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바틀비 혹은 상투어」 ① : I WOULD PREFER NOT TO

이 글은 1993년 『Critique et Clinique』에 실린 질 들뢰즈(Gille Deleuze)의 「Bartleby, ou Formule」(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93. Chapitre Ⅹ, pp. 89-114.)를 번역한 것으로, 2000년에 한국어판 「바틀비, 혹은 상투어」(김현수 옮김)라는 제목으로 『비평과 진단: 문학, 삶 그리고 철학』(인간사랑, P125-163)에 실린 적이 있다. 이번에 「바틀비 혹은 상투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앞으로 총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허먼 멜빌 저,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011)
허먼 멜빌 저,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011)

「바틀비」(1853)는 작가의 은유도 아니고, 어떤 뭔가의 상징도 전혀 아니다. 「바틀비」는 지독히도 희극적인 글이고, 희극적이란 늘 그 말 그대로 코믹한 것이다. 「바틀비」는 클라이스트,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혹은 베케트의 중편소설들과 같은 종류의 것이며, 그 작품들과 더불어 기층을 흐르며, 명망이 있는 하나의 계보를 형성한다. 「바틀비」는 말 그대로 그것이 말한 것만을 의미한다. 「바틀비」가 말하고 반복한 것은 ‘나는 그러지 않기를 택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 바로 이것이 「바틀비」가 누린 영광을 말해주는 상투어이며, 이 글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매번 반복하는 상투어이다. 야위고 창백한 한 남자가 모두를 미치게 만드는 상투어를 읊조렸다. 하지만 이 상투어의 말 그대로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곧장 어떤 말버릇, 어떤 격식을 알아차린다. ‘선호한다’(perfer)는 이런 의미로 쓰이는 일이 드물며, 바틀비의 상관인 변호사도, 그의 직원들도 대체로 그 말을 쓰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기이한 단어지요. 나 자신은 그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상투어는 그 대신 ‘나는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I had rather not)일 것이다. 그러나 이 상투어의 기이한 점은 그 말 자체를 넘어선다. 그것은 분명 문법적으로나 통사적으로 정확하지만, 그 상투어의 갑작스러운 끝말인 ‘~않기를’(not to)이, 그 끝말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규정하지 않은 채, 어떤 근본적인 일종의 한계-기능의 성격을 이 말에 부여한다. 그 말을 반복하고 강조하는 것은 도리어 그것을 더 철저히 흔하지 않는 말로 만들어준다. 부드럽고, 밋밋하며,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읊조려진 이 말은 어떤 불명료한 말-덩어리를, 단 하나의 호흡을 만들어냄으로써, 회피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한다. 이 모든 점에 비춰볼 때, 이 말은 비문법적인 상투어와 동일한 힘과 역할을 가진다.

언어학자들은 이른바 “비문법성”을 엄밀하게 분석해왔다. 아주 강렬한 여러 사례들이 미국의 시인 커밍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그는 춤췄다’(he danced his did)는 마치 누군가 프랑스어에서 ‘그는 춤추기 시작했다’(il se mit à danser) 대신 ‘그는 시작했다 춤췄다’(il dansa son mit)라고 말한 것 같다. 니콜라스 뤼베가 설명했듯이, 이런 사례는 일련의 일상적인 문법적 변수들을 전제하는 것이며, 문법적 변수들은 비문법적인 상투어를 그것들의 한계로 가질 것이다. 즉 ‘그는 춤췄다’는 ‘그는 춤추기를 했다’(he did his dance), ‘그는 춤을 추었다’(he danced his dance), ‘그는 그가 했던 바의 춤을 추었다’(he danced what he did) 등과 같은 정상적인 표현의 한계일 것이다.1 이것은 더 이상 루이스 캐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혼성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혼성-구문”, 숨-구문, 한계이거나 텐서(tensor)[벡터 계산을 단순화하기 위해 같은 성질의 여러 벡터를 한 행렬 안에 표기하고 그것을 단순화하여 표기한 것-옮긴이]일 것이다. 아마도 실제 상황에서 쓰이는 프랑스어 사례 하나를 드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벽에 뭔가를 달아 놓으려고, 못 몇 개를 손에 쥔 누군가가 “나는 못 하나를 충분하지 않게 가지고 있어.”(J’EN AI UN DE PAS ASSEZ)라고 외친다고 해보자. 이것은 일련의 정확한 표현들(“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아.” “나는 하나가 모자라.” 등)의 한계를 나타내는 비문법적인 상투어이다. 바틀비의 상투어는 이런 유형의 것이 아니었을까? 즉 바틀비 고유의 스테레오타입이자 고도로 시적인 멜빌 고유의 표현이 아닐까? 그것은 “나는 이것을 택하고 싶다. 나는 저렇게 하는 쪽을 택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등과 같은 일련의 표현들의 한계가 아닐까? 바틀비의 상투어는 이처럼 매우 정상적인 구문임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들린다.

