌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수렵채취 시기의 행복했던 시절이 끝나고 인구가 늘자 농업사회라는 고된 노동집약적 사회로 이행한다. 동시에 농업사회가 끝나자 인간이 기계에 포위되어 삶을 상실한 산업사회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행의 이유는 바로 목재자원의 부족을 타계하기 위한 석탄의 사용, 곧이어 석유의 사용 등과 같은 에너지전환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더 이상 사용할 자원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변환 과정에서 지극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에너지 자원을 찾게 되는 것이고, 무질서 즉 엔트로피가 증대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제안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모든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던 발상주의나 모델화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던진 메시지는 자원, 에너지, 부를 만들었던 생명과 자연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자원, 부, 에너지, 화폐가 유한하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어떤 성장주의자는 나눌 파이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자원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를 다시 키워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은 일종의 궤변에 불과하다. 어떤 성장주의자들은 기술발전에 따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한 에너지원이 발견될 것이고, 환경위기와 기후변화도 극복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얘기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그러한 낙관에도 불구하고 첨단 기술은 인간을 뺄셈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인간 종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우니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관점이 낙관적인 전망 내부에서도 대두된다. 즉 기술이 인간에게 해택을 주는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멸종까지도 말하는 무시무시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결국 자원, 부, 에너지가 유한한 시대에는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복지와 같은 실효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특히 최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물론, 동시에 자본이나 기술이 인간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이미 도래한 실정이다. 그래서 최근 기본소득 논쟁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소비자들을 만들어내고 사회안전망, 복지, 사회인프라 등과 같은 공공책임을 개인책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기본소득을 입법화하고 현실적인 제도로 만들려고 한다. 이를 테면 북유럽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국민투표까지 가고도 결국 채택되지 않은 것은, 사회안전망과 복지 등의 공공지출을 축소하고 기본소득을 통해 사회책임을 개인책임으로 만들겠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유한한 자원, 부, 에너지의 상황에 직면한 저성장 시대에 공공정책은 후퇴되어서는 안되며, 다양한 정책 중 하나로 기본소득이 채택되어야지 모든 것을 기본소득 하나로 환원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갖고 있는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 국가, 공동체의 협치가 매우 중요한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본소득은 저성장 시대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성공을 위해서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좌절과 포기, 멘탈붕괴에 처해 있다. 오히려 저성장 시대는 지속가능성에 따라 일자리와 소득, 생활형태 등이 설계되어야 할 상황인 것이다.

분자적인 단계 : 유한성, 특이성, 사건성의 단계

분자(molecular)는 속성을 갖는 최소단위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는 원자이지만, 원자만으로 어떤 물질인지 속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자의 배열과 배치에 따라 제각각 다른 속성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같은 원자라 하더라도 배열과 배치의 재조정만으로도 속성은 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속성을 갖는 최소단위로서의 새로운 분자의 출현이다. 즉 분자적인 것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고 특이하고 사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구에서 가장 흔한 탄소 원자의 경우에는 분자적인 수준에서의 배열과 배치에 따라 흑연이 될 수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 역시도 탄소가 만들어낸 분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한성, 특이성, 사건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 분자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행하며 횡단하고 변이할 가능성을 가진 물질단위라고 할 수 있다. 분자단위의 변이와 이행은 열을 가하거나 물리적 충격을 가하거나 효소와 촉매제를 첨가하거나 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속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자연생태계 내에서의 탄소분자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탄소분자는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본질 면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작동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다양한 분자구조가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는 자연생태계에서는 변이가 수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실험실모델을 적용한 탄소고정술이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기각된다. 그런데 탄소분자의 분자적인 속성은 문제해결의 단서를 갖고 있다. 이를 테면 태양이 기후변화를 심화시키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해결책이 될 수 있듯이 말이다.

