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을 읽고

집 근처 작은 공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식물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 시간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식물들이 서로 예의를 지키며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앞으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도시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공원에 있는 식물들의 이름을 생각하며 공원을 걷는다.

이동고 저,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 (학이사, 2021년)
이동고 저,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 (학이사, 2021년)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집 근처 작은 공원에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작은 시간이 시작된다. 집 근처 작은 공원. 느리게 걸음을 옮기시는 분. 멋진 운동복과 넓은 챙모자로 멋을 부린 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시는 분들. 열심히 뭔가를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분. 다양한 분들이 공원의 자연 속으로 그 짧은 시간에 지나가셨다. 그들과 함께 여름의 마지막 푸름을 간직한 공원에서 내 일상의 오전도 시작되었다.

아직 여름의 푸름이 남은 공원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만든 산책로는 매시간 그 모습이 바뀐다. 어떤 때는 빠르게 어떤 때는 느리게, 그들의 변화를 자세히 보려면 내가 천천히 그들과 눈을 맞추며 걸어야 한다. 이동고 님의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 책에서처럼 그들이 보여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힘들게 피워내는 맥문동 꽃을 보며 괜히 힘내라고 응원을 해본다. 사진제공 : 다랑
힘들게 피워내는 맥문동 꽃을 보며 괜히 힘내라고 응원을 해본다. 사진제공 : 다랑

며칠의 비가 지나간 길옆으로 맥문동의 꽃이 보랏빛을 보이며 자신을 내어 보였다. 지난 여름 언제 저 모습이 바뀔까? 궁금했었는데 며칠 못 본 사이 자랑하듯 잎 사이로 올망졸망 매달린 자신을 보인 것이다. 이 공원에서 나무 밑이나 화단 빈 공간에 많이 심는 맥문동은 꽃이 많이 피지 않는다. 아이들 학교 화단에 거대하게 뭉쳐 피어있는 그 장관이 이 공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우거진 나무 아래여서일까. 힘들게 피워내는 꽃을 보며 괜히 힘내라고 응원을 해본다.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에서 꽃에 대한 글을 보면 꽃은 자연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며, 그 아름다움과 재생,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매천(梅泉) 황현과 헤르만 헤세의 찬미를 통해, 신라의 금관을 보며, 그 기능과 쓸모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더라도 힘들게 피워낸 작은 꽃들이 그 자체로 예쁜 것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피워내는 힘듦이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열매를 맺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우리의 모습과 참 닮아있다.

산책로 시작하는 곳에서 조금 들어가면 왼쪽으로 하얀 겹꽃이 피는 무궁화 나무가 한그루 있다. 너무 가냘퍼서 어떻게 서 있을까 항상 안쓰러운 작은 나무다.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에서 만난 무궁화 사진은 많은 꽃과 넓은 가지가 무척 부러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중심 줄기가 뚜렷한 나무로 키우는 것이 좋다는 글을 읽고 보니 이곳에 무궁화를 심은 사람은 그 키우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늘지만 중심을 세우고 나무를 심었으니 말이다. 몇 개 되지 않는 꽃송이라도 쉼없이 피워내는 의지에 길을 걸을 때마다 눈길이 간다. 공원 반대편에 심어진 보라색 적단심을 가진 무궁화도 비슷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다. 역시나 한두 송이의 꽃들만 힘들게 피워내는 것을 보면 무궁화의 속성을 잘 알고 심어야 한다는 이동고 님의 글처럼 꽃이 피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많은 진딧물 때문에 키우기를 꺼린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의 꽃이라 불리는 무궁화를 잘 가꾸기 위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무궁화를 위해 우리들의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다시 한번 고민해본다.

약간 연두빛을 머금은 수국은 ‘변하기 쉬운 마음’이란 꽃말과 달리 변하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사진제공 : 다랑
약간 연두빛을 머금은 수국은 ‘변하기 쉬운 마음’이란 꽃말과 달리 변하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사진제공 : 다랑

공원 중앙의 길옆으로는 단아한 흰색 수국이 가지 끝에 달려있다. 약간 연두빛을 머금은 수국은 ‘변하기 쉬운 마음’이란 꽃말과 달리 변하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산수국을 좋아하지만 이곳의 하얀 수국도 그 모습이 아름답다. 꽃색이 변하니 변심이나 변절을 뜻한다며 우리 선조들이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본의 오타키 구수모토와 독일인 의사 지볼트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네 사랑처럼 수국꽃을 피우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여름의 시원한 푸른 수국은 아니지만 단아한 흰색 수국이 공원의 한 자락에 있어 지난 여름을 지켜준 것이 새삼 고맙다.

차분하고 단아함에서 눈을 돌리면 5차선 가장자리에 떡하니 있는 화단 장미의 화려한 붉음이 보인다. 노란색 꽃과 함께 자리잡고 있지만,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 붉음이다.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에서 보면 조선 후기 영조 때 유박이 지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서는 화목의 품계에서 붉은색은 5등 6등을 주어 멀리하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공부하는 선비들의 마음을 흔들 만큼 그 색이 유혹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담장 위의 붉은 덩굴장미나 붉게 무리지어 피어있는 꽃양귀비에 시선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색을 탓하기보다는 그 붉음을 탐하는 사람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 같은 색일진데, 붉은색보다는 분홍이나. 노란색 등의 옅은 장미색에 편안함을 느끼고 붉은색에 거리를 두는 것이, 눈에 띄어야만 하는 붉은색 장미의 사정은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이기심인 것만 같아 미안해진다.

