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장으로의 문명의 전환, 생태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의 전략지도] 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

이 글은 바야흐로 저성장, 역성장, 탈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협동조합이 어떤 대응과 적응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지 그 전략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성장을 몰적인 것으로, 저성장을 분자적인 것으로, 제로성장을 원자적인 것으로, 역성장을 양자적인 것으로 보는 초극미세전략의 일부이다. 여기서 몰은 집중성으로, 분자는 유한성으로, 원자는 순환성으로, 양자는 확률성에 대당된다는 이론적 가추법(abduction)을 적용해 보았다. 이 글은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주관으로 2019년도에 수행된 연구과제 결과물이며, 원문을 나누어 총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

  1. 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성장의 블랙홀(몰mole : 집중과 수렴의 단계)
  2. 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지속가능한 발전전략(분자molecular : 유한성과 특이성의 단계)
  3. 제로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내발적 발전전략(원자atom : 순환성의 단계)
  4. 역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질서 있는 감축전략(양자quantum : 경우의 수의 초미세전략)

(1) 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성장의 블랙홀(몰mole : 집중과 수렴의 단계)

만능열쇠, 성장이라는 블랙홀

지난 시대는 달콤한 성장의 떡고물로 가득했다. 벌이는 일마다 다 잘 되었으며, 공장, 학교, 시설, 기관 등의 현장에서는 사람이 귀했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나 차별, 착취, 빈곤 등의 문제는 모두 다 이러한 성장의 부수효과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자본의 초고속 성장은, 70~90년대 한국사회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부를 정도로 강력한 변화의 힘이었다. 사회는 적대와 모순, 차별, 빈곤, 불평등, 사회부정의 등의 갖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장이 그것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보수든 진보든 누구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임금인상이나 분배와 복지, 원조, 자원투여 등을 가능케 할 만능 해결열쇠가 바로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의 쟁점은 성장을 기본전제로 어떻게 분배할 것이며, 어떻게 성장을 더욱 더 잘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사회구조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의심될 수 없는 공리계였으며, 우주 끝까지 뻗어나갈 기세를 갖는 자본의 흐름이기도 했다.

성장주의 사회는 적대와 모순, 차별, 빈곤, 불평등, 사회부정의 등의 갖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장이 그것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보수든 진보든 누구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임금인상이나 분배와 복지, 원조, 자원투여 등을 가능케 할 만능 해결열쇠가 바로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by Skitterphoto
성장주의 사회는 적대와 모순, 차별, 빈곤, 불평등, 사회부정의 등의 갖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장이 그것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보수든 진보든 누구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임금인상이나 분배와 복지, 원조, 자원투여 등을 가능케 할 만능 해결열쇠가 바로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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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성장이 가능한 이유는 외부 즉, 생명과 자연, 제 3세계, 민중 등의 현존에 있었다. 자본은 외부의 영역을 탐험, 모험, 약탈, 착취, 횡단, 포획 등을 통해 내부로 끌어들여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낙차효과를 강렬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낙차효과는 특이점과 특이점 사이를 연결함으로써 낳게 되는 잉여, 부산물, 잔여물 등의 시너지효과이다. 마찬가지로 기호와 기호 사이에서도 이것이 가능하다. 문명의 외부는 정립되고 교육되고 계몽되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명의 외부라 판단되는 소수자, 광인, 동물, 민중, 어린이, 자연에 대한 훈육과 계몽, 구획화의 일방적인 통제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역으로 문명의 외부는 자율성, 야성성, 실천성의 원천이라고 판단됨으로써, 민중운동이 발아할 수 있는 원천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내부로의 포획의 신화가 자본의 신화라면, 외부로의 탈주의 신화는 민중의 신화로 동전의 양면처럼 이분화 되었다. 그리고 자연과 생명이라는 외부는 철저히 약탈당하고 이용당할 대상에 불과했다. 근대철학의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은 철저히 외부를 대상으로 삼는 도구적 이성의 토대가 되며, 이는 성장의 핵심 이념이 된다.

