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어떤 돌봄과 지금의 돌봄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효선」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 읽어보기

돌봄은 자본주의 세계를 유지시켜 주면서도 홀대받고 있는 동시에 무척 부족하기도 한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돌봄을 홀대받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노동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자체가 곤란해질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금과는 다르지만 다양한 돌봄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하였다. 역사 속의 돌봄에서 지금 미약한 돌봄을 창대하게 할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도, 세계를 곤란으로부터 구하는 노력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돌봄

삼국유사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e북), 저자 일연, 번역 신태영,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돌봄[care]은 “인간이 자신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실천하는 일상 행동”1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돌봄은 “모든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건강 그리고 관계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근본”(「돌봄」, 125쪽)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돌봄은 노동이다. “부양・재생산[성교・임신・출산・육아]・인간관계”(「돌봄」, 124쪽)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에 “어마어마한 양의 노동”(「돌봄」, 124쪽)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럼에도 이른바 주류 정치경제학은 돌봄에 속하는 노동을 마치 없는 것인 양 해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의 대가를 받을 만하다고 유일하게 인정하는 생산성이라는 변수와 돌봄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돌봄」, 125쪽) 달리 말하자면, 돌봄은 팔리는 것을 직접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봄 없이 팔리는 것은 생산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은 인류가 “여성과 자연에 생산 비용을 전가”(「돌봄」, 125쪽)하여 왔다고 비난한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비판 같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른바 주류 정치경제학이 “가정 경제와 돌봄 공간에서 시간 사용은 효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리듬에 따라 진행된다.”(「돌봄」, 125쪽)는 점을 인정하지 않거나 못한다고 보는 듯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른바 주류 정치경제학이 ‘생산 시간’을 중시한다고 보면서, 그것이 “신체의 일상과 생애 주기”로부터 분리되어있으며 “계절의 변화나 생태계 재생, 재생산 등 생태적・생물적 시간”으로부터도 분리되어있다고 지적하였다.(「돌봄」, 125~126쪽 참조)

이른바 주류 정치경제학은 시장을 대변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주류 정치경제학을 만들어서 자기를 정당화하여 왔다고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기준으로 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할당해야 할 희소한 자원”(「돌봄」, 125쪽)을 보면서 관리하고자 하였다. 목표는 시간을 가급적 생산에 할애하는 것이다. 돌봄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생산과 시장은 꾸준히 팽창하여, 돌봄・사회적 삶・호혜의 영역을 침범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해체하고 좋은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돌봄」, 126쪽 참조.)

생산과 시장의 팽창은 성장이라 할 수 있다. 성장은 돌봄・사회적 삶・호혜와 맞선다. 현실에서 돌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비공식적인 부문으로 취급되면서 성장을 보조하고 있다면,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는 돌봄의 역할이 은폐되고, 왜곡되고, 저평가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현실 속에서는 돌봄 노동의 분배가 불공정할 것이다.

이러한 불공정 속에서는 돌봄 노동을 제대로 이해하기는커녕 돌봄 노동을 경험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취약함을 돌보는 일(「돌봄」, 129쪽)인 돌봄 노동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취약함에 무지하고 취약함에 대한 감수성이 계발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이 취약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자로 생각하는 자아도취적 확신”(「돌봄」, 129쪽)에 빠진다고 한다.

장수사・불국사・석굴암과 돌봄

자본주의 세계의 돌봄과는 다른 여러 가지 돌봄이 역사 속에서 명멸하였다. 『삼국유사』 속에서도 그 가운데 하나를 볼 수 있다.

『삼국유사』 「효선」에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 라는 이야기가 있다. 가난한 여자 경조와 그의 아들 김대성이 생계가 걸린 토지를 보시한 과보로, 김대성이 권력자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서, 사냥하다 죽인 곰을 위해 장수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현생의 부모를 석굴사를 세운 이야기이다.

