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바틀비 혹은 상투어」 ② : 이상한 배치에 놓이게 된 바틀비

이 글은 1993년 『Critique et Clinique』에 실린 질 들뢰즈(Gille Deleuze)의 「Bartleby, ou Formule」(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93. Chapitre Ⅹ, pp. 89-114.)를 번역한 것으로, 2000년에 한국어판 「바틀비, 혹은 상투어」(김현수 옮김)라는 제목으로 『비평과 진단: 문학, 삶 그리고 철학』(인간사랑, P125-163)에 실린 적이 있다. 이번에 「바틀비 혹은 상투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총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바틀비는 독신자이다. 카프카는 독신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두 발을 디디는 데 필요할 만한 땅밖에, 또한 자신의 두 손으로 덮을 수 있을 만한 실마리밖에 갖고 있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겨울 눈 속에서 잠들어 얼어 죽는 자, 그저 산책할 뿐이지만 움직이지 않고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자.1 바틀비는 참고사항도, 소유물도, 재산도, 특질도, 특수성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너무나 침착해서[매끄러워서] 누구도 그에게 어떠한 특수성도 걸어둘 수가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그는 순간적인 존재이다. ‘나는 그러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는 바틀비의 화학적이고 연금술적인 상투어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서 ‘나는 특별하지 않습니다’를 그 말의 필수적인 보완물로 읽을 수 있다. 국왕을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한 이름 없는 사람에 대한, 현대판 율리시스(“나는 어느 누구도 아니다”)에 대한 이러한 탐구가 19세기 전체를 관통할 것이다. 그는 거대 도시에 살면서 짓눌려지고 기계화된 사람이지만, 그 곳에서 우리는 어쩌면 미래의 인간 혹은 신세계의 인간의 출현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메시아주의의 관점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그를 때로는 한 명의 프롤레타리아로, 때로는 한 명의 미국인으로 본다. 무질의 소설 역시 이런 식의 탐구를 뒤따를 것이며, 『특성없는 남자』(1932)가 사유하는 자이자 동시에 그 산물인 새로운 논리를 발명할 것이다.2 비록 무질이 멜빌의 뒤를 잇는다는 점이 우리에게 확실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바틀비」에서가 아니라, 『피에르 혹은 모호함』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성없는 남자』에서] 근친상간 커플인 울리히와 아가테는 피에르와 이사벨 커플의 귀환과 같다. 두 경우 모두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잊혀졌던 말 없는 누이는 어머니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남녀 구별이 없는 관계를 선호해 특수성으로서의 성적 차이를 없애 버린 것인데, 그 관계 안에서 피에르와 울리히는 모두 여성이거나 여성이 된다. 「바틀비」에서 바틀비가 변호사와 맺는 관계도 그와 똑같이 수수께끼적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결과, 되기의 가능성을,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표시하는 것은 아닐까? 바틀비는 그가 산책하는 장소를 정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바틀비는 광인, 정신이상자, 정신병자(정신의 “선천적이고 치유할 수 없는 무질서”)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변호사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가장 기괴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누구인지 우리가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변호사는 이제 막 상당량의 업무증가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슈레버 법원장이 승진을 받아들인 뒤에야 비로소 그 자신의 정신착란을 폭발시켰던 상황을 떠올릴 것이다. 마치 승진이 그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할 대담함을 주기라고 한 것인 양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변호사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가? 이미 그는 두 명의 필경사를 고용하고 있었고, 그들은 카프카의 보좌관들처럼 전도되어 있는 분신들이었다. 한 사람이 아침에는 멀쩡하지만 오후에는 들떠있고, 다른 사람은 오전에는 잦은 소화불량에 시달리지만 오후에는 정상에 가까워지는 식으로 말이다.