‘나는 그러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이 상투어는 여러 가지 변이들을 갖고 있다. 때때로 그것은 조동사(would)를 버리고 ‘나는 그러지 않기를 선호합니다.’(I PREFER NOT TO)로 더 짧아진다. 이 상투어가 후반부의 사건들에서처럼, 때때로 그것은 to부정사로 완성됨으로써—“나는 대답하지 않는 쪽을 택합니다.”(I prefer to give no answer), “나는 약간의 합리적인 것도 없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be a little reasonable), “나는 서기직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take a clerkship), “나는 다른 어떤 것을 해보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to be doing something else) 등—, 그것이 가진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기이한 형상이 바틀비의 언어 안에 계속해서 떠다니면서 말없이 현존한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는 “그러나 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특별한 어떤 것도 없습니다.” ‘나는 특별하지 않습니다’(I am not particular)라고 덧붙인다. 이 말들은 어떠한 특수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그리고 모든 경우들에서 나타나는 ‘나는 그러지 않기를 선호한다’라는 엄청나게 불확실한 이 상투어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특수성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상투어는 10개의 주요한 배경 속에서 나타나며, 각각의 경우에서 그 상투어가 정확히 그 말로 반복되건 아니면 사소한 변이들과 함께 반복되건 여러 차례 나타난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필경사이다. 그는 쉬지 않고 “말없이,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한다. 첫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그에게 다른 두 직원이 쓴 필사본을 대조 및 교정하라고 말할 때 나타난다. ‘나는 그러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라고. 두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그가 쓴 필사본을 가져와 다시 읽으라고 말할 때이다. 세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자신과 개별적으로 마주 보면서 다시 읽어보자고 요청했을 때이다. 네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그를 심부름 보내려 할 때이다. 다섯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옆방에 가보라고 요구할 때이다. 여섯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어느 일요일 오전에 자기 사무실에 들어갈 때 바틀비가 거기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이다. 일곱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질문을 던져 그를 납득시키려 할 때이다. 여덟 번째 경우는 바틀비가 필사를 멈추고, 모든 필사를 단념하자, 변호사가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할 때이다. 아홉 번째 경우는 변호사가 그를 쫓아내려고 두 번째 시도할 때이다. 열 번째는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쫓겨나 층계 끝 계단 난간에 앉아 있을 때, 공황상태에 빠진 변호사가 그에게 갑작스럽게 다른 직업(포목점 점원, 바텐더, 상인을 대신한 수금업무, 젊은 신사와의 여행에 동반하기 등)을 제안할 때 나타난다. 이 상투어는 싹이 트고, 증식한다. 각각의 사건에는 바틀비를 둘러싼 ‘감각마비’가 있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말문이 막히는 일이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들었을 때의 상태와 같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다 말해서 언어를 소멸시키기라도 한 것인 양, 사건 각각에는 바틀비의 침묵이 있다. 각각의 경우마다 우리는 광기가 자라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특수하게” 바틀비에게 있는 광기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광기로, 이상한 제안을 하고, 심지어 이상한 행태를 보이기까지 하는 변호사의 광기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 상투어는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들며,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의 전염적 성격은 곧바로 자명하게 나타난다. 바틀비는 타인들의 “혀를 묶어놓는다.” 기이한 말인 ‘나는 ~을 택하고 싶다’(I would prefer)는 그만의 방식으로 점원들의 언어에, 그리고 변호사의 언어에 몰래 잠입한다. (“그래서 자네 역시 그 말에 사로잡혔군.”) 그러나 이러한 오염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그 말이 바틀비에게 끼친 영향이다. 그가 ‘나는 (대조)하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어떤 필사도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는 (필사)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고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간단히 이 단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이것을 즉시 알아채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여섯 번째 경우까지도 계속해서 필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것은 마치 처음 이 상투어가 말해졌을 때 이미 함축되었던 반응이 지연되어 왔던 것처럼 명백해 보였다. 그는 변호사에게 “스스로는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라고 말한다. 이 상투어-덩어리의 효과는 바틀비가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것에 의심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하고 있는 뭔가를, 그가 계속해서 하는 편을 택하던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틀비는 생존할 권리, 즉 막힌 벽 앞에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서 있을 권리를 쟁취했다. 사진 출처: Matthew Garoffolo
바틀비는 생존할 권리, 즉 막힌 벽 앞에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서 있을 권리를 쟁취했다.
사진 출처: Matthew Garoffolo