성장주의는 바로 성공주의, 승리주의, 경쟁사회, 속도사회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개인의 화려한 성공신화는 모두 자본주의의 성장을 원동력으로 한다. 근대자본주의는 에너지의 집중과 수렴을 통해 개인이라는 주체성을 구조화하는 데 성공했다. 개인이 등장한 배경에는, 에너지에 대한 사적인 독점이 가능해진 시스템이 숨은 전제로 늘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소수자, 민중, 생명 등은 외부에 있었지만, 이 외부로부터 벗어나 내부에 있는 권력의 중심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관리, 자기계발, 자기통치를 통해 성공한 개인이라는 상과 이미지를 모방하거나 이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삶의 모티브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형태는 결국 성장의 블랙홀에 수렴되는 것이 통속적인 결말이다. 여기서 성공한 개인은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주의적 주체성으로 간주되었고, 나머지 민중들은 아직 얼굴을 갖지 못한 사람,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 열외자, 배제된 자, 추방된 자이기도 했다. 87년도 민주화 시대의 목소리 역시 성장에 따른 분배에 초점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권리주의적 주체 즉 개인의 목소리를 주인공으로 하여 민중이라는 청중에 이념이나 교리를 투사하는 작동방식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특징은 민주주의 담론이 성장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이를 오히려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와 자본주의적 진보는 전제조건에서 큰 차이가 없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좌우파의 공리계의 공통지반은 단연코 성장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생명의 대리인이자 시중꾼으로서의 인간이라는 특이점이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으며, 단지 인간을 둘러싼 환경으로써의 공해와 오염, 산업재해, 먹거리 등이 환경운동의 주된 주제였을 뿐이었다.

몰적 단계 : 집중과 수렴, 자동성의 단계

프랑스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모델에 집중하고 수렴되는 몰(mole)적인 형태와 여러 모델을 횡단하며 이행하고 변이되는 분자적인(molecular) 형태를 구분한다. 화학에서 몰은 질량의 최소단위라면, 분자는 속성의 최소단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몰적인 것이 ‘의미와 일’ 모델이라면, 분자적인 것은 ‘재미와 놀이’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필요하다. 만약 당신이 아이들에게 한 시간 동안 코끼리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면 아이들은 이 놀이에 한 시간 동안 집중하고 수렴되는 것을 강제 받을 것이고, 의미와 일로 간주될 것이다. 반면 아이들을 한 시간 동안 자율적으로 놔두면, 코끼리 놀이, 병원 놀이, 자전거 놀이 등으로 횡단하고 이행하고 변이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몰적인 것이 자동성에 기반한다면, 분자적인 것은 자율성에 기반한다. 이렇듯 몰적인 것은 자동적이고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구성하는 의미화된 질서를 드러내기 때문에, 반드시 관료제지층을 수반한다.

물론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은 서로 교섭하고 연합되지만, 성장주의 시대는 분자적인 것보다 몰적인 것을 사회적인 조직화의 모델로 삼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조직화 방식의 측면에서 볼 때 소수자집단, 생태주의자, 공동체 등의 배치에서 생성되는 욕망이 분자적인 것이라면, 계급이나 관료, 정치집단 등의 배치에서 유래되는 계급이익이나 집단의 이해, 소비자의 권리 등은 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지층에서 들끓는 분자적인 욕망이 몰적인 이익과 이해로 번역되고 해석되어 환원되는 것이 성장주의 시대의 회수와 재구조화의 작동방식이었다. 결국 분자적인 실천과 행동으로 이르는 실천적인 행위의 원인은 이익이나 이해, 욕구 등으로 해석되고 번역되어 이를 초래한 것으로 간주된다. 즉, 따분한 노동, 지루한 학습, 고단한 가사노동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한 저항의 움직임은 철저히 임금, 복지, 소득 등으로 환원된다. 그런 점에서 빈곤, 불평등, 차별, 사회부정의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되는 방식은 그 알량한 돈이었을 뿐이다. 오로지 사람들로 하여금 고도로 집중하게끔 만드는 의미와 일의 모델이라는 일반화된 시스템을 작동시키도록 강제하는 것이 바로 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의미화의 논법은 몰적 질서의 기본 토대였다. 만약 누군가가 “~은 ~이다”라고 의미화하고 단정내릴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몰적인 질서의 설립과 관련된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생산의 능력은 단연코 지식인, 전문가, 관료 등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몰적 질서의 설립을 주도하는 전문가들이야말로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됨으로써, 고정관념, 제도, 기능 등을 설립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몰적인 질서 속에서는 ‘의미=권력’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전문가들의 지식은 철저히 보편어법을 통해서 외부와 우발성을 차단하면서 소수의 기획에 집중된 무소불위의 진리체계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다. 이처럼 전문가들의 대답을 수용하고 체득하는 학습과정과 도제과정조차도 대부분 몰적인 질서 즉 의미와 일 모델의 작동에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밑돌 빼서 윗돌 얹는 성장주의의 허상