가난한 경조(慶祖)의 아들 대성(大城)은 복안(福安)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던 중, 베 50필을 흥륜사에 보시한 복안에게 승려 점개(漸開)2가 “신도께서 즐겁게 보시를 해주시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시면 만배를 얻게 되오니 안락하고 장수하실 것입니다”3 라고 말하는 것을 축원(祝願)으로 듣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문밖에 오신 스님의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한 가지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하니 저에겐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에 와서 가난한가 봅니다. 그러니 지금 시주하지 않는다면 후세에는 더욱 가난해질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해서 뒷날의 응보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와 아들은 밭을 점개에게 시주하였다. 얼마 후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그날 밤 국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렸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 만에 폈는데 손바닥에 대성이라고 새겨진 금간자(金簡子)가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대성이라 이름 짓고, 모량리의 어머니를 모셔다 함께 봉양하였다.” 어른이 된 뒤 대성이 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날 밤 꿈에 곰이 나왔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죽였느냐? 내 환생하여 너를 잡아 먹으리라!” 대성이 두려움에 떨며 용서해 달라고 청하자 귀신이 물었다. “그럼 네가 나를 위해서 절을 세워 주겠느냐?” 그 후로 대성은 곰을 잡았던 토함산에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우고, 나아가 이승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석굴암의 최초 이름)를 세워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각각 거주하게 하였다. 처음에 유가종의 고승 항마(降魔)를 이 절에 거주하게 하였다는 이야기, 천신이 건축에 도움을 주어서 대성이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고 그곳 지명이 향령(香嶺)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에 덧붙여져 있다.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는 『삼국유사』의 「효선(孝善)」편에 실려있다. 여기에서 효(孝)는, (1) 자식된 도리, (2) 자식된 자의 의무[filial duty], (3) 자식된 자가 부모를 대할 때 가져야 할 공경의 마음가짐[filial piety]을 견지하는 태도 등으로 풀어볼 수도 있다. ‘(3)’의 태도가 ‘(1)’과 ‘(2)’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듯 효는 규범이나 원리라기보다는 태도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이 태도는, 세계를 안정되고 평화롭게 하는데, 어떤 규범이나 원리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라고, 오랫동안 널리 인식되어온 듯하다. 한편 여기에서 선(善)은 선업(善業) 자체 혹은 선업 쌓기라고 풀어볼 수 있다.

생명 존중은 곧 돌봄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 truthseeker08
생명 존중은 곧 돌봄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 truthseeker08

대성은 밭을 보시하는 선업을 쌓고 죽은 후 고위관리의 집에 태어나 전생의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는 효를 행하였다. 대성은 살생을 뉘우치고 곰이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절을 짓는 선업을 쌓았다. 그리고, 곰을 위한 절을 짓게 된 것을 계기로, 이승의 부모와 전생의 부모가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절을 짓는 선업도 쌓았다. 이야기 속 대성은,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을 먼저 깨닫고 나서,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들의 은혜에 보답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효는 곧 선업 쌓기[선]이고, 최고의 선업 쌓기[선]는 곧 효다.

이 이야기에서 은혜 갚기나 선업 쌓기 등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생명 존중인 듯하다. 생명 존중은 불교의 계율 가운데 하나인 불살생과 붙어있다. 불교에서 사람들에게 도덕적 삶을 권할 때, 우선적으로 권하는 규범 가운데 하나가 불살생이다. 이야기 속에서 대성의 효와 선업 쌓기는 생명 존중을 바탕에 깔고 있음이 확연하다. 대성은 일상의 일부로 사냥을 하긴 하였지만, 그것이 자기의 즐거움만 중요하게 여긴 것이며, 곰에게 원치 않은 고통을 준 것임을 깨닫기도 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불교에서 도덕적 삶을 권할 때 앞세우는 규범 가운데 하나를, 자각을 바탕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대성의 생명 존중은 곧 돌봄이기도 하다. 대성은 살생을 뉘우치며 곰이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였는데 이는 돌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성은 이승의 부모와 전생의 부모가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람이 아닌 동물을 돌보는 것을 바탕삼아 돌봄을 전생과 이승에서 내세로 넓혀 사고한 셈이다. 이런 면들을 보면,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라는 이야기 속에서 대성은 돌봄의 확장을 통하여 도덕적 삶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놀이의 소재로 삼았던 곰의 사후를 걱정하는 마음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이 되어 전생과 이생의 부모의 사후를 염려하는 태도가 단지 자기와 유사한 존재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확장 가능한 태도가 되게 한 셈이다.

