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의 반려식물들

도시농부의 반려식물들은 농작물일 것이고 텃밭주변의 나무들과 잡초들일 것이고 어쩌면 텃밭에 들인 화초들과 과실수들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와 70%를 공유하고 있다는 식물들을 ‘인생을 함께하는 반려(伴侶)’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서로를 길들이는 공들인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덧 익숙하게 우리주변을 맴돌게 된 “반려동물”이라는 단어.

원래 한자어 반려(伴侶)는 짝을 뜻하는 반(伴)자와 짝을 뜻하는 려(侶)자로 이루어진 단어로 ‘인생을 함께 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함께 하는 누군가라면 당연히 배우자를 생각하게 된다. 반려의 원뜻은 배우자를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마음을 나누고 교감하며 돌보는 애완동물을 대체하는 말에 흔히 쓰인다. 내가 근무하는 인천의 한 공원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퇴근할 때쯤이면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오는 시민들이 이용객의 거의 90%를 차지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넓은 잔디밭에서 반려견들과 마음껏 뛰고 놀고 산책하고 쉬다가 서로 흡족한 얼굴로 돌아간다. 이제는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 쓰면 마치 그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듯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반려동물”. 그렇다면 “반려식물”은 또 뭘까?

반려식물 역시 가까이 두고 돌보면서 교감하는 식물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식물하고 교감이 가능할까? 반려견이나 반려묘는 눈을 마주볼 수 있고 소리와 행동을 통해서 감정을 드러내고 스킨십을 통해 서로의 기분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챌 수도 있겠으나 식물과는 어떻게 교감하지? 인간입장에서의 일방적인 돌봄이 아닐까?

과거에도 식물을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기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식물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죽어가는 식물을 가져다주면 살려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도 낯설었을 “반려식물”. 반려식물이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게 된 계기는 아마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밖을 나가는 것, 타인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 만나는 것 등 일상이 무너진 긴 3년을 보내며 사람들은 안전하지만 교감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고 바로 주변에 있는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교적 키우기 쉽고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비용도 적게 들기도 하고, 정성을 쏟아 누군가를 돌보는 행위는 자기효능감을 일깨워주고 우울한 삶의 활력이 되어 주었다. 그 옛날 야생의 늑대가 인간주변을 맴돌다가 가축화가 되는 과정을 거쳐 반려견으로 대접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늑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늑대굴에서 어린 새끼 늑대 한두 마리를 데려와 어린 것의 요도를 끈으로 묶는다. 오줌줄이 막힌 새끼늑대는 차오르는 방광의 오줌을 내보내지 못해 고통 속에 끙끙거리게 되는데 새끼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듣고 어미늑대는 인간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은 새끼라도 살리고자 인간으로부터 멀리 거처를 옮긴다고 한다.

반려식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식물을 키우는 어떤 사람은 죽어가는 식물을 애써 살려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맘에 들지 않으면 물을 주지 않아 시들어죽게 만들기도 하고 강하게 전지함으로써 자신의 맘에 부합하는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과연 식물들은 우리의 반려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는 식물을 반려자로 돌볼 만큼 교감할 수 있는 민감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식물을 반려자로 돌볼 만큼 교감할 수 있는 민감성을 가지고 있을까? 사진제공 : 어치

식물의 유전자의 70%는 인간의 유전자와 같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침팬지유전자는 인간유전자와 겨우 1.6%가 다르고, 보노보라 불리는 피그미침팬지는 단 1.3%만 다르다. 거의 99% 유전자가 일치한다고 봐야 한다. 이 정도 유전자 상동성이면 같은 종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70%가 같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드러나는 수치일까?

피터 톰킨스와 크리스토퍼 버드가 함께 쓴 『식물의 정신세계』라는 책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실험과 가설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중에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어느 날 백스터는 손가락을 베어 요오드팅크를 발랐는데, 탐지기에 연결되어 있던 식물은 그의 손가락세포 몇 개가 죽은 것에 대해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그것은 식물이 그가 자신의 피를 보고 놀란 감정이나 요오드팅크를 발랐을 때 쓰라려 했던 감정에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식물이 살아 있는 세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 때면 언제나 특유의 그래프를 나타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백스터는 식물이 자기주변의 세포 하나하나의 죽음이라는 극히 미세한 것에도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비슷한 현상이 백스터가 요구르트를 먹으려 할 때 또 일어났다. 그는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으나, 요구르트에 잼을 섞을 때 그 잼 속에 들어있는 화학 방부제가 요구르트의 생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마침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뜨거운 물을 수챗구멍에 부었을 때 식물이 반응을 보이던 것에 대한 의문도, 그 물이 수챗구멍 속의 박테리아를 죽이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식물의 정신세계본문 p28~29

