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확장, 생태민주주의의 시작

돌봄은 개인·가족 안의 보살핌을 넘어 학교, 마을, 사물, 자연, 미래세대의 삶의 조건까지 살피는 언어로 확장된다. 생태민주주의는 지금의 결정에서 배제된 인간 아닌 생명, 미래세대, 보이지 않는 돌봄을 민주주의 안으로 들여오는 과정이다. 결국 돌봄의 확장은 더 많이 떠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게 하는 관계와 책임을 더 넓고 섬세하게 감각하는 일이다.

들어가며: 왜 생태민주주의를 말하는가

처음부터 생태민주주의를 말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돌보고, 학교 일에 참여하고, 학부모들과 만나고, 연구소에서 강의와 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자꾸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돌보는 일일까.

아이를 돌보려면 학교를 보게 되고, 학교를 보려면 마을을 보게 된다. 밥을 차리려면 먹거리와 땅, 계절과 노동을 생각하게 되고, 사물을 버리지 않고 다시 쓰려면 우리가 쓰고 버리는 방식 전체를 묻게 된다. 그렇게 돌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넘어, 우리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지를 묻는 언어가 되었다.

생태위기는 단순히 자연이 파괴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관계와 조건이 무너지는 문제다. 폭염과 재난, 먹거리 불안, 불평등한 주거와 노동, 미래세대의 삶의 조건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누가 돌보고 있는가”, “어떤 돌봄이 보이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고 있는가”, “어떤 생명과 조건이 보이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넓어진다. 그래서 돌봄을 더 넓게 이해할 때, 생태위기는 돌봄의 위기로 다시 보일 수 있다.

돌봄의 언어가 시작된 자리

이 글은 2026년 7월 2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진행한 〈조안 트론토 교수 초청 돌봄민주주의 토론회〉 발제문이다. 행사 포스터. 제공 : 주최측

이 글에서 말하는 돌봄과 생태민주주의는 연구소, 학교, 마을, 공동체의 여러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에서의 활동, 생태전환 학부모·시민행동 365 활동1, 학부모회장과 학교운영위원장으로서의 학교자치 참여, 통장과 주민자치회 활동을 통한 마을 공론장 참여, 사물돌봄 프로젝트와 홈리스 공동체에서의 야학교사 활동, 재개발 지역 길고양이 이주 경험, 출판기획과 강의 경험이 서로 겹치며 지금의 문제의식을 만들었다. 이 목록은 활동의 성과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돌봄이라는 말이 내게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은 기후위기와 생명위기의 시대에 ‘생태적 지혜’를 함께 공부하고, 쓰고, 실험하는 공동체다. 이곳에서 생태는 단지 환경문제의 영역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먹고, 입고, 이동하고, 쓰고, 버리고, 관계 맺는 생활의 방식 전체를 다시 묻는 문제다.

연구소 안에서 맡아온 역할은 ‘소통과 협력’이었다. 처음에는 온라인 뉴스레터를 발송하는 일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연구소의 글과 강의, 행사와 문제의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닿도록 연결하는 일이 되었다. 강의와 행사를 기획하고, 강의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주제를 함께 찾고, 생태철학이나 기후위기 대응의 방식을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언어를 고르는 일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동시에 학부모로서 생태전환교육 활동도 펼쳤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학교와 마을, 교육과 생태위기, 공동체와 민주주의의 문제로 이어졌다. 이 두 자리는 서로 다른 활동처럼 보였지만, 돌봄이라는 이름을 만나며 하나의 흐름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돌봄이라는 이름을 만나다

돌봄이라는 이름을 만나기 전까지, 여러 활동은 서로 다른 일처럼 보였다. 육아와 학교 참여, 학부모 시민운동, 생태전환 활동, 연구소에서의 소통협력과 사물돌봄은 각각 다른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신승철 소장2의 글과 강의를 통해 접한 정동, 정동노동, 돌봄노동이라는 말은 이후의 활동을 이해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 언어는 연구소 안팎에서 새롭게 만나는 현장들을 다시 읽게 했다.

