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시스- 사유하는 행동이자 행동하는 사유
Is the ecological thought thinking about ecology? Yes and no. It is a thinking that is ecological, a contemplating that is a doing. Reframing our world, our problems, and ourselves is part of the ecological project. This is what praxis means―action that is thoughtful and thought that is active. Aristotle asserted that the highest form of praxis was contemplation. We shouldn’t be afraid to withdraw and reflect.
p.8-9, Introduction: Critical Thinking, 『The Ecological Thought』
생태적 사유는 생태학에 대한 생각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생태적인 생각이고 행동하는 사색이다. 우리의 세계, 우리의 문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새로운 틀로 바라보는 것이 생태적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진정한 프락시스(실천)란 바로 이런 것이며 사려 깊은 행동이자 활동적인 사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높은 형태의 실천은 관조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물러남과 심사숙고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p.8-9, 서문: 비판적 사고, 『생태적 사유』
강렬한 문장으로 다가온 날의 기록 1:
It is a thinking that is ecological, a contemplating that is a doing.
This is what praxis means―action that is thoughtful and thought that is active.’
이 두 문장이 비슷한 구조이면서 뜻도 비슷한 듯 다른 듯해서 계속 들여다봤더니 그림이 떠올랐다. 모튼 선생님은 이런 그림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니 놀랍다.

왼쪽 그림 ‘프락시스(실천)’을 보면, 드러나는 부분은 명사(집)로 ‘행동’과 ‘사유’이고, 바탕은 형용사(지하)인 ‘사려 깊은’과 ‘활동적인’이다. 그리고 역할을 맞바꾸며 ×로 대칭된다. 사유와 행동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단단한 집을 짓고 있다.
오른쪽 그림 ‘생태적 사유’는, 왼쪽 그림과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부분은 명사(동명사)이다. 그런데 ‘생각하기’는 ‘생태적인’이라는 형용사이지만 ‘관조’ 바탕은 명사(동명사)인 ‘하기/행동’이다.
ⅰ. ‘관조’의 바탕은 왜 ‘명사일까?
글이든 그림이든 개념을 표현하면 분리되어 보이지만 실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일 것 같다. ‘관조’는 그 자체로 ‘하기/행동’이다. 멍 때리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틀로 보고 있는 중이다. 명사에 숨은 동사 찾기를 의도한 것이 아닐까.
ⅱ. ‘action’과 ‘a doing’은 모두 ‘행동’인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action’은 ‘ready’(준비)라고 외치는 소리에 시작되어 ‘cut!’하면 끝날 것 같다. ‘액션을 취한다’는 표현에서 보듯 주체적, 능동적, 적극적인 느낌이 든다. 깊이 생각하는 뒷면과 꼭 붙어 있는 외부로 향하는 행동이 프락시스(실천)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어쩌면 ‘사려깊은(thoughtful)’이라는 형용사가 바탕이 되지만 어떤 깊이일지는 개인차가 있겠다. 내 경우에 솔직히 액션은 ‘기후위기 시대에 텀블러를 쓰자고 하길래, 종이컵 쓰는 것이 좀 찔리긴 했어. 환경 보호 해야지. (나름대로 thoughtful) 레디~ 액션! 텀블러 산다. 컷! 하며 행동완료’라는 느낌이다.
‘a doing’의 ‘do동사’는 모든 행동에 쓰는 일반적인 말이다. 그러니 어떤 일(행동)을 하건 ‘관조’할 수 있다면 최고의 프락시스가 된다. 나는 ‘기후위기 시대에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씁시다’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텀블러를 사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텀블러를 사러 가고 있었다. 텀블러를 고르고 있었다. 텀블러 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 모든 현재진행형 액션이었던 행동에 관조를 더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후위기 시대에 텀블러를 쓰자고 하길래, 나도 사봤어. 예쁜 거 고르느라 한참 걸렸네. 근데 텀블러 쓰는 게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거 맞겠지?’라고 생각하는 듯한, 대사도 없는 행인1 같은 나를 발견한다. 지금 당장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 위기감, 공포감, 죄책감을 안고 자동차를 끌고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제로 웨이스트샵에 가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하고’, ‘나는 ~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아닌 무수한 인간·비인간 존재와 내가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만들어진 환경 속에 나도 동참해 텀블러가 된 철광석, 고무 패킹이 된 석유, 포장지가 된 나무, 기후위기를 알려준 징후, 뉴스, 캠페인… 고작 내가 한 건 이런 흐름에 같이 흘러간 것뿐이다. 이것을 ‘관조’라고 할 수 있을까?