저성장 시대에는 욕망, 정동, 사랑 등을 통해서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증폭한 상태의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이 주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https://pxhere.com/ko/photo/576084
저성장 시대에는 욕망, 정동, 사랑 등을 통해서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증폭한 상태의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이 주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pxhere

탄소분자가 분자적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때 ‘분자적’은 어떤 작동을 보일까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의 일상에서 분자적인 특징을 보이는 것은 바로 욕망, 정동, 사랑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의미와 모델에 수렴되고 집중하는 것을 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여러 모델과 여러 의미를 횡단하고 이행하고 변이하는 것을 분자적인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몰적인 것을 ‘의미와 일 모델’로, 분자적인 것을 ‘재미와 놀이 모델’로 부르기도 한다.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여 분자적인 속성을 보이는 욕망이 갖는 의미는 공동체와 사회에게는 생명에너지와 활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욕망 없이 저성장 시대의 행복을 약속하기 어려우며, 의기소침, 집단적인 우울증, 무위, 전망상실과 같은 사회현상은 바로 욕망을 제거하거나 욕망이 소진된 상태에서 나타나기 쉽다. 흔히 성장의 동력이 극도로 낮아진 상황에서 한 눈 팔지 말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히려 저성장 시대에는 욕망, 정동, 사랑 등을 통해서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증폭한 상태의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이 주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흔히 과도한 욕망이 문제라고들 한다. 여기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을 분자적인 욕망을 동원해서 몰적인 상품소비로 집중시키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욕망이 결국에는 상품소비로 귀결되는 방식, 즉 탈영토화 이후에 반드시 재구조화가 따르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라는 욕망의 탈주선을 구상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몰적인 상품소비로 귀결되지 않는 욕망의 탈주선이 그것이다. 소비향유로 향하지 않는 분자적인 욕망을 활성화하는 것이 저성장 시대에 대한 처방일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분자적 욕망의 전면화는 사회형태를 심원하게 바꾸어나갈 것이다. 특이성, 사건성, 유한성이 전면에 나설 때, 똑딱거리는 일상과 비루한 미디어생활, 수동적인 문화향유 등의 통속적인 문명에 붙잡혔던 사람들이 드디어 예술창조, 주체성 생산, 분자혁명의 순간으로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유일무이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창안하여 스스로 색다른 생활세계(=둘레환경)를 구성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지평을 의미한다. 자신의 한계와 끝을 응시한 사람들은 ‘실존주의를 넘어선 실존’을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유한성, 한계, 끝 등의 실존을 깨달은 사람들이 마을, 협동조합, 공동체의 판을 까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성장주의 시대와 같이 전문가나 대답을 알고 있다는 방식의 통속적인 유형의 전문가주의는 기각되고, 저성장 시대에서 실존이 던지는 질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영구적인 아마추어리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저성장 시대의 사회상은 무차별 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대중(mass)사회가 아닌 간(間)공동체로서의 사회를 특징으로 하면서 해체적 재구성에 따라 형상화되는 다중(multitude)의 사회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분자적인 것에 따라 영구적으로 위치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초연결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네트워크와 공동체에서의 분자적인 수준의 작은 변화가 전체 메타네트워크에 심원한 변화를 가하는 분자혁명이 격렬히 지속될 것이다. 저성장 시대의 영구적인 혁명은 분자혁명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과 발전 차이

부수고 건물을 세우고 삽질을 하던 성장주의 시대가 종결되면서, 자연과 생명, 공동체의 입장에 선 대안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활발하지만 이렇다 할 답안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래된 인류의 경험과 지혜들이 참조점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발전전략의 역사는 매우 선명하고 유효하다.

미국은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간인 보호 단체를 설립하여 공공 토지, 산림 및 공원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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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간인 보호 단체를 설립하여 공공 토지, 산림 및 공원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사진 출처 : National Park Service (NPS)

