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 주는’ 게 뭐가 문제야.

아이와 ‘놀아 주는’ 것이 아이를 놀이의 객체로 전락시키고, 아이가 놀이 주도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는 항간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놀아 주는’이 문제가 되는 건 실제로 아이와 놀(아 주)면서 어른들의 돌봄과 교육의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표현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표현 주체의 문제이다. 아이들과 같이 논다고 하면서 잘못 놀(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잘 놀(아 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진짜 문제가 되어야 한다.

다음 중 옳은 표현은 무엇일까?

(1) 오늘은 아이랑 놀아줘야지.

(2) 오늘은 아이랑 같이 놀아야지.

대부분 (2)를 고를 것이다. 왜냐하면 (1)에는 아이를 놀이의 객체로 바라보고, 아이를 놀이의 수동적 존재로 여기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많은 어른(들)이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이와 같이 논다고 하면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노는 것처럼 들리는데 반해, 놀아 준다고 하면 어른이 아이에게 놀이를 베풀어주는 느낌이라고. 그래서 아이도 그런 시혜를 받는 대상처럼 보이게 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놀이는 아이 자신이 스스로 이끌어가는 ‘자기 주도적’ 활동이어야 하는데, 어른(들)이 놀아 주면 아이가 놀이 주도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 지적한다. 그러면 진짜 놀이도 아닌 게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의 놀이 주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른이라면 자신들 앞에 먼저 놓아야 할 진짜 문제는 아이들과 ‘잘’ 혹은 ‘잘못’ 놀(아 주)고 있느냐이다. by lauren lulu taylor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vppMdk_GMo4
아이들의 놀이 주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른이라면 자신들 앞에 먼저 놓아야 할 진짜 문제는 아이들과 ‘잘’ 혹은 ‘잘못’ 놀(아 주)고 있느냐이다.
사진 출처 : lauren lulu taylor

과연 그런가. ‘놀아 주는’ 것은 정말로 문제인 건가. 말해 주고, 들어 주고, 보여 주고 …처럼 뭐뭐 해주는 다른 표현은 괜찮은데 ‘놀아 주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 걸까. 그렇다면 이건 표현의 형태, 즉 무언가를 해준다는 표현 그 자체로 인해 생긴 문제는 아닐 거다. 왜 하필 ‘놀아 주는’ 것에서만 시혜를 베풀고 받는 관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인가. 문제는 표현을 발화하는 주체의 인식이나 의식, 태도 등에 기인한다. 가령 아이들끼리 “나랑 놀아줘”, “응, 너랑 놀아 줄게”하는 대화를 주고받을 때, 여기에 어떤 권력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놀아 주는 게 아니라 같이 노는 거겠지’라고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놀아 주는’ 것이나 ‘같이 노는’ 것은 말만 다를 뿐이지, 그들 자신이 놀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는 게 없다.

그런데 ‘놀아 주는’ 상황이 어른(들)과 얽히면 권력과 위계의 문제가 개입된다. ‘놀아 주는’ 게 문제라고 하는 건 결국은 어른들이 하는 말 아닌가. 그러고 보면 문제의 발화점은 어른(들)에게 있다고 봐야 맞다. 어른(들)은 아이를 자기보다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며 돌봄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런 관점은 놀이의 영역에서도 관성적으로 작용한다. 어른(들)은 아이와 놀(아 주)면서도 보살핌과 가르침의 관점에서 설정한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놀아 주는’ 상황에서 서로의 관계를 주는 쪽과 받는 쪽으로 나뉘어 보이게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놀아 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표현 자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표현의 주체, 즉 발화자인 어른(들)이 가진 관점과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놀아 주는’ 것이 문제인 까닭은 그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데에 있다.

단순하고도 구체적인 또 하나의 질문으로 ‘놀아 주는’이라는 표현 그 자체에는 죄가 없음을 입증해보일 수도 있다. 어느 양육자가 바쁜 일상에서 틈을 내어 아이랑 놀아 주고 있다고 하자. 그에게 아이와 ‘놀아 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이가 스스로 노는 게 아니니, 아이에게는 진짜 놀이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놀아 주고’ 있다는 그 표현만으로 정말 그렇게 평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너무 무리하고 또한 가혹하기까지 하다. 아이와 ‘놀아 주고’ 있는 실제의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하지도 않고, 놀이가 펼쳐지고 있는 과정 전체를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단지 표현만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놀아 주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건 단지 그 표현을 발목 잡아 만들어낸 가짜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씨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놀아 주는’ 것의 문제는 해결(solve)이 아닌 해소(dissolve)되어야 할 사이비 문제(pseudo-problem)라고 할 수 있다. ‘놀아 주는’ 것이든 ‘같이 노는’ 것이든 진짜 문제는 아이들과의 놀이에 어른들이 실제로 어떻게 참여하고 있느냐이다. 아이들의 놀이 주도성(내지는 자율성, 창의성, 사회성 등등 좋다고 말하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라면 자신들 앞에 먼저 놓아야 할 진짜 문제(problem)는 아이들과 ‘잘’ 혹은 ‘잘못’ 놀(아 주)고 있느냐이다.

안학철

playsophist. 놀이철학觀[be]에서 아이들과 놀이 사이의 playsophy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놀이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아이들을 ‘놀이생산자’로 바라봐야 한다는 ‘놀이산파론’을 꾸준히 펼쳐 왔습니다. 최근에는 아이들의 놀이를 바라보는 관점과 표현에 관한 문제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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