변호사는 보조 필경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런 참조사항도 없는 바틀비를 간단한 면담 뒤에 고용한다. 그의 창백한 용모는 다른 두 필경사들의 들쭉날쭉한 행동을 보상할 수 있는 일관성을 나타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 날,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상한 배치에 놓이게 한다. 바틀비는 변호사의 방과 직원의 방을 나누는 접이식 문 옆에, 변호사의 방 쪽으로 앉게 된다. 변호사의 말은 들리되 그가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틀비의 자리는 한쪽에는 옆 건물의 벽면을 마주보는 창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초원과 같은 색깔인 초록색의 높다란 칸막이 사이에 놓인다. 이런 배치가 변호사가 갑작스레 떠올린 발상의 소산인지 아니면 짧은 면담 동안 도달한 합의에 의한 것인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바틀비가 이렇게 자리가 배치된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기계적인” 작업을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변호사가 그를 그의 은신처에 머물지 못하게 할 때, 바틀비는 이 상투어를 내뱉는다. 상투어의 이 최초의 출현에, 그리고 그에 뒤이은 상투어들의 출현에 변호사는 어떤 응답이나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당혹감으로 무장 해제되고 벼락을 맞은 듯 아연실색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바틀비는 필사일 일체를 중단하고, 사무실에 붙박이로 눌러 앉게 된다.

우리는 변호사가 바틀비를 쫓아내려고 하는 조치가 얼마나 극단적인지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사무실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는 며칠 간 업무를 다른 이에게 맡겨놓고, 새로운 세입자가 쏟아낼 불평을 피하려고 도망 다닌다. 사륜마차에서 살다시피 하는 방랑하는 변호사라니 이 얼마나 기이한 도주인가! 맨 처음의 자리배치에서 시작해 이런 감당하기 힘든 카인과 같은 도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기괴하다. 변호사는 마치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행동한다. 바틀비를 살해하는 몽상과 바틀비에게 애정을 표하는 일이 그의 마음 안에서 교차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것은 일종의 광기의 공유인가? 여기서 다시 등장한 분신들 간의 또 다른 관계인가? 겨우겨우 인식된 동성애적 관계인가? (“그래, 바틀비 …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큼 사적인 느낌이 든 적이 없어. … 나는 내 삶의 예정된 목적을 꿰뚫어보고 있어. …”)3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밤도둑처럼, 바틀비는 고용주의 말은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 그의 근처 자리에 앉아 필사일을 할 것이다. 사진 출처: Scott Graham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밤도둑처럼, 바틀비는 고용주의 말은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 그의 근처 자리에 앉아 필사일을 할 것이다.
사진 출처: Scott Graham

우리는 바틀비의 고용이 일종의 계약이었다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마치 변호사가 업무 증가에 뒤이어 어떠한 객관적 참조사항도 없는 이 사람을 모든 것을 맡겨 놓을 ‘믿을만한 사람’4으로 만들기로 결심이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바틀비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 계약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밤도둑처럼, 바틀비는 고용주의 말은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 그의 근처 자리에 앉아 필사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필사본을 교정보게 하려고 (심지어 어떤 목적이 없을 때조차도) 바틀비를 칸막이 뒤에서 끌어내고자 한다면, 그가 이 계약을 파기하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바로 바틀비가 교정“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자마자 필사를 이미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바틀비는 사무실 한가운데에 붙박여서 그가 요구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시야에 노출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어떠한 필사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는 그에 관해 어떤 모호한 감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바틀비가 시력이 떨어져서 필사일을 거부한 것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시야에 들어온 바틀비는 더 이상 보거나,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는 이미 본래부터 자기 안에 있던 뭔가를 알게 되었다. 즉 전설로 내려온 선천적 결함, 그를 특정 장소에서 태어나 거기에 눌러 앉은 토착민으로 만들어주는 외눈박이-외팔이가 그것이다. 그에 반해 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도주한다고 비난받는 배신자 역할을 맡는다. 변호사가 박애, 자비 아니면 우애에 호소할 때마다, 그의 항변은 어떤 모호한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자신이 조직했던 배치를 산산조각 내는 것은 바로 변호사이다. 바틀비는 그 파편으로부터, 특색 있는 표현인 ‘나는 그러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를 뽑아내는데, 그것은 그의 주변으로 퍼지고, 다른 사람들을 물들여서, 변호사로 하여금 도망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언어 자체를 도주하게 할 것이며, 어떤 말도, 어떤 인물도 구별될 수 없는 비결정의 지대 혹은 식별불가능의 지대(도망치는 변호사, 움직이지 않고 돌처럼 굳은 바틀비)를 열어젖힐 것이다. 변호사는 부랑자가 되기 시작한 반면, 바틀비는 고요히 남아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바틀비가 부랑자 취급을 받는 것은 그가 움직이지 않은 채 고요히 있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와 바틀비 사이에는 동일시(identification)의 관계가 있는가? 그러나 이 관계란 무엇인가? 이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동일시는 대체로 서로 교환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다음 세 가지 요소들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형태‧이미지‧재현‧인물묘사‧모형, 둘째, 주체(혹은 적어도 잠재적인 주체), 셋째, 어떤 형태를 띠고, 그 이미지를 전유하고, 스스로를 이 이미지에 맞추고 또 이 이미지를 자기에게 맞추려는 주체의 노력. 동일시는 유사성의 모험 전체를 거쳐 가며, 신경증에 빠지거나 자기애(나르시시즘)로 변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는 복잡한 작용이다. 동일화는 때때로 “모방하는 경쟁”으로 불린다. 동일화는 일반적으로 부권적 기능(paternal function), 즉 탁월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동원한다. 그래서 비록 그 규정들이 교환가능하다 할지라도 주체는 아들이다. 성장소설, 혹은 우리가 손쉽게 그렇게 부를 수도 있는 이름인 ‘필독소설’(reference novel)이 그 수많은 사례들을 제공한다.