상투어 ‘나는 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만 한다. 바틀비는 “거부한 것이 아니며, 인정한 것도, 한걸음 나아간 것도, 그래서 이러한 전진만큼 후퇴한 것도 아니며, 발화로부터의 재빠른 후퇴 속에서 자신을 노출시킨 것도 아니었다.”2 변호사는 바틀비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는 듯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싶어 했지만, 바틀비는 그걸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선호하지 않는 일(교정보는 일, 심부름 등)을 거절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필사일에 머물러 있는 것을 택하기를 긍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단지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할 뿐이다. 요약하면 연속적으로 다른 모든 행동을 거부하는 상투어는 필사하는 행위를 이미 집어삼켰으며, 심지어 더 이상 거부할 필요조차 없다. 이 상투어는 황폐하게 만든다. 그것이 선호하지 않는 어떤 것만큼이나 선호하는 것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기 때문이다. 상투어는 그것이 언급하고 또한 그것이 거부한 용어를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보존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불가능해진 다른 용어 역시 소멸시킨다. 사실상 상투어는 그 용어들을 구별불가능하게 만든다. 상투어는 어떤 선호하지 않는 활동들과 선호하는 활동들 사이에 있는, 항상 팽창하는 식별 불가능성이나 비결정의 지대를 도려내 비워버린다. 모든 특수성, 모든 기준이 소멸된다. 그 상투어는 어떤 것이 선호되는가 선호되지 않는가와 관련해 유일한 기준이었던 “필사하는 일”을 무화(無化)시켜 버린다. ‘나는 어떤 것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는 무에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무의 성장이다. 바틀비는 생존할 권리, 즉 막힌 벽 앞에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서 있을 권리를 쟁취했다. 블랑쇼가 말했던, 순수하게 참아내는 수동성.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로서의 존재. 그는 예나 아니오를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하지만 그가 (원본 대조작업, 심부름하기 등에)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혹은 그가 (필사하는 일에) 예라고 말한다면, 그는 빠르게 패배할 것이며, 쓸모없다고 평가받을 것이며,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이들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결정을 미룬 채 주위를 맴돎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그의 생존방식은 원고를 대조하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또한 필사를 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후자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전자를 거부해야만 했다. 그 상투어는 두 개의 국면을 가지며, 다시금 동일한 상태들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을 계속 재충전한다. 이것이 바로 변호사가 매번 모든 것이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현기증 나는 인상을 받았던 이유이다.