80년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성장주의가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으로 이행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는 금융자본의 작동방식, 즉 미래의 구매력을 끌어당기고 차압하는 행위에 기반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의 이자와 구매력, 생산물 등이 자본 증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포디즘의 몰락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양적인 질서의 종말이며, 동시에 분자적인 욕망의 폭발적인 양상이었던 68년 혁명에 따른 패러다임의 전환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또한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은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자본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한 배경이 된다. 즉, 모든 소통, 인지적 질서, 관계망, 배치 등이 계산 가능한 코드 내부로 구성될 수 있다는 자본의 자신감이 그것이다. 성장주의는 개발, 토건, 굴뚝산업 등으로부터 벗어나 가상적인 작동방식도 갖게 된다. 더 이상 실물적인 성장이 성장을 주도할 수 없을 때,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은 실물이 갖고 있는 미래의 가치까지 끌어다 쓰며 이를 가상적인 자본의 흐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인터넷, 네트워크,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은 자본의 폭주, 탈주, 도주 등의 흐름을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는 판이 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성장의 지표는 계속 증대되지만, 그것은 밑돌을 빼서 윗돌을 올리는 금융자본의 불안정성을 그대로 노출한다. 자본에게는 점차 개척하고 개발할 외부가 사라져가고 있는 점은 분명했지만, 스스로 내부자거래를 하면서 외부를 만드는 개혁과 혁신에 착수한다. 실물적인 토대가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신용이 신용을 낳고 무한반복하면서 거대한 자본의 구조물이 되는 금융자본의 직조방식이 현물적인 성장을 대신한다. 기술혁신은 가속화되지만 대부분 기존에 있었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 자연, 생명 등에 대한 약탈이 중심이 된다. 심지어 주권체제 역시도 외부를 소멸시키는 이러한 방향성 속에서 영향력이 축소되며, 자본주의는 점차로 통합되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화’라고 지칭되는 상황으로 나타났다. 즉, 주권의 외부를 소멸시킴으로써 갖게 되는 낙차효과 –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금융자본이 움직일 영토를 획득하는 것 – 조차도 자본의 증대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포디즘의 몰락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양적인 질서의 종말이며, 동시에 분자적인 욕망의 폭발적인 양상이었던 68년 혁명에 따른 패러다임의 전환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by Koushik Chowdavarapu
포디즘의 몰락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양적인 질서의 종말이며, 동시에 분자적인 욕망의 폭발적인 양상이었던 68년 혁명에 따른 패러다임의 전환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by Koushik Chowdavarapu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자연과 생명, 제 3세계, 공동체 등이 문명의 내부로 통합되어 갈 때 점차 성장의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성장이 외부를 개척하고 개발하고 약탈하는 작동방식을 통해서 점차 자본을 증대시켜 나갔던 방향성과 달리, 외부라고 여겨져 왔던 자연, 생명, 제 3세계가 대부분 내부로 통합되어 들어와 버리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때 자본의 입장은 이제 외부를 가상적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내부를 약탈하는 방향성으로 향한다. 이러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색다른 상황은 문명 전반을 비슷비슷하게 만들고, 문화향유, 미디어, 소비생활 등을 동질화한다. 그런 점에서 몰적인 통합, 적분, 동일성을 통해서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여 낙차효과를 통해 자본을 형성하던 시기는 점차 종결된다. 자연과 생명, 공동체 등은 생명공학이나 유전자공학, 나노기술, 전자직조기술 등에 의해서 외부라고 할 수 없도록 내부로 인입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장주의는 스스로의 성장의 동력인 외부를 상실함으로써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이제 외부는 야생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보호되고 양육되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외부로 간주된 야생동물의 경우에 이제 몸에서 털이 자라듯 그대로 놔두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돌보고 보전하는 행위를 해야지만 유지될 수 있는 ‘내부의 외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성장의 동력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지속되는 금융자본의 성장은 실물조차도 동반하지 않는 자본의 엄청난 자기증식과 투기, 도주 등으로 현현하게 된다.