모든 존재의 연결을 깨달을 수 있을 때 더 단단해지는 돌봄

대성이 장수사・불국사・석굴암을 지은 일과 자본주의 세계에서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일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많은 듯하다. 그것들을 짓는데 정치적 입장이 개입되어있었을 것이고, 그것에 수반하는 경제적 부수효과도 만만치 않았겠지만, 장수사・불국사・석굴암을 팔리는 상품이라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성이 장수사・불국사・석굴암을 지은 일과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하는 돌봄 노동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지만, 둘이 같은 것은 아닌 듯하다. 대성이 한 일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이때의 은혜는 돌봄이다. 전생의 부모와 이승의 부모는 모두 대성을 잘 돌보았다. 대성을 그것을 큰 은혜라고 생각하고 당시로써는 가장 크고 높고 세게 보답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독특한 것 하나가 끼어있다. 대성은 곰이 나타난 꿈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그 꿈은 모든 생명과 존재를 동등하게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깨달음의 계기였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보답을 결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흔한 것이 아니다. 먼저 대성은 ‘나를 닮은 존재’에게서 느끼는 동류의식 혹은 가족 유사성 쉽게 말하자면 핏줄에 이끌려 은혜를 느끼고 보답을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 대성은 먼저, 곰을 죽인 것이 자기의 즐거움만 중요하게 여긴 것이며, 곰에게 원치 않은 고통을 준 것임을 자각하고,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존중해야겠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갔다. 보답의 결심은 이 깨달음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존재와 생명들은 각각의 것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개체의 독립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존중의 대상도 확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와 생명들이 연결되어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위험물을 바다에 흘려보내면서 그 위험물이 있던 곳이 깨끗해졌다고 생각하는 태도. 현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러한 태도는 존재와 생명들의 연결은 애써 외면하면서 그들 각각의 독립성만을 지나치게 존중한다. 겉으로 잘 드러나는 것만 ‘팩트’라고 보고, 팩트는 하나뿐이라고 보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연결은 ‘없는 것’ 취급하는 태도는, 스스로에게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고전적 명패를 붙이겠지만, 세계의 복잡성을 인식할 만큼의 수준에 올라오지 못한 인식 주체가 머무는 소박실재론[naive realism]일 뿐이라는 비평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적 유희 속에서 취해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세계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결정의 당사자가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곰 사냥을 후회하고 곰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절을 짓고, 그것을 계기로 이승의 부모뿐만 아니라 전생의 부모의 은혜에까지 보답하기로 결심하고 자그마치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한 대성의 행적은, 타블로이드 언론이 전하는 만수르의 소식 못지않게 ‘럭셔리’하여, 많은 사람에게 신기루 같아 보이고, 날카로운 비평의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허망하게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성의 이러한 행적은 존재와 생명들의 독립성만 지나치게 중시하는 태도와 대비되면서 그런 태도의 한계가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성은 모든 존재와 생명들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면서도, 전생-이승-내세 사이의 벽도 무색하게 만드는, 존재와 생명들 사이의 연결성도 놓치지 않는 태도를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듯하다.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무시하지 않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의 일부로 삼는 만큼, 돌봄의 대상을 대상화하고 돌보는 주체인 자신에 도취되는 심리는 옅어지게 될 듯하고, 딱 그만큼 돌봄도 더 단단해질 듯하며, 딱 그만큼 위험물을 바다에 흘려보내면서 그 위험물이 있던 곳이 깨끗해졌다고 생각하는 식의 태도도 해소되어 갈 듯하다.

【『삼국유사』 인용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1.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마르코 데리우, 「돌봄」,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외(지음), 강이현(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충남 홍성군 : 그물코, 2018, 124쪽.

  2. 경조(慶祖)・대성(大城)・복안(福安)・점개(漸開)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3. 『삼국유사』 「효선」 ‘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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