정동은 단순한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서로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힘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돌봄은 누군가를 위해 착한 마음을 내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관계와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자본이 감정과 관계, 돌봄의 능력까지 동원하고 착취한다는 문제의식은 돌봄이 사적인 선의나 희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때부터 돌봄은 누군가를 직접 보살피는 일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학부모들이 어떤 불안 속에 있는지, 공동체가 어떤 감정으로 움직이는지, 사물과 음식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탱하는지까지 다시 보게 하는 언어가 되었다. 돌봄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행위라기보다, 서로 영향을 받고 응답하면서 삶의 조건을 바꾸는 과정에 가까웠다.

홈리스 공동체에서 수선을 가르치던 야학 경험도 그중 하나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 교육이 아니라, 버려진 사물과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존엄을 함께 돌보는 일이었다. 사물돌봄은 고장 난 것,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 쉽게 버려지는 것과 다시 관계 맺는 실험이기도 했다.

생태민주주의: 민주주의의 확장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모두의 목소리를 들어준 제도가 아니다. 재산을 가진 남성 시민, 국민국가 안의 시민, 투표권을 가진 현재세대가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는 배제되었던 존재들이 정치의 장 안으로 들어오며 그 범위를 넓혀온 과정이기도 하다.

생태민주주의는 현재의 결정에 영향을 받지만 충분히 대표되지 못하는 존재들, 곧 미래세대와 인간 아닌 생명, 자연의 조건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가져오는 시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권리의 주체를 계속 늘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결정이 누구의 삶을 지탱하거나 훼손하는지 더 세밀하게 묻는 일이다.

생태민주주의는 환경정책을 민주주의에 하나 더 추가하는 일이 아니다. 생명, 생활, 생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가 먹는 밥, 학교의 분위기, 마을의 안전, 사물과 음식, 생태위기와 미래세대의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생태민주주의는 이 연결을 정책의 언어로만이 아니라 생활의 언어로, 권리와 책임의 언어로만이 아니라 돌봄의 언어로 더 미세하게 바라보는 민주주의다.

특히 미래세대는 지금의 결정에 깊이 영향을 받지만, 현재의 민주주의 안에서 충분히 대표되지 못한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아이의 오늘만 돌보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갈 시간과 세계의 조건을 함께 돌보는 일이다. 이 점에서 생태민주주의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합의를 넘어, 아직 말할 수 없거나 들리지 않는 존재들의 삶까지 민주주의의 감각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생태민주주의는 권리의 주체를 넓히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미 서로를 살게 하고 있는 관계와 조건을 더 미세하게 감각하고, 그 관계를 함께 결정하는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아이에서 학교와 마을, 미래세대로

이런 돌봄의 감각은 멀리서 온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 내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를 돌본다는 일은 아이 한 사람만을 살피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아이의 생활은 교실에서의 관계와 배움, 급식과 먹거리, 정서적 안전, 학교 운영과 의사결정 구조, 마을의 분위기, 생태위기와 미래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학부모 활동을 하면서 이 조건들은 더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떤 학교에서 배우고 먹고 관계 맺는지, 마을은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환대적인 공간인지, 지금의 결정이 아이들이 살아갈 시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모두 돌봄의 문제로 다가왔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오늘의 안전과 관계를 살피는 일이면서, 아이가 살아갈 시간과 세계의 조건을 함께 돌보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많은 활동의 출발에는 지금 중학교 2학년이 된 아이가 있었다. 아이에게 좋은 공동체를 물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완성된 공동체를 남겨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감각과 역량을 아이와 함께 배우고 싶었다는 뜻에 가깝다. 아이는 돌봄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체를 경험하고 배워가는 존재이기도 했다.

학부모로서 기후활동에 참여하고, 학부모 단체를 운영하고,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의 조건만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마음도 보이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이 가진 불안, 자녀를 향한 애정, 그리고 학부모 역시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부모 시민운동은 민원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살아갈 조건과 마음을 돌보는 일이었다.

장녀, 살림, 요리: 한국 사회 돌봄의 양가성

돌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다른 장은 살림과 요리에서 펼쳐진다.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사랑, 책임, 의무, 성별 역할, 가족주의가 뒤섞인 채로 전수된다. 특히 딸, 그중에서도 장녀에게 돌봄은 자연스러운 역할처럼 기대되곤 했다. ‘살림 밑천’이라는 말은 그런 기대를 잘 보여준다. 칭찬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가족 안의 돌봄과 살림을 여성에게 맡겨온 사회적 구조가 들어 있다.