강렬한 문장으로 다가온 날의 기록 2: Yes and No
Is the ecological thought thinking about ecology? Yes and no.
“생태적 사유는 생태학에 대한 생각일까?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
‘about’에서 생태학을 연구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태도라고 생각이 드는데 굳이 ‘No’라고 하지 않고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해서 추가할 것이 더 있다고 표현해도 될 텐데 굳이 왜 부정을 했을까 생각해 본다. (이 에세이를 쓰면서 표 만드는 실력이 늘어간다)

대조해 놓고 보니 생태적 사유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텀블러를 샀어. 그런데 이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뭐지? 생태적 사유가 시작되면 어떻게 되지? 그때는 뭘 해야 할까? 지구, 우주가 무대라고 생각해봐. 나(인간)는 주인공이 아니야. 조연급도 아니고 단역이나 소품일 수 있어. 시나리오에 단역이나 소품이 등장하는 이유가 있잖아. 더구나 나는 알게 모르게 무대를 관찰하고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수정해 가고 있어. 이 시나리오는 늘 고쳐지는 중이야.(왜 시나리오냐면, 영화가 연극보다 스케일이 크잖아.)
그래도 뭐라도 하고 싶어. 그런데 내가 발을 디딘 발판이 없어지고 둥실 떠올라 어지러워. 흐름에 몸을 맡기고 둥둥 흘러가고 싶은 마음과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이 같이 있어.
에포레카멘(ἠπορήκαμεν): 우리는 길을 잃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분명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들이 ‘존재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당신들이 본디 의미하고 있는 그것에 친숙해 있다. 우리도 전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은 당혹스러움에 빠져있다. (…… δῆλον γὰρ ὡς ὑμεῖς μὲν ταῦτα πάλαι γιγνώσκετε τί ποτε βούλεσθε σημαίνειν ὁπόταν ὄν φθέγγησθε, ἡμεῖς δὲ πρὸ τοῦ μὲν ὠιόμεθα εἰδέναι, νῦν δ᾽ ἠπορήκαμεν……)”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2025, 15쪽
모튼의 사유를 따라가다 만난 하이데거의 책 ‘존재와 시간’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시작한다. 그냥 넘어갔는데 계속 그리스어가 나오니 어느 순간 읽고 싶어져 그리스어 알파벳을 찾아봤다. 그리고 다시 읽은 첫 문장에서 2,500년 전 플라톤이 당혹스러움에 빠졌다고 말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에포레카멘 ἠπορήκαμεν 현재완료 1인칭 복수 (우리들은) 당황해있다. 미궁에 빠져있다.
아포레오 ἀπορέω (없다 ἀ + 길 πόρος + 동사화 어미 -εω)
아포리아 α̇πoρία 명사형, 길이 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 미궁, 난관, 막다른 골목, 해결 불가능한 모순
모튼의 생태적 사유를 이해하고 싶어 시작한 여정은 라깡의 초대장을 받아 들고 바다로 출발했음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막막한 심정을 딱 짚어주는 말인 것 같다. 길을 잃은 게 길인가? 하는 멋진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것도 길을 찾기 위한 인간의 선언 같아 부끄러워진다. 내가 단역이든, 소품이든 ‘2026년 지구’라는 영화에 등장하니 시나리오 정도는 읽어야 하겠다.
조약돌 열 둘 : 관조
에세이를 써갈수록 점점 더 느리게 읽고 느리게 생각하게 된다. ‘관조’를 조약돌로 놓으며 나를 떠올린다. ‘202×년 지구’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서 취향에 맞는 텀블러를 고르던 내 모습은 진지하게 위선적이라 블랙 코미디 같다. ‘2026년 지구’라는 영화에서 ‘아! 무슨 인간이 이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늦은 밤 전등을 켜고 노트북을 켜가며) 쓰고 있는 단역의 자리에서, 겨우겨우 지구와 생태적 사유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추신1. 길을 잃었다는 에세이 제목을 생각한 것은 지난 에세이를 쓴 직후였다. ‘생태적지혜 개념어 사전’의 텀블벅 펀딩에서 ‘각자도생의 시대,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은 순간,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었습니다’를 느꼈다.
*추신2. 이번 여름에는 바다에서 패들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어제 했다. 오늘 에세이를 쓰면서는 ‘코어 힘이 약해 얼마 못 가 보드에 가만히 앉거나 눕거나 엎드리겠지. 그러면 어때. 눈을 감고, (불안하니까 틈틈이 눈을 뜨고) 바다에 둥둥 떠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6년 지구’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패들보드를 타는 단역으로 출연 예약.
Platon, Sophistes(『소피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