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적 얼굴성 – 청년은 어떤 얼굴을 가지는가?

들뢰즈,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얼굴성’을 통해 얼굴과 연결된 권력 배치물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청년의 얼굴은 어떻게 생산되고 주어지는지 고민하며 청년으로서 내가 느끼는 ‘불안’을 바라본다. 끝으로 색다른 얼굴성의 생산은 어떻게 가능할까 상상해본다.

글의 시작에서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비인가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는 가지 않은,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청년의 삶의 과정과는 조금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경험하고, 일을 하며 삶을 살아갈 기회와 자리가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청년 졸업자(470만 6000명) 중 3분의 1(154만 8000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소식(2021.7. 통계청)을 듣는다. 경기침체가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산업구조가 빠르게 바뀌어 가고, 코로나19 등의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겹쳐진다. 앞서 말했던 몇 가지의 특이점을 가진 나는, 이제 남들과 비슷한 길을 따라가야만, 쉴 새 없이 노력해야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 기회와 자리가 소멸된 시대에서 ‘기회의 특이점’을 만들 방법을 고민하기 이전에, 내가 느끼는 불안과 쉴 새 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관념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청년을 떠올리면, 혹은 미래의 모습을 막연히 떠올리면 그려지는 ‘얼굴’들이 있다. (반면에 청년과 연결되어 떠올려지지 않는 ‘얼굴’도 있다) 그러한 얼굴들을 떠올릴 때마다 막막함과 조급함, 불안함이 스미는 이유는 무엇일까?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읽기 과정 중 만난 ‘얼굴성’, 이것이 나의 궁금증을 해석할 힌트를 줄 것 같은 반가움이 있었다. 그 반가움의 순간을 발판 삼아 나-청년-의 얼굴에 대해 고민해보려 한다.

1. 얼굴성

들뢰즈・가타리 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3)
들뢰즈・가타리 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3)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성’을 통해 얼굴과 연결된 권력 배치물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무정형의 풍경 속 흩어져 있는 사람, 사물, 환경에 얼굴을 생성하여 공간적 일관성을 부여하고 식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얼굴성 기계이다. 얼굴성은 흰 벽-검은 구멍의 체계이다. 의미생성이 기호와 잉여를 기입할 흰 벽과, 주체화가 정념, 의식,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의 체계. 흰 벽에 기호가 기입되며 얼굴이 그려질 때, 기입되는 정보들은 개개인이 살아오면서 남긴 다양하고 다층적이며 차이나는 자국들이 아니라 이항구조에 따른 얼굴의 기본 단위들로부터 ‘만들어진’ 것들이다. 남자 또는 여자, 부자 또는 빈자, 성인 또는 아이, 비장애인 또는 장애인, “x 또는 y” 등 일대일 관계의 단위에 따라 분류, 조합되면서 개별화된 구체적인 얼굴들이 생산된다. 검은 구멍은 흰 벽에 기입된 정보들을 통과시키거나, 튕겨낸다(‘그렇다-아니다’의 이항구조로서). 흑인인가 백인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자인가 빈자인가를 구별하며 얼굴의 유형과 등차를 만들어 줄을 세운다. 백인-남성-비장애인-성인의 다수계열의 얼굴과 유색인-여성-장애인-아이-노인 등의 소수계열의 얼굴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차별한다. 일대일 대응의 기본 단위 바깥에 존재하는 얼굴들(남자도 여자도 아닌)은 내버려진다. 외부는 없다. ‘우리처럼 되어야 할 것’들만이 있다. 만들어지고, 분류되고, 조합된 기표적 얼굴을 부여받은 주체는 이항적 선택지들을 통과하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통과되거나 거부당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다. 우리는 마주친 얼굴에서 모르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애매한 사람, 위험한 사람을 식별하여 빨아들이거나 튕겨낸다.