돌봄이 강요되었을 때 그것은 억압이지만, 누군가를 살피고 먹이고 기다리고 함께 걷는 경험이 언제나 ‘낮은 일’만은 아니었다. 사진 출처 : Jess Zoerb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는 딸이었다. 중학생 때, 열 살 어린 동생을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고, 동생들 간식을 챙기고,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저녁식사 준비, 청소를 해놓기도 했다. 엄마는 나에게 미안해서 “아무도 너에게 시키지 않았고, 네가 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서운했고, 충격이기도 했다. 억지로만 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퇴근해서 피곤한 엄마,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동생,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생과 나누던 대화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 일들은 지금의 언어로 말하면 돌봄노동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지금의 나를 만든 감각이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도 아마 비슷하게 했을 것이다. 이 말은 돌봄을 여성에게 맡겨온 구조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돌봄이 강요되었을 때 그것은 억압이지만, 누군가를 살피고 먹이고 기다리고 함께 걷는 경험이 언제나 ‘낮은 일’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돌봄과 살림은 오랫동안 여성에게 맡겨진 노동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사랑과 책임의 이름으로 말해졌지만, 실제로는 성별 역할과 가족주의 속에서 불평등하게 나누어 맡겨진다. ‘맘충’이라는 혐오와 낙인, ‘독박육아’라는 말이 드러내는 불평등한 현실, 보이지 않는 노동, 당연하게 여겨진 책임은 모두 그 구조 안에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이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살림과 요리의 경험에는 오직 부담이나 억압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과정에서 요리는 오래된 돌봄의 방식이자 표현의 방식이 되었다. 그래서 돌봄과 살림을 ‘분담해야 할 노동’으로만 말할 때, 내가 좋아하고 의미를 느끼는 일까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읽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되었다.

물론 돌봄과 살림이 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구조는 분명히 비판되어야 한다. 다만 그 비판이 돌봄을 해온 사람의 감각과 판단, 기쁨과 능력까지 모두 ‘학습된 강요’로만 환원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돌봄과 살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조건에서, 선택권 없이 맡겨져 왔는가에 있다. 동시에 돌봄과 살림 속에서 형성된 감각과 관계의 의미 역시 함께 사유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요리에 대해 쓴 글에서 “좋은 요리는 재료를 내 뜻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다. 재료가 가진 성질을 이해하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방식을 찾는 일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이 문장은 요리에 대한 설명이면서, 돌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돌봄 역시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존재가 가진 상태와 리듬을 살피고, 그 존재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함께 찾는 일에 가깝다.

요리는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면서 누군가를 돌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대접받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일-무엇을 먹일 것인가? 채식을 하는 사람은 없는가? 얼마나 먹을 것인가? 남은 음식을 누가 가져갈 수 있을까? 등을 설계하는 일은 단순한 가사노동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밥상은 땅과 계절, 재료와 도구, 불과 물, 미생물과 시간, 함께 먹는 사람들의 관계가 만나는 자리다.

돌봄과 살림은 누군가에게는 강요된 노동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게 하는 기쁨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일을 좋아하는가에 있는 게 아니라, 거절할 수 있었는가, 함께 나눌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가치가 인정받았는가에 있다. 문제는 돌봄과 살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조건에서, 거절할 수 없는 책임으로 맡겨져 왔는가에 있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르다는 것

이 질문을 구체적으로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결혼 후 14년간 살던 동네가 재개발을 앞두었을 때였다. 그곳의 길고양이들을 돌보던 이웃과 함께 밥자리를 옮기며 이주를 도운 적이 있다. 철거 일정과 공사 계획, 이주 대책은 모두 인간의 언어로 세워졌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던 고양이들의 삶은 그 결정 안에서 잘 들리지 않았다. 철거 과정에서 다치거나 먹을 곳을 잃을 수 있는 존재들의 삶을 살피는 일은, 인간의 계획 속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신호를 듣는 경험이었다. 그 경험은 인간이 다른 생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심층생태학에서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더 큰 생명망 안에서 자신을 확장해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넘어, 인간이 다른 생명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려는 중요한 통찰을 준다.