우선 이 상투어는 외국어의 잘못된 번역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 말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분명하게 알아듣는다면, 그것의 훌륭함이 이런 가설을 반박한다. 언어 안에 일종의 외국어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상투어일 것이다. 커밍스 작품의 비문법적 구문들은 표준 영어와는 다른 어떤 사투리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의 창조의 규칙들은 그로부터 추출될 수 있다고 제시되어 왔다. 바틀비도 마찬가지이다. 그 규칙은 이러한 부정적인 선호의 논리, 모든 부정을 넘어서는 부정주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문학의 걸작들이 항상 그것이 쓰여진 언어 안에 일종의 외국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따라 어떠한 광기의 바람이, 어떠한 정신증적인 숨결이 언어 전체의 일부가 되는가? 정신증은 그 특성상 일상어와 표준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원래의 언어에 “바치게” 하는 방식으로 일상어와 표준어를 다루는 절차를 가동시키는데, 그 절차는 아마도 신의 언어의 투사일 것이며, 그래서 언어 전체를 실어 나르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절차들이 프랑스에서는 레몽 루셀(Raymond Roussel)과 장-피에르 브리세(Jean-Pierre Brisset), 미국에서는 루이스 울프슨(Louis Wolfson)에게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미국 문학의 분열증적 소명이 아닐까? 즉 (표준적인 통사론(syntax)과는 달리) 표류, 일탈, 탈-배열(de-tax), 부가-배열(sur-tax)에 의해 영어를 이런 식으로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영어의 신경증에 약간의 정신증을 도입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보편성을 발명한 것이 아닐까? 영어가 폭풍과 천둥과 같은 신의 언어를 흉내 내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다른 언어들이 영어로 소환될 것이다. 멜빌은 영어 아래에 흐르면서 영어를 실어 나르는 외국어를 발명한다. 그것이 바로 이국적인 혹은 탈영토화된 언어, 즉 고래의 언어이다. 그 때문에 숫자들과 글자들, 그리고 그것들의 수수께끼 같은 의미에 기초하는 모비딕(1851)의 연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적어도 비인간이나 초인간의 원초적 언어의 뼈대를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3 그것은 마치 세 가지 작용들이 한꺼번에 연결되는 것과 같다. ‘언어에 대한 일정한 치료’, 이 치료의 결과로 나타나는 ‘언어 안에 원초적 언어를 구성하려는 경향’, 그리고 그 효과로써 침묵이나 음악과 같은 언어의 외부를 발견하기 위해 언어를 창공으로 날려 보내고 그 한계로 밀어붙임으로써 ‘언어를 완전히 싹 쓸어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위대한 책은 항상 다른 책을 뒤집어 놓는데, 이는 영혼 안에서 침묵과 피로서만 쓰여질 수밖에 없다. 모비딕 뿐만 아니라 피에르 혹은 모호함(1852)이 바로 이 경우이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에서 이사벨은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언어 전체를 통기타의 음조와 화음으로 이끌어 가는 일종의 ‘통주저음’4으로 언어를 감염시킨다. 그리고 또한 천사 같고 아담 같은 빌리 버드(1891)5의 주인공이 있는데, 그는 언어의 본성을 뒤바꿔놓는 말더듬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또한 언어 전체에 천국의 내세(Beyond), 음악적인 내세를 생겨나게도 한다. 그것은 마치 [변신에서] 여동생이 그레고르에 응답해 바이올린을 켤 준비를 하는 동안 들려온, 말들의 공명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찍찍하는 소리”6와 같다.

바틀비 역시 천사 같고 아담 같은 본성을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말더듬이처럼 언어를 다루는 식의 일반적인 절차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좀 달라 보인다. 그는 특정한 상황들에서 불쑥 나타나는, 겉보기에는 고작 국소적인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표준적인 짧은 상투어에 만족한다. 하지만 그 결과와 효과는 동일하다. 즉 언어 안에 일종의 외국어를 개척해놓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언어 전체를 침묵과 마주하게 만들고, 언어 전체를 침묵으로 꼬꾸라뜨린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바틀비」는 ‘시’의 음악에 의해서만 깨지는 긴 침묵을 암시한다. 멜빌은 긴 침묵에 들어갈 것이고 『빌리 버드』를 제외하면 결코 그 침묵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다.7 바틀비는 이 상투어를 읊조릴 때마다 스스로 칸막이 뒤로 물러나 침묵하며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출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는 감옥에서 최후의 침묵을 할 때까지 계속된다. 상투어를 말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게 된다. 즉 상투어는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특수성을 극복하면서 하나의 절차로 기능한다.

상투어는 말들을 식별불가능하게 하고, 언어를 파헤쳐 텅 빈 공간으로 된 비결정의 지대를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Priscilla Du Preez
상투어는 말들을 식별불가능하게 하고, 언어를 파헤쳐 텅 빈 공간으로 된 비결정의 지대를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Priscilla Du Preez