산책길 옆으로 생각 외로 잡초가 없다. 길 가장자리를 따라 무성히도 자랄 것 같은 잡초는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찾아봐야 한다. 사람들이 잘 걷지 않는 나무 사이에도 비비추와 맥문동에 밀려 흔하지 않기에 여기에선 잡초가 아닌 금초라 불러도 될 것 같다. 밭에서 자라지 않아 뽑힐 염려도 없고 쑥같이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풀들도 아닌데, 작은 식물들 앞자리에 조금 자리를 차지한 모습이 그 본래의 힘을 잃은 것 같아 서글프다. 힘든 시절 구황식물로도 이용되고 땅의 지질을 회복하는 역할도 해주는데, 편견으로 없애고 뽑을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공존을 이야기하는 이동고님의 글처럼 익숙함이 좋은 잡초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우리는 터득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그 그림자도 아름답다. 사진제공 : 다랑
자연은 그 그림자도 아름답다. 사진제공 : 다랑

공원의 정자를 지나는 길에 아침부터 한껏 음식을 가져오신 어르신들이 계셨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순간 책에 나오는 고구마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직도 간식처럼 고구마를 쪄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처음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에 놀라서 고구마를 한 번 더 쳐다봤었다. 조선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처음 들여올 때 기록을 보면, ‘이름이 감저(甘藷)다. 왜의 발음으로는 고귀위마(高貴爲麻)라 한다’라고 했다. 훗날 북방에서 요즘 우리가 아는 감자가 들어왔고 ‘북감저’라 했는데 고구마와 달리 어디서든 잘 자라는 감자가 그 이름을 가져갔다. 우리가 아는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서 복녀가 키우던 작물도 감자가 아닌 고구마라고 한다. 색과 생김새, 그 맛도 모두 다르지만 고구마 하면 감자가 함께 떠오르는 것은 아마 이름부터 연결된 두 작물의 숙명은 아닐까.

이동고 님의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 책에 보면 많은 사진이 나온다. 한 장 한 장을 직접 찍었다는 사진은 무척 자연스럽고 순수했다. 마주한 식물들의 모습이 마치 그 장소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래서 나도 가끔 주저앉아서, 서서 이 길에 보이는 식물들을 찍어본다. 그리고 느꼈다. 자연은 그 그림자도 아름답다는 것을…

책 속의 원추리 군락지 사진은, 원추리가 이렇게 예뻤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자연의 초록과 어우러진 노란 원추리는 도심의 길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어난 그것과 다른 생기가 있었다. 도로 옆의 원추리는 가날프고 섬세한 느낌이다. 도시의 도로의 옆이라는 장소가 그리 좋은 곳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피어내는 그 노력을 나도 언젠가는 책 속 초록의 원추리 군락지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찍고 싶다. 그것은 도시를 함께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작은 내 성의기도 하다.

노각나무 껍질의 아름다움을 보며 나무의 껍질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흐드러진 메밀꽃밭 사진을 보며 더운 날 먹었던 메밀국수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의 사진 속 홍해의 이팝나무처럼 크지 않지만 하얀 쌀알같은 꽃을 피우면 금새 나무가 하얗게 바뀌었던 공원의 이팝나무가 생각난다. ‘어째서 쌀알 모양이냐’며 이팝꽃을 들여다보던 우리 아이들의 미소도 함께 떠오른다.

공원을 걸으며 변해가는 시간을 식물들과 함께 느끼고 공감하면서 나는 지금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있다. 사진제공 : 다랑

이번 여름 강화도에서 비가 적게 와 키가 내 가슴까지 밖엔 오지 않았던 옥수수를 보았다. 힘든 환경에도 그 큰 옥수수를 힘껏 매달고 있던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오지 않은 것이 아쉽다. ‘우리나라 주식이 옥수수라고요’에서 GMO 옥수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많은 식품들 속에 첨가되어 있는 유전자 변형 식물들을 피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지 친환경으로 키우고 있는 옥수수를 보며 묻고 싶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는 나만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들은 베란다나 거실에 이렇게 저렇게 가꾸기도 하지만, 재주가 없는 나는 항상 키우는 것에 힘이 든다. ‘정원이 하나 더 생겼다면 인생의 배움도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배움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은 작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 삶도 또한 이와 같다.’ 책에 나와 있는 영국 시인이자 가든 디지이너인 비타 색빌리 웨스트의 말이다.

내가 직접 만들 수는 없어도 내가 다니는 공원이 나의 정원이 될 수는 없는 걸까. 공원을 걸으며 변해가는 시간을 식물들과 함께 느끼고 공감하면서 나는 지금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있다.

예전부터 식물들은 항상 그 자체로 존재해 왔다.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에서 들려주는 식물들의 이야기로 모든 식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 주위의 식물들이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시선으로 함께 대화해 나간다면 그것이 앞으로 우리들이 만들어갈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 주위의 생명들이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시선으로 함께 대화해 나간다면, 그것이 앞으로 우리들이 만들어갈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진제공 : 다랑
내 주위의 생명들이 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시선으로 함께 대화해 나간다면, 그것이 앞으로 우리들이 만들어갈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진제공 : 다랑

운동화 끈이 풀어져 잠깐 산책로 옆에 주저앉았다. 관목 사이로 까치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자 이내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아침에 이 산책로에 나오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비 온 뒤 기어나온 지렁이들을 피해 걷고, 종종거리는 참새들도 마주하고, 이 시간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식물들이 서로 예의를 지키며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앞으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도시의 모습인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공원에 있는 식물들의 이름을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이 공원을 걷는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그들의 존재에 대한 내 나름의 의미 같다. 이름을 모르면 그냥 이름을 붙여주면 된다. 지은이 이동고 님이 아이들에게 식물의 이름을 지어보라 주문한 것처럼…

다랑

모두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랑’이라 합니다.
혼자보다는 모두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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