그러나 생태계로의 자아 확장이 개인의 의식 변화나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감각에 머물 때, 서로 다른 위치와 책임은 흐려질 수 있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곧 같은 위치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는 더 많이 결정하고, 누군가는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고, 누군가는 신호를 보내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생태민주주의는 하나됨의 감각에 머무르기보다, 서로 다른 위치와 책임을 더 섬세하게 살피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생태민주주의는 이런 신호를 사소한 일로 밀어내지 않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감각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돌봄의 언어로 다시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다.

그 질문은 다시 여러 갈래로 이어진다. 누가 돌보고 있는가. 누구의 돌봄은 보이지 않는가. 어떤 돌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요구되는가. 어떤 생명은 함께 살아갈 존재로 여겨지지 못하는가. 어떤 사물은 너무 쉽게 버려지는가. 어떤 책임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지워지는가. 그리고 지금의 결정에 영향을 받지만 아직 말할 수 없는 미래세대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생태민주주의는 이런 보이지 않는 돌봄과 들리지 않는 신호들을 민주주의의 질문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돌봄의 확장은 하나됨의 선언이 아니라, 관계와 책임을 더 섬세하게 보는 일이어야 한다. 생태민주주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합의로 충분하지 않다. 현재의 결정은 아직 투표할 수 없는 아이들,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 인간 아닌 생명과 사물의 생존 조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공감보다 연민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3 공감은 가까운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강하게 작동하지만 쉽게 소진되거나 편향될 수 있다. 돌봄이 민주주의의 언어가 되려면 가까운 사람에게 느끼는 마음을 넘어, 낯선 존재와 보이지 않는 관계까지 살피는 연민의 훈련이 필요하다.

돌봄은 중동태4에 가깝다

이렇게 여러 자리에서 경험한 돌봄은 “내가 돌본다”는 능동태나 “나는 돌봄받는다”는 수동태의 문장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에는 더 복잡한 관계가 있었다. 중동태라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면서, 그 복잡함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깊이 공부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이 말이 돌봄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돌봄은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받고 응답하며 함께 바뀌는 일에 가깝다. 관계 속에서 돌봄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돌보는 사람과 돌봄받는 사람 모두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돌봄을 중동태에 가까운 경험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음식을 만들지만, 음식도 나를 돌본다. 사물을 다시 보지만, 사물도 내 삶을 지탱한다. 공동체를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공동체도 나를 살게 한다. 돌봄은 주체와 대상이 선명하게 나뉜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고 응답하는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요리에 대해 쓴 글에서 “지혜는 지금 이 재료와, 지금 이 사람과, 지금 이 순간을 새롭게 살피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돌봄도 이와 비슷하다. 돌봄은 이미 정해진 답을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사람과 사물, 지금 이 조건과 관계를 새롭게 살피는 일이다.

책임이나 권리의 언어도 중요하다. 그러나 돌봄이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볼 때 우리는 더 미세해질 수 있다. 무엇이 나를 살리고 있는지, 내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지, 내가 돌본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어떻게 돌보고 있었는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나가며: 더 난잡하고, 더 미세한 돌봄으로

이 관계는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돌봄 선언』 5 에서는 돌봄이 가족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돌봄은 낯선 사람, 인간 아닌 생명, 사물과 공동체의 조건으로까지 넓어질 수 있어야 하고, 이런 돌봄을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돌봄은 친밀한 관계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인간 아닌 생명, 사물, 공동체의 조건으로까지 번져갈 수 있다.

신승철 소장은 생태학의 가장자리효과를 설명하며, 가장자리를 단순한 주변부가 아니라 생명·사물·인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새로운 관계의 에너지가 생겨나는 자리로 보았다6.

내가 지나온 자리들도 그런 가장자리에 가까웠다. 아이를 돌보고, 부모를 살피고, 밥을 짓고, 학교와 마을의 일에 참여하고, 생태운동과 정치를 오가던 시간들은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자리들이었다. 그 경계에 서 있었기에 서로 다른 경험들이 만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다. 돌봄이라는 말도 그 관계들 속에서 조금씩 넓어졌다.

이 활동들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경계에서 생활정치가 시작된다. 생활정치7는 거창한 제도정치의 바깥에 있는 사소한 일이 아니라,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활양식 자체를 바꾸고, 먹고, 돌보고, 이동하고, 쓰고, 버리고, 관계 맺는 일상의 방식을 함께 결정하는 정치다.