발전전략은 성장이 아닌 성숙의 경제로도 불려 왔다. 그리고 발전전략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역사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 먼저 우파 발전전략의 효시는 바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다. 뉴딜정책은 미국의 대공황 시기동안 일자리와 소득, 사회재건 등을 위해 실효성 있는 공공정책과 재정지출, 일자리 만들기, 노동조합과의 협조주의 등 제 할 일을 하는 국가를 만들어낸 인류사적인 사건이다. 그 사상적 토대는 케인즈인데, 그는 자본주의를 내부상점 모델로 봄으로써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유효수요를 진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의 소득이 높아져야 하고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즈 이론에 따른 뉴딜정책으로 인해 미국사회는 다시 재건될 수 있었다. 뉴딜정책이라는 발전 전략은 당시 위기 상황을 돌파하면서 만들어진 실효성 있고 유능한 해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좌파 발전전략의 효시는 혁명가 레닌이었다. 그는 초기에 자본주의단계인 민주주의 혁명을 거친 다음에야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성장주의적인 2단계 혁명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레닌은 불현듯 당시 러시아 내부의 소비에트라는 관계망이 고도로 성숙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섬광과 같이 발전전략을 발견한다. 그리고 급기야 4월 테제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외치여 소비에트 혁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혁명을 성공시킨 다음 그의 행보가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즉 발전전략을 버리고 NEP(New Economic Policy:신경제정책)라는 성장주의로 다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통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닌을 향해 발전전략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외쳤던 크론슈타트수병들의 반란을 무참하게 진압해 버렸다. 당시 레닌의 충복이자 행동대장이었던 트로츠키의 군대를 통해서 말이다. 그 이후 러시아혁명의 역사는 스탈린주의라는 성장주의에 기반한 국가사회주의를 향해 수렴되고 발전전략의 섬광과 같은 역사적 기억은 사라진다.

성장(growths)은 양적이고, 실물적이고, 외양적이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에서 성장 시기에 있었던 새마을운동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지붕개량사업이며, 시설물 건축이며, 사회의 양적 척도에 의한 계량화와 통계수치 등에 따라 마을이 만들어졌던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반면 발전(development)은 질적이고, 관여적이고, 내포적이다. 2010년 이후 발아한 마을만들기 운동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미산마을 등의 마을운동은 정성적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성숙시킴으로써 작동하는 발전의 모델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외롭고 고독한 도시민의 생활 속에서 관계망을 복원하고 창안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며,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등이 마을의 판 위에 설립되어 관계의 성숙에 따른 경제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발전전략은 제 3세계 원조와 개발의 이데올로기로 오해되기도 한다. C. 더글러스 러미드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2, 녹색평론사)에 따르면 발전하다(develope)는 envelop(봉투로 싸매다)의 반댓말로 ‘꽃망울이 터지듯 발아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발전한다는 것은 자동사로, 선진국이 제 3세계에게 전달하는 ‘발전시키다’라는 타동사의 이데올로기와는 궤도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이들이 스스로 자라는지, 아니면 부모에 의해 키워지는지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러미드는 선진국의 제 3세계에 대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발전을 버리고 대항발전으로 향하자고 일갈한다. 물론 발전전략이 개발과 원조, 약탈의 이데올로기로 차용된 역사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의 개념의 내용은 차이가 분명하다. 아무래도 선진국에 의해 주창된 발전이데올로기는 성숙의 경제가 아닌 성장의 경제의 아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녹색에도 가짜녹색이 있듯이 발전에도 가짜발전이 있는 셈이다.

발전전략은 자본주의적인 진보의 노선 즉 성장의 노선처럼 시간이 지나가면 새로운 혁신과 유행, 상품, 기술 등이 무한히 생산될 것이라는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유한성을 기반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여기서 성장 노선의 대표적인 사상가가 헤겔이라면, 발전 노선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스피노자이다. 헤겔은 정/반/합의 모순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변증법을 주장한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의 ‘유한자의 무한으로의 이행’이라는 구절을 무척 탐을 내서 신체변용을 거치지 않고도 관념의 자기운동에 따라 무한으로 진입하는 절대이성의 단계를 상상한다. 즉, 골방 철학자가 사유의 실험으로도 우주와 세계를 완성해낼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흉내 낸 헤겔의 변신론은 근대의 국가주의 철학의 기반이 되는데 바로 성장 이데올로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신론은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인간이 만든 국가에서 찾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다채로운 유한자들이 접촉, 신체변용, 접속 등을 통해서만 무한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다. 헤겔이 국가와 자본의 성장이라면 스피노자는 공동체의 발전의 가능성을 응시하는데, 그 이유는 유한자의 신체변용과 사랑이라는 관계의 성숙 과정, 연결접속의 무한성에 스피노자 사상이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생각은 다중(multitude)의 사유이자 공동체의 판과 구도에 대한 아이디어이다. 즉, 공동체는 ‘유한자의 무한결속’에 따라 비로소 무한성에 진입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성숙의 경제, 다시 말해 발전전략의 아이디어를 온전히 담고 있다. 이러한 스피노자는 발전전략을 응시한 미래진행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의 유한자의 무한결속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의 판과 구도가 성숙되면 발전의 경제가 작동한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을까?