확실히 멜빌의 소설 대부분은 이미지들이나 인물묘사로 시작하며, 성장의 이야기를 부권적 기능 하에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드번』(1849)이 바로 그 예이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은 아버지의 이미지로, 조각상과 초상화로 시작한다. 『모비딕』 역시도 서두부터 여인숙에 걸려있는 어두운 그림5에 이르기까지, 고래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 이미지를 묘사하려고 정보를 모으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바틀비」도 이 규칙의 예외는 아니다. 두 명의 직원들은 대칭적인 반대 면을 가진 종이 이미지와 같다. 변호사는 부권 기능을 아주 잘 이행해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뉴욕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모든 일은 영국소설인 것처럼, 디킨스의 런던인 것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이상한 어떤 일이, 즉 이미지를 흐리며, 그것을 본질적인 불확실성으로 나타내고, 형태를 “갖추는 것”을 막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또한 그 일은 주체를 지워버리고, 주체를 표류하게 만들며, 일체의 부권 기능을 사라지게 한다. 오로지 여기에서만 사태들은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조각상은 훨씬 더 모호한 그의 초상화에 자리를 내주고, 그리고는 누구나일 수 있거나 어느 누구도 아닐 수 있는 다른 초상화에 자리를 내준다. 모든 참조사항은 사라지고, 인간의 모습은 미지의 새로운 요소에, 형태 없는 비인간적 삶의 신비에, 대왕오징어6에 자리를 내준다. 모든 것은 영국식으로 시작했지만 저항할 수 없는 도주선을 따라 미국식으로 이어간다.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은 그가 모든 곳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권 기능은 훨씬 더 애매하고 모호한 힘들을 선호하는 가운데 버려진다. 주체는 패치워크(patchwork)[다양한 모양의 문양을 지닌 천들을 이어붙인 이불이나 옷감-옮긴이]를 무한히 증식시켜 자신의 고유한 짜임새를 상실한다. 즉 미국식 패치워크는 위, 아래, 중심이 없는 멜빌 작품 전체의 법칙이 된다. 마치 표현의 특성들이 형태를 벗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것은 미지의 글쓰기의 추상적 선과 같으며, 혹은 에이해브의 이마에서 고래의 이마까지 구불구불 나 있는 주름살과 같다. 혹은 고정된 삭구(索具)[배에서 사용하는 밧줄이나 쇠사슬 등을 이르는 말-옮긴이]를 얽어매고, 선원을 바다로, 주체를 죽음으로 손쉽게 끌고 가는 위아래로 요동치는 밧줄들인 “무서운 포경밧줄”과도 같다.7 『피에르 혹은 모호함』에서 아버지의 초상화와 무척 닮은 미지의 청년을 그린 초상화가 띠는 그 불안하게 하는 미소는 그 자신을 해방시키고, 마치 그것이 주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처럼, 유사성을 파멸시킬 수 있는 특색 있는 표현으로 기능한다. ‘나는 그러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 또한 특색 있는 표현인데, 이 표현은 언어적 형식을 벗어남으로써, 그리고 아들에게서 복제하거나 필사하는 능력을 박탈하는 만큼 아버지에게서 그가 쓰는 모범적인 발화를 박탈함으로써,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에이해브는 고래를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모비딕이 된다. 
사진 출처: Abigail Lynn
에이해브는 고래를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모비딕이 된다.
사진 출처: Abigail Lynn