연구소에서 맡아온 소통협력 역시 이런 돌봄의 일부였다. 온라인 뉴스레터를 보내고, 강의와 행사를 기획하고 알리며, 신청자를 안내하는 일은 단순한 실무가 아니었다. 강의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주제를 함께 찾고, 생태철학이나 기후위기 대응의 방식을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언어를 고르는 일은 사유와 사람, 주제와 현장, 강의와 참여자 사이의 관계를 돌보는 일이었다.

이 난잡함은 흩어짐이 아니라, 본업과 활동, 나와 가족, 나와 공동체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었다. 돌봄의 확장은 더 많은 일을 누군가에게 떠맡기자는 말이 아니다. 돌봄과 살림을 여성의 의무로 남겨두자는 말도 아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만 머무는 마음을 학교와 마을, 사물과 음식, 생명과 미래세대로 넓히는 일이다. 책임과 권리의 언어를 넘어,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살게 하고 있는지 더 미세하게 감각하는 일, 그 감각을 함께 연습하고 실패하며 다시 배우는 일이다. 나에게 돌봄은 이미 완성된 답이 아니라, 서로에게 감응하는 능력을 키우고 관계의 상상력을 넓혀가는 과정이다.

그 균형과 횡단의 자리에서, 생태민주주의가 시작된다. 더 많이 돌본다는 것은 더 많이 떠안는 일이 아니라, 더 넓게 사랑하고 더 섬세하게 알아가는 일이다. 내가 생태적 지혜와 돌봄의 언어를 남겨준 신승철 소장은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8고 했다. 돌봄의 확장은 그 사랑을 함께 살아갈 세계의 지혜로 넓혀가는 일이 아닐까.

〈조안 트론토 교수 초청 돌봄민주주의 토론회〉 행사. 주최 측 제공

  1. 서울시교육청 학부모지원센터의 학부모 전문교육 과정인 ‘생태전환길잡이’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학부모·시민 네트워크이다. 학교, 가정, 마을의 생태전환을 위해 교육, 실천, 캠페인, 정책 제안과 공론장 참여를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아이들과 함께 기후정의행진에도 참여하고 있다.

  2. 故신승철은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으로, 기후변화·생명권·생태철학·공동체운동·탈성장 등을 연구한 생태철학자이자 활동가였다. 성장주의와 탄소자본주의를 비판하며 탈성장과 생태민주주의의 관점을 제시했고, 『탄소자본주의』, 『정동의 재발견』, 『떡갈나무 혁명을 꿈꾸다』 등을 썼다.

  3. 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조현욱 옮김, 인플루엔셜, 2021. 브레흐만은 공감의 한계를 지적하며, 더 넓고 지속 가능한 태도로서 연민의 필요성을 말한다.

  4. 중동태는 능동/수동의 구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행위의 모습을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돌봄을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받고 함께 바뀌는 과정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5. 더 케어 컬렉티브는 『돌봄 선언』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사이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를 “난잡한 돌봄의 윤리”라고 부른다. 또한 여기서 ‘난잡하다’는 것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현재의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식으로 돌봄을 실천하며, 돌봄에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설명된다.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79-82쪽.

  6. 신승철, 「경계면의 흐릿함, 가장자리효과와 생태계」, 『생태적지혜 미디어』, 2021.12.17. 이 글은 생명·사물·인간 사이의 명확한 경계보다, 그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모호한 영역들에 주목하며 가장자리효과를 설명한다.

  7. 신승철 소장이 생태민주주의를 생명·생활·생태의 구도로 설명하며, 자본주의의 정상적 생활양식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그 대안으로 제시한 개념을 참조한 것이다. 신승철, 「생명위기 시대에서 생태 민주주의의 역할: 가타리의 생태학적 구도와 주체성 논의를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25, 2011, 34쪽.

  8. 신승철,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사우, 2019.

이 글은 2026년 7월 2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진행한 〈조안 트론토 교수 초청 돌봄민주주의 토론회〉 2부 발제문이다.

김은제

세상의 오만 가지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살다가 뒤늦게 생태 전환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요한 곳에 쓰임을 감사하며 동네 사람들과 잡지도 만들고, 아이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