저성장 시대의 행복의 문제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의 문제를 생각할 때, 소득이나 부의 분배, 일자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의 문제에 있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가 그것이다. 행복의 척도는 미래나 과거에 있지 않고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삶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사로잡혀 우울해지고, 미래에 불안해지기 쉽다. 그런 삶의 유형은 현재를 온전히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바로 지금-여기에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강한 상호작용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가까울수록 간섭과 참견이 많을 것만 같고, 서로를 뻔하게 보기 일쑤인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 철학자 쥘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노마드라는 주체성을 『천개의 고원』(2002, 새물결)에서 언급한다. 노마드는 유목민인데, 유목민이라고 하면 전 세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떠돌이를 생각하기 쉽다. 물론 자신의 비루한 일상, 뻔한 반복을 멈추기 위해서 여행을 통해 도주선을 그려낼 수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지적 절대성’이 바로 노마드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국지적 절대성은 바로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친구와 이웃, 가족들의 새로운 면모를 재발견함으로써 늘 새롭게 관계망을 혁신하는 것이다. 문명의 똑딱거리는 일상에 사로잡혀 서로의 잠재성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공동체에서 춤꾼도 되고 이야기꾼도 되고 가수도 되는 등 특이성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성장 시대의 행복의 척도는 공동체의 재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저성장 시대의 행복의 또 하나의 척도는 바로 정동의 소외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 달려 있다. 정동은 바로 사랑이며 욕망이지만, 삶을 구성해내는 돌봄, 살림, 보살핌, 섬김, 모심 등과 같은 영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무리 돈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자신의 삶과 주변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소득이 적어지는 상황이 도래하면 정동과 돌봄의 문제는 더욱더 중요해진다. 정동의 소외 양상은 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와 감정생활, 무의식생활, 내면생활을 미디어에 맡김으로써 정동의 중요성을 망각하는 것, 젠더 불평등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 등에 영향을 받아 전면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피노자는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감정과 자기원인이 분명한 정동을 구분한다. 그 자기원인은 사랑의 자기원인이다. 저성장 시대에서는 가족, 공동체, 사회, 인간까지도 정동이라는 구성적 실천 없이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섬세한 노력과 실천, 활동력 등을 가지고 나서야 재건되고 구성되는 것이 공동체고 가족이고 인간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행복의 척도이며, 나와 우리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저성장 시대 행복의 척도 중 하나는 범위한정기술과 관련되어 있다. 저성장 시대는 자신의 신체변용, 접촉, 접속 등이 가능한 제한된 생활세계, 둘레환경, 삶의 내재성, 영토 등을 구성해낼 필요가 있다. 첨단기술사회에서 정보의 홍수에 빠져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영토를 분명히 하면서 정보 값을 낮추고 범위를 제한할 필요성이 있다. 동물들은 범위한정기술을 통해서 내부 영토를 형성하고 외부자연과 선택적으로 관계한다. 이를 통해서 생활하고 활동할 수 있는 부드러운 현실을 재구성한다. 칼 포퍼(Karl Popper)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2006, 민음사)를 쓸 때만 하더라도 민주사회의 기준은 토론과 반증에 대해서 열린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무조건 열려 있다고 해서 선(善)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과 신체변용, 욕망 등에 따라 재구성된 일정하게 닫힌 영토가 행복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성장 시대는 공동체의 재건이 매우 중요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폐쇄사회, 분리주의, 고립주의라는 파시즘 사회로 향하는 극단주의의 경향을 옹호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적절한 수준에서 열리고 닫힐 수 있는 미시정치가 중요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성장 시대의 개막은 행복의 척도를 바꾼 일대 사건이며, 이러한 이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개인이나 집단의 우여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속가능성과 미래세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의 욕구를 사고하는 역행적 시간관을 드러내면서 자본주의적 진보주의의 선형적인 시간관과 대비된다. 생태학자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은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국제사회에 아젠다로 제출하였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뜨거웠다. 급기야 지속가능한 발전이 UN 세계환경개발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그 위원회의 리더인 할렘 브룬틀란의 이름을 따 『브루틀란트 보고서』라고 지칭된 문건에서 바로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전면을 장식한다. 이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 세대가 니즈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니즈에 맞추는 발전이다.”1(Brundtland 1987, 41)라고 요약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최근의 비판은 매섭고 따갑다, 지구환경이 버텨낼 수 있는 경제규모가 지금의 1/10이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조차도 무책임한 성장주의의 연장이라는 비판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역성장에 따라 엄청난 규모의 감축과 감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현재 수준의 경제규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업일수록 오히려 지속가능 경영을 전면에 내걸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혹자는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발전은 발전전략 중 하나로 지구, 국가, 사회, 공동체, 기업, 협동조합, 시민사회 등을 아우르는 메타개념으로서의 위상을 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거대계획, 거대프로그램만으로 미세한 정책과 제도, 생활세계 등을 모두 책임지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미래세대의 권리를 말하고 있는 부분은 현존 문명처럼 미래의 구매력이나 미래 자원을 당겨쓰고 있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일 수 있다. 이를 테면 이자는 미래의 구매력을 보증하는 것이며, 미래를 끌어다 현재에 흥청망청 쓰는 부채사회를 설립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현존 자본주의 문명처럼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도 없을 것이다. 암울한 미래의 전망을 망각하기 위해서인지 그저 욜로(YOLO : You Only Live Once)족처럼 현재를 흥청망청 즐기는 것에 머물러 있다. 수많은 쓰레기들, 일회용품, 갈수록 많아지는 주류와 육류소비 등이 그것의 반증이다. 하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에 대한 권리까지 생각하는 제도와 정책은 전무하다시피하다. 작은 단서는 독일헌법의 부칙에 있다. 독일헌법 제 20a조에는 「자연적 생활기반의 보호」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다. “국가는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으로서 헌법질서의 범위 내에서 입법에 의거하거나 법률과 규범에 따른 행정과 판결을 통하여 자연적 생활기반을 보호한다”는 내용이다.2 이는 헌법의 부칙을 통해서 자연권, 생명권, 미래세대의 권리 등을 한꺼번에 아우르며 정당한 권리로서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세대의 권리를 통해서 미래로부터 역행해 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자원-부-에너지가 유한하고, 지구가 유한하고, 생명과 자연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세대를 걱정하며, 엄청난 규모의 감축과 감쇄를 단행하는 데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게 된다면 지속가능한 발전의 본래 의미도 빛을 발할 것이다.