이런 민감성을 지닌 식물이라면…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가 생각난다. 다른 생명을 취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종속영양자가 그 본연의 생명유지방법이 고통스러워 독립영양자가 되고자했던 정신병적인 인물, 영혜. 어쩌면 백스터의 연구에서 보이는 식물의 타생명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은 인간 영혜의 민감성과 흡사해 보인다.

생택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장미와 왕자의 관계를 표현한 여우의 말에서 반려식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씨앗 하나가 떨어져 그 씨앗의 성장과정을 함께한 어린왕자. 그 어린왕자를 길들이고 싶어 한 장미. 그들의 서로에게 공들인 시간들이 대상을 소중하게 만들었다면 반려식물은 소중한 존재가 되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대부분 밖에 나가기 쉽지 않고 활동이 불편하거나 심신의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반려식물 나눔행사나 추천들이 이뤄진다. 짬 시간이 있을 때마다 텃밭으로 나가 들일을 하는 도시농부들에게는 과연 반려식물들이 필요할까?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건강한 흙을 만들고 그 흙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재배하기 위해, 화석연료와 토양의 표피를 벗겨내지 않는 농법을 이용해 지구에게 해를 덜 입히기 위해,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서로 교류하며 인간 삶의 참맛을 구현하기 위해 호미 하나로 도시를 경작하는 도시농부들에게 반려식물이란 무엇일까?

나는 정원을 가꾸고 싶었다. 그러나 도시에서 정원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것도 있고 환경적인 것도 있고 제약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든 생각.

‘세란아,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뭐야? 왜 정원이 갖고 싶은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는 정원을 가꾸며 누리고 싶었던 거야.’ 노동하며 흘리는 땀을 느끼고 싶었고 정성을 다해 기른 농작물의 신선한 맛을 느끼고 싶었고 농작물과 화초들의 어우러짐을 감상하고 싶었고 내 농작물과 화초와 나무들과 이야기하며 바람을 느끼고 싶었고 햇살을 느끼고 싶었고 비 오는 날 믹스커피 한 잔 마시며 텃밭 안에 존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땅에 정원을 꾸려야 오랜 세월을 지나며 정원이 더 풍성해지고 멋스러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 땅 갖기만을 고대하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내면의 질문에 현재를 즐기기로 하고, 임대하고 있던 텃밭에 꽃과 상추를 산나물과 알뿌리화초를, 장독대를, 연못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진제공: 어치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내면의 질문에 현재를 즐기기로 하고, 임대하고 있던 텃밭에 꽃과 상추를 산나물과 알뿌리화초를, 장독대를, 연못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연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내놓아야할지 모르는 임대 텃밭이 과실수와 화초와 산나물과 농작물이 어우러진 멋진 코티지정원이 되었다. 도시농부의 반려식물들은 농작물일 것이고 텃밭주변의 나무들과 잡초들일 것이고 나처럼 텃밭에 들인 화초들과 과실수들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와 70%를 공유하고 있다는 식물들을 ‘인생을 함께하는 반려(伴侶)’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서로를 길들이는 공들인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도시농부는 텃밭 식물들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먹거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라 식물이 아프다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잘 자라주면 나의 돌봄에 반응하는 것 같아 기뻐한다. 그리고 자주 텃밭식물들을 만나는 도시농부일수록 더 많은 부분들이 보인다. 내가 정성껏 돌보아 얻는 기쁨이 아니라 ‘반려식물들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찾아와 줬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반려(伴侶)라는 진정한 의미인지 모르겠다.

어치

안녕하세요. 저는 도시농부이며 심신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을 산림으로 이끄는 일을 하는 어치입니다. 맨발로 밭 일구고 숲속을 다닐 때 제일 좋습니다. 어치는 산까치라는 새를 일컫는 말로 십여 년 넘게 이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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