제본스의 역설과 효율성의 허점

자본주의적 진보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기술혁신이다. 기술혁신은 에너지, 자원, 노동 등을 효율화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공식으로 향한다. 성장주의는 기술혁신을 통해서 무한한 진보를 약속받은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슘페터의 기술의 변환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는 ‘창조적 기업가’라는 개념도 이러한 기술혁신과 자본주의적 진보의 공식에 따르는 것이다. 기술혁신이 보여주는 성장의 그림은 효율성의 극대화가 결국 다시 성장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 기반한다. 혁신과 효율성에 따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파괴가 줄어들 것이라고 여겨지면서 친환경, 효율, 에너지절약 등으로 불렸던 부분이 바로 다시 자본의 증대와 더 많은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를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결국 제본스의 역설에 따라 기술의 효율화를 통한 환경보전이라는 신화는 기각된다. 대부분의 기술은 혁신과 효율성을 통해 더 많은 성장을 하려는 방향성에 있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되어서 기후변화나 생물 종 대량멸종을 막을 것이라는 기술낙관론의 논변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기술발전의 고도화는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으로 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상황으로까지 나아간다. 다시 기계파괴자 즉 러다이트(Luddite)의 역사를 상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술의 고도화는 인간의 자존감과 노동의 가치 상실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를 테면 근대 시기동안 도제조합과 같은 전통에서 기술을 제어하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오늘날에 해명이 된다. 기술발전은 성장의 견인차로 불리지만, 인간 자체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기본 속성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성장의 성격조차도 일자리 증대 없는 성장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즉, 효율성의 극대화는 극도로 위생적인 자본의 증대를 만듦으로써, 인간이라는 오류투성이의 존재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국면까지 진행된다.

기술낙관론자들은 기후변화의 상황 또한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대안이 바로 탄소고정술이다. 그런데 과연 이 기술이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문제는 실험실에서의 탄소와 생태계에서의 탄소는 작동 상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실험실 밖에서 여러 요인들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태계로 탄소고정술이 적용될 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성장주의 시대 기술혁신은, 본질과 이유는 모르지만 작동은 하는 가전제품 유형의 기술시스템을 구축한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더 고도화되면 인공지능, 로봇, 딥러닝기술과 같이 작동이유조차도 아무도 모르고 작동하는 기술이 등장할 수 있다. 결국 기술의 발전이 고도화되면 결국 인간에 대한 뺄셈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본질이나 이유조차도 알 수 없는 기술의 등장이 예고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환경위기, 생명위기에 대한 기술적인 대처는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또 다른 위험부담을 갖게 되는 결과로 향할 수 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제본스의 역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술발전이 만들어낸 효율성의 여지는 바로 환경과 생명의 보존을 위한 여유분이 아니라, 성장을 향한 여지가 된다는 점을 말이다.

성장주의 시대의 정부와 국가형태

성장주의 시대의 국가형태는 ‘성장주도형 국가’라고 요약할 수 있다. 70~80년대 성장이 가속화되던 시점에서의 국가는 어떻게 하면 성장이 더 잘 되도록 만들지가 관건이었다. 모든 제도와 시스템은 성장률의 증가를 위해서 총동원되었고, 이에 따라 정부지원이 제도적으로나 실물적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재벌이라는 특이체질의 기업형태와 정경유착의 낡은 고리는 사실상 성장주도형 국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부정책의 평가의 척도는 대부분 성장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제동을 거는 모든 것이 정부가 척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성장주의 시대의 몰적 형태의 집중과 수렴이 일반화된 모습을 반영한 것이 바로 독재와 파시즘 유형의 국가였다. 당시 성장의 가속화는 민주주의보다는 성장주도형 국가유형으로 집중과 통합, 적분에 따르는 몰적인 통치형태인 독재를 선호하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조차도 거울과 같이 또 다른 몰적인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규제완화의 슬로건은 국가의 규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몰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의 규제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역설을 의미한다. 
by Matteo Catanese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규제완화의 슬로건은 국가의 규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몰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의 규제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역설을 의미한다.
by Matteo Catanese

성장주의 시대 관치라고 불리던 통치형태는 국가의 중심성을 유지하면서 시장, 사회 등을 조직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라는 관념은 국가와 공동체의 성격이 융합된 상상적인 국가유형을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낭만적인 느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도형 토건, 개발사업들이 대거 한국사회에 불도저와 같이 변화를 만들어냈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이 사라지거나 고립되는 상황을 초래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테면 70년대 농협이라는 협동조합도 관치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이는 화석연료와 화학물질 등에 기반한 농업형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당시 새마을운동의 경우에도 관주도 마을 만들기 사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였다. 이를 테면 지붕계량사업에 쓰였던 슬레트지붕이 1급 발암물질인 석면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는 무감했고, 유기농업을 파괴한 대가로 살포되었던 농약과 비료가 토양침식을 유발하여 불모지화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당시에는 무감했다. 이러한 사업들은 대부분 농촌을 도시의 전진기지로 만들거나 식민화하려는 기획 속에서 이루어진 관치의 사례들이다.