특히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의 2/3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실 도시의 농촌에 대한 수탈구조는 잘 알려져 왔지만, 도시의 역사와 기능, 역할 등에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주목되지 않고 있다. 최초의 근세 자유도시는 도제조합의 연합체에 의해서 관장되고 있었으며,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무역과 마을장터를 가로막는 일종의 장벽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도시 내의 시설물, 관공서, 병원, 학교, 가게 등이 복잡하게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면서 다양하게 교직하면서 시너지효과를 낸다. 이것이 도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역사적인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문명은 이러한 도시의 복잡성을 점차 단순화하기 시작하며, 회복탄력성을 조성하던 특이하고 복잡하고 다양하던 경우의 수를 내쫓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에 따라 비슷비슷한 도시생활이 만들어지고 이는 특히 도시가 위기에 단번에 무너질 수 있는 단조롭고 취약한 구조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도시농업, 로컬푸드, 프리마켓, 협동조합, 마을공동체운동, 사회적 경제 등은 도시의 회복탄력성을 재건할 특이점으로 작동할 과제를 안고 있다. 더불어 도시의 지속가능성의 가능성은 공공사회인프라의 확충과도 관련된다. 현재의 기후변화와 생명 위기 상황이 계속된다면 2100년에는 물, 가스, 전기 등 공공인프라를 이용하면서 사는 사람이 전 세계 인구 중 10%에 불과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 이는 도시의 지속가능성 특히 제 3세계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조사, 참여관찰, 기록지, 생태역학조사 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결국 저성장 시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재생 불가능하고 유한한 자원에 대한 보존과 미래세대의 권리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발전이 미시적인 삶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거대계획, 거대프로그램에 머물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저성장 시대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제도와 관계망의 변화양상에 대한 사회역학적인 연구와 생활세계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협치의 전면화 : 국가, 시장, 사회의 교직

