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세미나(3월 모임 후기)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 관한 세미나가 2021년 3월 한달간 매주 화요일마다 오후1시 연구공간L 주최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되었다. 4월 모임에서도 『맑스를 넘어선 맑스』를 이어서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참여 문의: 010.2716.0746

■커리큘럼 :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윤수종 역, 새길, 1994.

■일시 : 2021년 3월 16일(화요일) 오후 1-4시

1. 『요강』이 공산주의의 형식의 문제에서 내용의 문제로 전환했다면, 그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것은 모순적 주체의 출현에서 찾아져야 한다. ‘모순적 주체의 출현’은 “공산주의가 발전 단계 사이에서 생산 및 발전 새로운 규칙들을 발명하는 새로운 집단적 개인의 탄생에만 자신의 기초를 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된 주체는 새로이 집단적으로 전개된 욕구를 지닌 새로운 세계를 연다.”(289) 이 주체는 ‘강제노동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노동에서 해방된 노동”이다. “공산주의의 내용은 전도된 대상을 동시에 억압하는 전도 속에 있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전도가 노동의 억압인 한에서 노동의 전도일 뿐이다. … 공산주의의 내용과 프로그램은 임금노동의 조직화라는 집단적이지만 참혹한 기초 위에 출현한, 그러나 혁명적인 방식으로 노동의 폐기, 노동의 분명한 죽음을 의미하는 보편적 욕구의 발전이다.”(291)

2. 그렇다면 이 내용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가? “분석은 그 적대적 힘–프롤레타리아적 자기규정과정–이 자본 속에서 사회의(따라서 과학의) 최고도에 포섭에 대한 규정에서 시작할 때 매우 의미있고 힘이 있다.” “공산주의는 주체성의 형태를 지니며, 공산주의는 구성적 실천이다. 자본 가운데 새로운 주체의 강렬한 발전으로 파괴되지 않는 부분은 없다. 이 주체는 주체적 전복의 힘을 보여 주며 그리하여 구질서의 모든 기득권을 박탈한다. 이행은 가장 완전한 의미의 구성적 과정이다.”(295)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결코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그것의 발본적인 전도이다. … 공산주의는 새로이 형성되는, 현실을 변형하고 자본을 파괴하는 새로운 주체이다.”(298)

3. 노동의 폐지와 이행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맑스가 ‘계획’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회화=생산관계의 ‘국가화’나 ‘우월한 경제적 합리성’으로” 오해되곤 했다.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공산주의는 그것이 노동의 계획적인 폐지인 한에서, 계획이다. 계획은 지배의 소외성 및 그것의 물상화를 억눌려야만 하는 노동의 연합적 성격의 표현(그리고 조건)이다. 따라서 계획은 우월한 것이 아니라 상이한 경제적 합리성이다.”(299-*‘억눌려야만 하는’(suppress)이 번역에서는 ‘억압해야만 하는’으로 미숙하게 번역되어 있다.-)

■일시 : 2021년 3월 23일 (화요일) 오후 1-4시

1. 이행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어떤 조건들에 의해서 입증되는가? 이 문제는 또 다른 새로운 문제(‘부정적 규정’의 문제)에 봉착하게 만든다. 즉 “가치법칙은 죽어 버린다. … 가치법칙은 … 더 이상 (평균적인 추상적) 노동시간과 관련을 맺지 않게 된다.” 노동에 대한 객관적 규율법칙이자 자본의 잉여가치산출의 계기였던 가치법칙의 소멸은 자본을 ‘경제적 합리성’의 지배가 아닌 폭력성을 동반한 순수한 힘의 지배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지배, 지배계획, 위기의 강제된 위로부터의 규정”(306)

2. “교환가치라는 지평의 축소는 그 결과 어떤 준거틀을 불투명하게 할 위험을 안고 있다. (심각한 자본주의 위기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파시즘 부활에 대한 경고를 절규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307) 가치법칙의 소멸은 자본의 위기이지만, 자본은 그것을 극복할 경제적 합리성과 ‘대중으로부터의 동의’를 대체할 논리를 찾아내기 힘들어진다. 이것은 순수한 폭력적 힘의 행사이거나 위기에 대한 대응불가능으로 나타날 것이며, ‘파시즘’에 대한 경고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게 된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파시즘적 힘의 관철“

3. 하지만 또한 가치법칙의 소멸은 총자본과 총노동을 첨예한 적대의 상황으로 몰고 가며, 그러한 적대 속에서 투쟁이 전개되는 한, “프롤레타리아의 독립을 위한 실질적인 공간”을 열릴 가능성이 생긴다.(307) 하지만 투쟁과 전도가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자유롭지만 공허한 공간을 창출하는 것”에 머물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전도과정”이 “가치의 위기 및 그 법칙의 위기를 야기하는 과정”(308)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가치법칙의 위기는 단지 근본적이고 암시적인 잠재성만을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전도인가?

4. 전도는 거울이미지의 형성과는 다르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자본의 폭력과 대립하지만 그것과 상이한 주체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만큼 거울이미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의 폭력의 거울이미지는 주의주의적인 테러리즘의 해법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때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평화주의로 돌리는 것이 지닌 위험성에 있다. 평화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의 힘(그들의 자기가치화의 힘)을 ‘무력함’(힘이 없다는 의미에서)으로 환원시킬 것이다.

■일시 : 2021년 3월 30일 (화요일) 오후 1-4시

* 발제준비(!!!)가 안 된 관계로, 지난 발제부분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논의를 진행시켰음. 다음 발제는 두 사람 모두 준비해 오기로 함.

1. 생산적 순환으로서의 사회적 생산: “착취의 평균화, 착취의 평균으로의 내적 균등화, 이 양식 안에서 자본주의 발전 법칙을 구성하는 것은 사회적 회로 혹은 …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화라는 회로 안에서 나타나는 착취관계의 팽창에서 생겨난다. 전복 및 프롤레타리아적 자기가치화의 평균화도 동일한 경로를 취함이 분명하다.” 동일한 경로를 취한다는 것은 착취의 평균화가 추상적 노동을 통한 것이었듯이, 프롤레타리아의 자기가치화의 평균화도 그로부터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2. 그러나 그 둘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자본의 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길 사이에는 상동성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것이 적대의 논리를 규정/결정한다.”(311) 그렇다면 적대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3. 맑스의 ‘규정적 추상’은 새로운 범주, “‘색다른’ 노동자들의 운동이라는 범주”로 나타났다. 어떻게? 첫째, “유통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화폐”(312) 유통의 긍정은 화폐의 부정이다. 자본에게 있어 시장에서의 상품(원료, 기계, 노동력)의 구매는 화폐의 상실이다. 둘째, “부정적 화폐가 긍정적으로 된다.”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과정의 일관된 연속성, 가치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혹은 그 과정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이행은 이전의 다른 모든 생산형태들에서보다 훨씬 더, 자본에 기초를 둔 생산에 대해 근본조건으로 나타난다.”(313) 자본의 놀라운 유동성, 호환성은 자본 증식의 계기이다.

4. 그렇다면 주체적 관점에서는 무엇이 도출되는가? “자본은 관계다. 이 관계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적대는 완전한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자본의 생산에 의한 유통의 포섭은 동일한 수준에서 적대를 해방해야만 한다.”(314) 즉 ‘색다른’ 노동자 운동은 바로 이러한 생산의 의한 유통의 포섭과 생산의 사회화라는 자본의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출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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