떠오른 예로, 청소년은 ‘아이인가 어른인가’라는 단위에 따라서 ‘아직 미성숙하며, 시민이 되기를 준비하는 훈육의 대상’이라는 기표가 흰 벽에 기입된다. 더불어 남자-여자, 부자-빈자, 비장애인-장애인 등의 단위에 따라 구체적 얼굴이 그려지며. 소수계열의 얼굴은 차별받거나 지워지기도 한다. 비 성인의 얼굴, 교복을 입고, 머리가 짧음으로써 식별되는 청소년은 학업에 충실하여 성장해가거나, 때론 규칙에 저항하며 ‘일탈’하는 등의 선택지를 오가는 주체이다. 그러나 지층 밖으로 도주선을 이어가는 것은 안 된다. 정치에 참여하거나 시민으로서 목소리 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는 정체가 분명한 주체를 등장시키고, 욕망을 예속한다. 혹은 이항 구조에 가두어 다양하고 다성적인 욕망과 삶의 방식을 고정된 중심으로 모은다.

그렇다면 청년-얼굴을 단위를 통해 생산하고 부여하고 줄을 세우는 의미화와 주체화의 체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청년의 다양성을 제거하고 이항 구조로 환원하는 데에 얼굴성이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 권력이 이러한 얼굴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청년 얼굴성

마케팅이나 미디어에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청년”의 얼굴을 등장시킨다. 사진출처 : OSPAN ALI
마케팅이나 미디어에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청년”의 얼굴을 등장시킨다.
사진 출처 : OSPAN ALI

아이(청소년)-성인의 일대일 관계에서 청년은 청소년은 아니지만, 성인도 아닌 얼굴을 부여받는다. ‘공부하고 성장하는 청소년’과 ‘사회에서 활동하고 책임지는 성인’이라는 의미 사이에서 청년은 기회의 소멸로 인해 성인으로의 이행이 유예된, 연장된 청소년의 얼굴을 한다. 때문에 경제, 정치에선 주체가 아닌 언표로써 등장하고, 학업과 성장을 위해 굴하지 않고 노력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구글’에 청년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중 다수는 가방을 메고 책을 끼고 있거나, 수업이나 회의에 참여하거나, 한 손을 들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남녀가 같이 있는 이미지가 많은데, 머리 긴 남자나 머리 짧은 여자는 없다). 마케팅이나 미디어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청년”의 얼굴을 등장시킨다. 그렇다면 얼굴성 기계는 어떻게 개개인을 ‘노력, 성장하는 청년-얼굴’에 통과시키거나 튕겨낼까? 이를 위해선 노력과 능력에 대한 기표가 기입된 흰 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에서 노력의 과정과 능력의 규정은 의미화하는 권력에 따라 만들어지고 고정되어 있다. 특히 대학은 노력과 능력이라는 표현의 실체이자, 청년의 얼굴을 구성하고 줄 세우는 단위 중 하나이다. 새로운 모임에 처음 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당연한 듯이 어떤 학과냐는 질문을 여럿 받게 된다. 대학 진학은 정상성의 기준점으로 작용하며, 반듯한 청년임을 식별할 수 있는 얼굴 단위이다. 대학교는 공부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넘어서는-안정된 삶을 위한 필수과정, 성인으로 이행하는 통과의례, 노동시장 진입의 문턱-기표를 가진다. ‘어떤 대학이냐’에 따라서도 인서울, 지방대 등이 따라붙는데, 때문에 대학을 단위로 청년의 얼굴을 구성하는 것은 ‘부자-빈자’의 일대일 관계를 통해 얼굴을 구성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더 좋은 교육을 받고, 기회에 접근하기 용이하며, ‘능력’에 가까워 질 수 있는 배경과 부를 가진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교육과 기회를 통해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과거 청소년들의 ‘대학입시거부선언’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잔인하지만 당연한’ 대학입시구조가 만든 경쟁과 차별을 ‘거부’하는 선언에서 새로운 얼굴성의 출현을 보았다. 하지만 당사자를 향한 낙오자라는 시선과 세상을 모른다는 비난은, 좋은 대학 진학-미진학의 일대일 관계 외부에 존재하는 비진학자들의 얼굴을 수상하게 여겨 내버리거나 지우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얼굴성의 작동은 단위들의 일대일 대응관계에서 얼굴을 만들고 줄 세움과 동시에 다양하게 살아있고 서로 연결접속하는 수많은 삶을 이분법에 예속하거나 제거한다. “얼굴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대학에 가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해외연수에 다녀오고, 인턴을 지내는 등 지배 권력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능력’에 가까워지기. 얼굴성은 이렇게 정체가 분명한 얼굴을 구성하고 역할이 주어진 ‘청년’ 주체를 등장시킨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청년의 노력이 그 보상과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청년은 사회적 지위와 인정, 부의 보상을 누리기 위해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 실패와 불안을 ‘내 탓’으로, 성공을 ‘나의 능력’으로 만드는 기표체제와 주체화 체제는 존재하는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가린다.