변호사는 스스로 바틀비의 상투어가 어떻게 언어 전체를 파괴하는지를 설명할 하나의 이론을 날조해낸다. 그가 제시했듯이, 모든 언어는 지시체나 전제들을 갖고 있다. 이 지시체 및 전제들은 언어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언어로 하여금 지칭을 허용하게 하는가를 말해준다. 하나의 단어는 항상 그것을 대체하고, 완성할 수 있고, 그것으로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단어들을 전제한다. 바로 이러한 조건 위에서 언어는 그런 식으로 명확하고 객관적인 일련의 관습들에 따라 사물들, 사물의 상태들, 행동들을 지칭하도록 분배된다. 그러나 또한 암묵적이고 주체적인 다른 관습들, 다른 유형의 지시체나 전제도 있다. 말을 하면서 나는 단지 사물들과 행동들을 지시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나는 또한 우리 각자의 상황들을 유지하면서 대화자와의 관계를 보증할 행동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즉 나는 “발화행위”(speech acts)를 명령하고, 따져 묻고, 약속하고, 요청하고, 입 밖에 낸다. 발화행위는 자기-지시적(나는 “나는 너에게 …을 하라고 명한다”고 말함으로써 명령한다)인 데 반해, 사실 진술적 명제들은 다른 사물들이나 다른 단어들을 지시한다. 바틀비가 파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지시체계이다.

상투어 ‘나는 그러지 않은 쪽을 택하겠습니다’는 다른 모든 선택지를 배제하며, 그 말이 다른 모든 것과 스스로를 거리를 두게 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보존하려고 하는 것을 집어삼킨다. 이 상투어는 바틀비가 필사를 중단한다는 것을, 그가 말을 재생산하기를 중단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이 상투어는 말들을 식별불가능하게 하고, 언어를 파헤쳐 텅 빈 공간으로 된 비결정의 지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상투어는 또한 고용주가 명령하는 데 사용하는, 친절한 한 친구가 질문을 하거나 아니면 믿을만한 한 남자가 약속을 하는 데 사용하는 발화행위를 좌절시킨다. 만일 바틀비가 거절을 했다면, 그는 여전히 한 명의 반역자나 반란자로, 그래서 여전히 어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투어는 모든 발화행위를 좌절시키며, 그와 동시에 바틀비를 어떠한 사회적 지위도 부여할 수 없는 순수한 외부인으로 만든다. 바로 이것이 변호사가 두려움으로 힐끔거린 이유이다. 즉 바틀비의 이성을 회복시키려는 그의 모든 희망은 내동댕이쳐진다. 왜냐하면 그 희망들은 전제의 논리에 의존하기 때문인데, 그 논리에 따르면 고용자는 그가 명령에 따라줄 것이라고, 아니면 어느 친절한 친구는 그가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에 반해 바틀비는 언어 전체의 전제를 침식하기에 충분한 하나의 새로운 논리, 선호의 논리를 발명했다. 마티유 랭동이 지적했듯이, 이 상투어는 말과 사물, 말과 행동을 “차단하며”, 나아가 발화행위와 말 역시도 “차단한다.” 이 상투어는, 참고할만한 어떤 것도 없는 사람이 되려는,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누군가가 되려는, 그 자신과 관련된 것도 없고 다른 어떤 것들과 관련된 것도 없는, 바틀비의 절대적 소명의식에 따라 언어를 모든 준거점으로부터 절단한다.8 이 상투어가, 비록 관습적으로 등장함에도 불구하도, 진정한 비문법성으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1. Nicolas Ruwet, “Parallélismes et déviations en poésie”, in Langue, discours, société, ed. Julia Kristeva and Nicholas Ruwet, Paris: Seuil, 1975, pp. 334-344. (on “portmanteau-constructions”)

  2. Philippe Jaworski, Melville, le désert et l’empire, Paris: Presses de l’Ecole Normale, 1986,

  3. Viola Sachs, La contre-Bible de Melville, Paris: Mouton, 1975를 참고하라.

  4. [옮긴이주] 통주저음(通奏低音, basso continuo) 17-18세기 유럽 음악에서, 건반 악기의 연주자가 주어진 저음 외에 즉흥적으로 화음을 곁들이면서 반주 성부를 완성시키는 기법 및 그 저음부분을 가리킨다. 독주파트가 쉴 때도 저음은 악곡을 계속 연주하기 때문에 통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5. [한글본] 허먼 멜빌, 󰡔수병 빌리 버드, 평전󰡕, 황문수 옮김, 2007.

  6. [한글본] 프란츠 카프카, 󰡔변신󰡕, 이주동 옮김, 솔, 2003, 112쪽.

  7. 바틀비와 멜빌의 침묵에 대해서는, Armand Farrachi, La part du silence, Paris: Barrault, 1984, pp. 40-45를 보라.

  8. Mathieu Lindon, “Bartleby,” Delta 6, May 1978, p. 22.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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