그 표현은 여전히 동일시의 과정이지만, 신경증적인 것의 모험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이제는 정신증적인 것이 된다. 아주 약간의 분열증은 낡은 세계의 신경증을 벗어난다. 우리는 세 가지 변별적인 특성들을 모을 수 있다. 첫째, [고정된] 형태가 없는 표현의 특색은 이미지와 대립하거나 표현된 형태와 대립한다. 둘째, 이미지에 순응하려는 (순응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더 이상의 어떠한 주체도 없다. 오히려 비식별의 지대, 식별불가능성의 지대, 애매함의 지대는 두 항 사이에서 확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두 항들이 직접적으로 그들 각자의 미분화(differentiation)를 진행시키는 지점에 도달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비슷함(similitude)이 아니라 미끄러짐(slippage), 극단적 근접성, 절대적 인접성. 자연적 친자관계가 아니라 비자연적 동맹관계. 그것은 “극한(極寒)의” 지대, “북극” 지대이다. 그것은 더 이상 모방의 문제가 아니라 되기의 문제이다. 에이해브는 고래를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모비딕이 된다. 그는 그가 더 이상 모비딕과 구별될 수 없는 근접성의 지대에 들어가고, 그래서 고래를 공격하면서 스스로를 공격한다. 모비딕은 그가 합류하는 “바싹 다가와 있는 벽”8이다. 레드번은 수수께끼 같은 형(兄)의 애매한 특징을 선호하여 아버지의 이미지를 포기한다. 피에르도 아버지를 모방하지 않고, 이복누이인 이사벨과 더 이상 구별될 수 없는 근접성의 지대에 도달하고, 여성이 된다. 신경증이 아버지와 아주 가까이 동일시하려고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의 그물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동안, 정신증은 누이와의 근친상간을 하나의 되기로, 남자와 여자의 자유로운 동일화로 해방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클라이스트는 비정형적인 것, 거의 동물적 특성을 지닌 표현(말 더듬는 소리, 이 가는 소리, 얼굴 찌푸리기)을 내뿜는데, 이는 그가 누이와 나누는 열정적인 대화를 부추기게 한다. 셋째, 바로 이것이 정신증이 자신의 꿈, 더 이상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 부권 기능의 폐허 위에 세워진 보편적인 형제애의 기능을 확립하는 꿈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이때 형제애의 기능은, 이슈메일과 퀴퀘그를 결혼한 커플로 묶어주는 무서운 “원숭이 밧줄9”처럼, 여성을 누이로, 다른 남자를 형제로 만드는 자율적인 선을 따르면서 모든 아버지의 이미지의 해체를 전제한다. 바로 이 세 가지 특성들이 함께 새로운 동일화를 구성하는 아메리칸 드림, 새로운 세계(특색, 지대, 기능)이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1. 중요한 텍스트인 『카프카의 일기』는 거의 「바틀비」의 또 다른 판본처럼 읽힌다. Franz Kafka, The Diaries of Franz Kafka: 1910-1913, ed. Max Brod, trans. Joseph Kresh, New York: Schocken, 1948, p. 26. [한글본] 프란츠 카프카, 『그대 고독의 소리를 듣는가? 1』, 박환덕 옮김, 도서출판 큰글, 2012, 29-39쪽.