기존의 기표와 배치를 뒤흔드는 색다른 얼굴성의 생산을 위해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사진출처 : Zachary Nelson  
https://unsplash.com/photos/98Elr-LIvD8
기존의 기표와 배치를 뒤흔드는 색다른 얼굴성의 생산을 위해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사진출처 : Zachary Nelson

나는 나의 얼굴 또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고자 했다. 거기에서 기표를 찾고, 주체화의 점을 발견하려 했다. 얼굴성은 저마다의 특이성을 가진, 다양한 청년들에게 아이-성인, 부자-빈자, 남자-여자, 장애인-비장애인 등의 이항구조를 통해 구성된 얼굴을 부여하고, 고정된 중심을 세우고, 분명한 정체와 역할을 가진 주체를 등장시켜 욕망을 예속하고 불안을 내면화하게 한다. 경험하고, 노동하고, 활동하며 삶을 살아갈 기회와 자리의 한계를 마주한 현재, 기회의 특이점을 생성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기표적 얼굴’을 의심하고 다시 구성하는 것과 이어지지 않을까.

3. 색다른 얼굴성

특이점을 만드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기회를 가지기 위해 ‘대학을 가고 스펙을 쌓자’라는 고정된 모델은 그 한계와 만났음에도 여전히 견고한 기표권력의 벽이다. 다양한 모델을 상상하고, 횡단하며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의미화하고 주체화하는 권력을 통해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얼굴성’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얼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기존의 기표와 배치를 뒤흔드는 색다른 얼굴성의 생산을 위해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떠오르지 않아서 여기저기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한 친구가 ‘놀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놀면 뭐가 나오나?”라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놀이의 순간만큼 활력이 생기고, 돌발적인 상황이 튀어나오고, 정동이 샘솟는 때가 또 있을까. 놀이를 통해, 활력과 정동의 순간들을 통해 생겨난 우발성을 어떻게 특이점으로, 또 색다른 얼굴성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한 활력과 정동의 과정이 다른 이들과 연결된 배치에서라면 더 좋겠다. 기표적 얼굴성은 청년을 개인적 주체로서 생산한다. 능력, 성장, 자기계발 등의 요구로 이뤄지는 주체 생산은 청년을 개별적 존재로 만들고 끊임없이 경쟁하고 소진하게 한다. 실패는 ‘내 탓’, 성공은 ‘내 덕’이다. 공동체의 집단적 배치에서 ‘내 탓’은 없다. 오로지 ‘내 덕’인 것도 없다. 공동체에서는 개인적 주체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의 주체성이 생성될 수 있다. 정체와 역할이 분명한 얼굴이 아니라 다양한 가면을 만들고 이행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사이주체성이 가진 힘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배치 속에서 우발성을 기회의 특이점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상상까지 이어지지 않고 너무나 추상적으로 남는 점이 아쉽다. 가끔씩 주변에서 색다른 얼굴성의 생성과 출현을 본다. 청소년들의 ‘대학입시거부선언’,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중심주의를 뒤흔드는 ‘퀴어퍼레이드’, 다양하고 다채로운 삶을 사는 우리들이 있음을 말하는 청년공동체 등을 말이다. 기존의 얼굴성을 뒤흔들고, 고정된 정상성과 차별에 질문하고 비판하는 모습들은 우리의 삶이 그저 트랙을 따라 경주하는 삶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다채로울 수 있다고 응수하고 있다.1

* 참고자료
『천개의 고원』 들뢰즈, 가타리 저 (새물결, 2003)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저 (창비, 2022)
『청년팔이 사회』 김선기 저 (5월의 봄, 2019)
경향신문 [부들부들 청년 ‘소비되는 청년] 연재기사


  1.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저

이재형

안녕하세요. 이재형입니다. 된장찌개 참 좋아합니다. 그러면 밥은 두 그릇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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