동시에 성장주도형 국가의 유형은 ‘관리=관료형’ 국가유형으로도 나타난다. 제도와 시스템이 자동적인 기능 위주로 짜여 있기 때문에, 관리가 용이했고 기능연관에 따라 맞아떨어지는 관료시스템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성장주도형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 이행하면서 규제완화라는 색다른 통치방식에 따라, 관리형 국가시스템은 대대적으로 개편된다. 즉, 시장이 성장을 주도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행하면서, 더 이상 국가주도형 성장방식이 아닌 시장주도형 성장방식으로 바뀌면서 작고 강한 정부 형태의 통치형태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작은 정부, 규제완화, 자유시장 등을 말하고 있었지만, 성장주의적인 형태의 국가유형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국가의 몰적인 중심에서 시장의 몰적인 중심으로의 이행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규제완화의 슬로건은 국가의 규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몰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의 규제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역설을 의미한다. 결국 이 당시 시장의 몰적인 유형의 조직화는 분자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몰적인 소비로 환원하는 시장에게 막대한 자율성을 부여해 주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나타났다. 만약 분자적인 욕망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은 규제와 통제의 대상이 될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소비의 과정으로 재구조화할 것으로 간주된다. 이로서 성장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결합된 형태로 이행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인 성장주의가 기존 국가주도형 성장주의와 차이를 갖는 점은 시장이 분자적인 욕망을 동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네트워크와 인터넷 등이 이러한 욕망 동원의 전자직조적인 그물망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환경 분담금 제로의 외부효과

성장주의의 토건주의, 개발주의, 굴뚝산업 등이 개발이익을 얻는 데 있어 고려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생태복원비용이다. 자연과 생명을 철저히 외부로 간주하고 정립하고 착취하고 개발하면서도 자신의 산업이 만들어낸 쓰레기와 불순물, 공해, 오염물 등을 무단으로 방류하거나 투기하는 것이 성장주의의 본래의 모습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이후에도 역시 제 3세계에 공장을 옮겨다 놓고 얻는 이득의 많은 부분이 바로 생태복원비용을 치르지 않음으로써 갈취하는 비용이다. 이러한 환경 분담금 제로로 인한 자연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갈취와 착취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을 외부효과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엄밀히 기후변화, 생물 종 대량멸종, 해양생태계 오염 등등의 항목을 차분히 점검하다보면 사실상 개발이득보다 생태복원비용이 더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바로 성장주의는 지구생태계에 대한 총 비용을 계산하고 소수의 이득이 아닌 다수의 행복을 점검해 볼 때 더 마이너스가 되는 요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은 사실상 외부효과를 통해서 성장의 원동력을 삼는 것을 숨은 전제로 갖고 있다. 자본주의적 진보는 결코 더 나은 삶과 지구생태계의 안녕과 번영을 약속하지 않는다. 몰적인 이익과 이해를 위한 자원-부-에너지의 집중과 수렴은 생명과 자연을 외부를 전제해야지만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생태주의는 처음에는 자연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화석연료가 아닌 유기물 순환, 약탈과 착취가 아닌 돌봄과 북돋음, 대지에 대한 부드러운 사용, 착취가 아닌 공생 등의 의미에서 출발한 것이 생태주의의 시작점이었다. 대지의 불모화는 제 3세계 민중들의 저항을 만들어냈고, 생태주의의 문제제기를 촉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자적인 욕망들의 문제제기는 국가의 강권과 자본의 도주를 그려낼 뿐이었다. 성장할수록 자연과 생명이 병들어 간다는 외부효과를 감춘 채 진행되어 왔던 성장주의의 일그러진 단면은 바로 몰적인 질서의 독재 즉 국가독재인 성장주도형 국가시스템과 자본독재인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딛고 올라선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성장주의의 끝자락에 결사체로서의 협동조합이 발아하고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생태주의, 생명사상, 유기농업, 환경보전, 젠더적 불평등, 정동과 돌봄 등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외부로 간주되었던 자연, 생명, 소수자, 어린이, 동물, 식물 등을 외부효과와 같이 오염시키고 파괴함으로써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던 것에 대한 강렬한 반발과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라는 문명의 등장으로 인해 자연과 생명, 소수자, 민중은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와 있는 상황이지만, 자본주의는 유독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여전히 낯선 외부를 대하듯 대상화시킨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국면에서 협동조합은 마치 비자본주의적인 이상향, 다수의 협동이 만든 꿈, 자연과 생명의 위한 생명운동 등의 형태로 실체화된다. 이에 따라 성장주의의 끝자락에서 진정한 외부를 약탈하는 외부효과가 아니라 외부를 긍정하고 연대하는 외부효과 즉 진정한 외부효과는 협동조합의 등장을 배태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음 편에 계속)

이 글은 모심과 살림연구소 『생명을 살리는 전환』 연구과제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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