  2. 블랑쇼는 무질의 인물이 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수성 없음”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는 특성이 없는 그만큼 실체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Maurice Blanchot, Le livre à venir, Paris: Gallimard/Folio, 1963, pp. 202-203쪽. [한글본]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심세광, 그린비, 2011, 264쪽을 참고하라. 이처럼 특수성 없는 인간, 현대판 율리시스라는 주제는 19세기 초에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친구인 피에르 시몽 발랑슈의 상당히 낯선 책에서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Pierre Simon Ballanche, Essais de palingénésie sociale, in Oeuvres complètes, Geneva: Slatkine Reprints, 1967, 그 중에서도 특히 “La ville des expiations”(「속죄의 도시」)(1827)를 참고하라.

  3. Herman Melville, “Bartleby the Scrivener”, in Billy Budd, Sailor and Other Stories, ed. Harold Beaver, London: Penguin Classics, 1967, p. 89. [한글본]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미국』, 한기욱 편역, 창비, 2020, 87쪽.

  4. [옮긴이주] 영어에서 ‘a confidence man’은 외형상의 뜻은 믿을만한 사람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의미가 역전된 ‘사기꾼’이나 ‘협잡꾼’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인다. 들뢰즈는 허먼 멜빌의 동명의 소설 『사기꾼』을 염두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글본] 허먼 멜빌, 『사기꾼, 그의 가면 무도회』, 이용학 옮김, 지식의날개, 2019.

  5. [옮긴이주] “박공식으로 지어진 ‘물보라 여인숙’에 들어서면 … 한쪽 벽에는 커다란 유화 한 점이 걸려 있었는데, 온통 그을리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어서, 밝기가 다른 불빛들이 교차하는 그곳에서는 눈여겨 살펴보고 여러 번 그곳에 찾아가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이웃들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해야만 비로소 그 그림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 사람을 가장 당황하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 한복판에 그려진 물체일 것이다. 길고 유연하고 불길하고 검은 덩어리인데, 그것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거품 속에 떠 있는 세 가닥의 푸르고 희미한 수직선 위에 떠돌고 있었다. … 모든 공상은 결국 그림 한복판에 그려져 있는 불길한 그 무언가에 굴복하고 만다. ‘그것’이 무엇인지만 알아내면 나머지는 모두 분명해질 터였다. 하지만 잠깐만. 저건 무슨 거대한 물고기와 비슷하지 않나? 거대한 고래를 닮지 않았나?” 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4, 42-43쪽.

  6. [옮긴이주] “향유고래잡이들이 일반적으로 이 오징어를 보는 것을 어떤 미신과 결부시켰든 간에, 얼핏 보기만 해도 그 오징어는 생김새가 너무 괴상해서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대왕오징어는 너무 희귀해서 좀처럼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다 그것이 가장 큰 바다 생물이라고 말하지만, 녀석의 진정한 특징과 형태에 대해 막연하게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향유고래의 유일한 먹이라고 믿고 있다.” 허먼 멜빌, 『모비딕』, 349-350쪽.

  7. 뒤랑(Régis Durand)은 자신의 책, Melville, signes et métaphores, Paris: L’Age d’Homme, 1980, pp. 103-107에서 형식화된 삭구들과 대립하는 포경선 안의 느슨한 선들이 했던 역할에 주목했다. 뒤랑과 자보르스키의 책은 최근에 나온 멜빌에 대한 글들 중 가장 깊이있는 분석을 해낸다.

  8. [한글본] 허먼 멜빌, 『모비딕』, 217쪽.

  9. [옮긴이주] “여러분은 이탈리아의 길거리에서 풍금치는 소년이 춤추는 원숭이를 긴 끈으로 잡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이슈메일]는 깎아지른 듯한 뱃전에서 저 아래 바다에 내려가 있는 퀴퀘그를 포경업계 용어로 ‘원숭이 밧줄’이라 부르는 밧줄로 붙들고 있었다. 퀴퀘그의 허리에는 범포로 만든 튼튼한 허리띠가 감겨 있었고, 원숭이 밧줄은 그 허리띠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둘에게 우스꽝스럽고도 위험한 작업이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이 원숭이 밧줄의 한쪽 끝은 범포로 만든 퀴퀘그의 폭넓은 허리띠에, 또 한쪽 끝은 폭이 좁은 내 가죽띠에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둘은 좋든 싫든 당분간 결혼한 셈이었다.” 허먼 멜빌, 『모비딕』, 395-396쪽.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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