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써먹자 – 성 고정관념 극복

폭염이 심해지면서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양산을 쓰라 권유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국가, 지역을 운영하는 측에서는 ‘누구나, 특히 남성도 양산을 쓸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래서 기업은 ‘남성도 쓸 수 있는’ 꽃무늬가 없는 양산을 제작하고 있다. 유례없는 폭염이라는 현상은, 양산의 필요를 만들어냈다. 이런 필요를 제대로 누릴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이 남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도구로써 어쩌면 디자인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무더운 날의 그늘

‘그늘 밑에 있으면 버틸 만하더라’는 날씨에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표지판이나 가로등, 가로수, 그리고 그것들에 매달린 현수막의 그늘에까지 본능적으로 몸을 들이밀게 된다. 충격적으로 더운 날이 아니라면 그늘 안과 밖의 시원함은 차원이 다르다. 물론 더위와 상관없이 햇빛에 눈이 부셔 얼굴만이라도 그늘 아래 들이밀 때도 있다. 이럴 때 내 얼굴 그림자를 보면서 조정하면 좋은 자리를 찾기 수월하다.

이렇게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생활지혜(?)를 발휘할 때도 있지만, 난 아예 그늘을 가지고 다닌다. 해가 쨍쨍한 날 손쉽게 만들 수 있는 1인용 그늘은 꽤나 쓸 만하다. 양산 겸 우산이란 것도 시중에 나와 있으니 얼마나 유용한가(색상과 재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 우산도 자외선을 웬만큼 차단해준다고 한다). 모자가 답답하거나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이라면, 넓은 챙 모자와 썬크림보다 양산이 제격일 것이다.

양산을 꺼린다고?

나는 우산으로 열심히 햇빛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이라 그런지, 얼마 전 신승철 선생님이 제기한 “남성들이 양산을 꺼리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다”는 문제의식에 별로 공감되진 않았다. 또래 세대에서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한테서도 양산 쓰고 다니기가 꺼려진다는 얘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이럴 때는 무작정 자료를 조사해보면 실마리가 풀리는 경우가 있다. ‘남성’과 ‘양산’을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다.

출처 Pixabay

올해 대구, 사천, 제천, 안산 등에서 양산 쓰기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지역 단위나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양산을 쓰라고 권유하는 캠페인은, 유례없는 폭염이 몰아친 작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체면 차릴 때가 아니라는 구호와 함께 남녀노소에게 권유하고 있지만, 남성도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남성이 양산을 꺼린다는 인식은 제법 일반적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취업포털 커리어에서 진행한 2019년 7월 설문조사 보도 자료에서도 “‘양산 사용자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말에 ‘여자 전용(56.1%)’이라는 답변이 ‘남녀 공용(44%)’이라는 의견보다 많았다”고 한다.

SBS 뉴스 <“남자도 양산 쓰세요”… 더위 대책 시동 거는 일본〉 기사에서는 “일본 환경성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69.8%가 양산을 사용하는 반면 남성은 14.3%에 머무르고 있다”고 전한다. 물론 한국의 통계자료가 아니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양산을 쓰는 남녀 성비는 일본과 그리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디자인으로 ‘함께 변화’

지난해 폭염이 극심해지면서 온열질환자 수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양산을 쓰라 권유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국가, 지자체를 운영하는 측에서는 ‘누구나, 특히 남성도 양산을 쓸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기업들도 ‘남성도 쓸 수 있는’ 꽃무늬가 없는 양산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물론 남성들이 양산을 안 쓰는 이유가 꼭 디자인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팔이 아파서, 들고 다니기 무겁고 불편해서일 수도 있다. 다만, 정말 가벼워 들고 다닐만한 양산이 나온다고 해도 남성뿐만 아니라 누가됐든 무늬나 색깔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벼움과 편리함 외에 색깔과 모양 등을 뜻하는 ‘디자인’은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혹은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일 것이다.

폭염이란 현상은 양산이라는 도구의 필요를 만들어냈지만,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런 필요를 누릴 수 없게 방해하고 있다. 애초에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해결될 일인 건 맞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과 사회 분위기에서 홀로 먼저 자유로워지는 건 만만찮은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함께 변화할 수 있도록 내미는 손길이 아닐까? 물론 ‘남성을 위한’ 양산 자체도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제로 하는 디자인이긴 하다. 그렇지만 남성만의 디자인이 있다는 믿음은 남아있을 지라도, 이미 양산이라는 물건 자체의 성 구분이 허물어지는 건 확실해 보인다.

양산이라는 물건 자체, 양산을 드는 행위 자체로 더 이상 성을 구분 짓지 않게 된다면, 그 다음은 디자인에 대한 인식 역시 변해야 한다. 그늘이 모두를 위한 곳인 만큼, 그 아래 머무는 동안에도 따가워서는 안 되니 말이다.


자료출처 :

호찬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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