과거 성장주의 시절에는 국가의 무능과 부패, 관료주의 등을 비판하는 것이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다면, 이제 ‘국가가 거기에 없었다’는 절규와 아우성 속에서 이른바 ‘생명위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성장주의 시대처럼 관리형 국가의 형태로 ‘그대로 놔두면 저절로 잘 되던 시대’는 끝났다. 공동체, 시민사회, 협동조합, 일자리, 기업 등도 촉매하고 돌보고 서로가 협력해야 겨우 버티거나 현상 유지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와 지자체의 각급 기관들의 행정 및 정치유형이 민관협치(governance)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현 시점에서 더 이상 협치 없이는 국제사회, 국가, 시민사회, 기업, 공동체 등은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제사회의 경우에도 국제기구와 각 국가, 기업, NGO 등의 협치를 통해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집행하고 있다. 협치는 관치와 달리 국가주도형도 아니고, 통치와 달리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늘날의 협치는 구성적이고 재건적 임무를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이후 국제사회와 주권국가 등은 상당한 부분이 와해되고 해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국제사회가 직면한 기후변화와 저성장 시대의 개막, 생명 위기 시대의 개막은 협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대응할 수조차 없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생명위기 시대의 협치는 각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협력해서 공동체와 시장, 국가, 국제사회 등을 굴러가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협치의 전면화는 결국 막대한 위기가 바로 인류의 코앞에 와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협치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서 니클라스 루만의 시스템 형태의 협치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루만의 『체계이론입문』(2014, 새물결)에 따르면, 시스템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먼저 적극적 피드백을 통해서 ‘차이를 낳는 차이’를 조성한 시스템이 있다. 그것은 협치를 이룬 다양성이 다시 한 번 색다른 차이를 발생시킴으로써 위기에 강한 협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적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1차적인 차이는 다양성의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2차적 차이인 색다른 대안으로서의 특이점을 만들 토양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협치는 다양성과 차이의 생태계로서 작동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소극적 피드백의 시스템도 있다. 소극적 피드백은 차이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중앙이나 센터에서 조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은 관료주의, 즉 관치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루만 이론을 적용한 시스템에 의한 협치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공백을 갖는다. 다시 말해 ‘주체성 생산’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협치를 그저 시스템의 부수효과나 기능연관으로만 처리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만의 시스템이론은 협치의 판을 짤 때 참조할 여지를 풍부하게 던져준다.

협치 모델을 설명한 경제학이론으로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2009, 길)에서 언급된 국가, 시장, 사회의 삼원 구도가 있다. 여기서 국가는 ‘모아서 나누는 것’ 즉 세금을 걷어 복지로 나누는 재분배의 역할을 한다. 또한 시장은 ‘상품을 사고파는 것’ 즉 교환의 역할을 한다. 또한 사회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 즉 대칭적이고 급부적인 호혜적 관계망을 구축한다. 협치의 세 주체는 국가, 시장, 사회(=간(間)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가나 시장이나 사회나 제 역할을 해야 하며, 공공영역이 받쳐주고 시장영역이 지원하고 사회영역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저성장 시대, 생명위기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 빠져서는 해낼 수 없는 것이 위기의 성격이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 시장이 탄소시장으로, 국가가 탄소세로, 사회가 탄소순환으로, 도시가 탄소중립으로 대응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폴라니의 삼원 구도는 협치의 판을 짤 때 아이디어를 주며, 지속가능성한 사회 재건을 위한 협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협치에서는 정부도, 시민도, 시장도, 누구도 컨트롤 타워라고 자임할 수 없다. 또한 국가만능주의나 시장만능주의는 심각하게 경계되어야 할 움직임이다. 재건과 구성적 협치를 기본구도로 하지 않고서는 생명위기 시대이자 저성장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1. 제프리삭스, 『지속가능한 발전의 시대』 홍성완 역, (2015, 21세기북스) p28 재인용

  2. http://cafe.naver.com/hiig.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09& 참고

이 글은 모심과 살림연구소 『생명을 살리는 전환』 연구과제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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