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일본에서 미술 작가로 활동 중인 친구 J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술에 취한 채 타국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을 토로했다. 작가로서 겪는 어려움, 사람들과의 갈등, 건강 문제까지 이야기가 깊어지면서 통화는 어느덧 30분을 넘겼다. 그러던 중 J는 문득 “나는 너와 다르게 고기도 먹는데…”라며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냈다. 평소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적 없던 친구라 의외였고, 그 말이 인상 깊게 남아나는 다음 통화에서 다시 물었다. “너 그때 그 말 기억나?” J는 어리둥절해하며 “내가 그런 말도 했냐?”고 되물었지만, 잠시 생각을 하더니 최근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신 날, 한 동료가 고래 시체로 만든 육포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J는 “어떻게 인간과 유사한 지성체인 고래를 먹을 수 있느냐”며 반문했다. J는 고래도 먹어선 안 되지만, 일본에서 유통되는 고래 고기 중 상당수가 실제론 돌고래일 가능성이 높고, 그 돌고래들이 끔찍한 방식으로 학살된다고도 말했다. 설전이 이어졌고, 분위기는 점차 격해졌다. 결국, 동료는 “그렇다면 너는 소나 돼지도 먹지 말았어야지. 오늘도 먹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그 자리에서는 “소나 돼지는 돌고래와 다르다”고 답했지만, 이후 J는 그 말에 모순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J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고래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의 친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예전에 난 그에게 고래를 왜 그토록 좋아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백령도에서 보냈고, 아버지와 함께 바다낚시를 하던 중 처음 고래를 보았다고 한다. 해 질 녘, 노을을 등지고 바다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며 반짝이는 물보라를 만드는 고래의 모습에 매료되었고, 이 추억은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중한 장면이라고 했다. 그 후로 고래에 큰 관심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돌고래 학살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더 코브(The Cove)》를 보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게 됐다. 슬픔과 미안함 속에서 고래와 돌고래에 대한 애착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더 코브》에선 사람들이 돌고래를 얼마나 잔혹하게 학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매년 일정한 시기, 돌고래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 수십 척의 배가 매복한다. 돌고래가 나타나면 배 위에서 굵고 긴 철봉을 바닷물에 담근 뒤 망치로 두들겨 괴로운 소리를 내어 돌고래들을 좁은 만으로 몰아넣는다. 돌고래가 모이면 출구를 그물로 막고, 지칠 때까지 기다린다. 이후 상처 없는 어린 여성은 납치돼 전 세계 수족관에 고가로 팔린다. 우리나라에도 이 방식으로 수입된 돌고래들이 있다. 남은 돌고래들은 기다란 작살로 무분별하게 찔러 죽이고, 토막 내어 판매한다. 몸을 난도질당한 돌고래들이 극심한 고통에 겨워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만들어내는 핏빛 물보라는 잔혹 그 자체다. 돌고래들이 뿜어낸 피로 바다가 붉게 물들어 활동가들은 이날을 ‘레드데이’라 부른다. 약 15년 전, 이 다큐멘터리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이 ‘전통’이라는 이름의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 해마다 약 5,000마리의 돌고래가 죽임을 당한다. 이에 가담하고 있는 약 50명의 남성은 ‘돌고래 학살을 금지하면 생계가 막막해진다’고 호소하지만, 실제로는 이 지역의 부유한 기득권층이라 한다. 최근에는 학살 현장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안가 전체에 천막을 설치하고, 돌고래를 찌른 뒤에는 상처 부위를 막아서 바다가 피로 물들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는 동물권뿐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동물복지조차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다.
J는 돌고래들을 각기 개별적인 지성체로 인정하며, 인간과 다름없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서 소와 돼지를 먹었고, 이를 동료가 지적하자 명쾌한 답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소나 돼지 역시 고유한 지각 능력을 지닌 존재이며, 본능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J도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 명백한 사실을 우리가 체감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인간에 의해 고기로 태어난 것만큼이나, 우리 또한 어렸을 때부터 그들을 고기로 대하게끔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약 100년 전만 하더라도 가축은 단순히 고기를 위한 존재는 아니었다. 울타리 안에서 농사의 부산물을 먹으며 인간으로부터 음식과 안전을 받았고, 그 대가로 노동력을 보태거나 퇴비로 사용될 똥오줌이나 식용 가능한 달걀이나 젖을 주며 인간의 삶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수명이 다한 뒤에야 도축됐다. 과거 역시 인간이 동물을 이용했지만, 그 사이에는 최소한의 호혜성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실내 사육이 가능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가축은 점차 ‘고기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더 많은 동물을 좁은 공간에 욱여넣은 채 육종과 약물로 빠르게, 비대하게 만든 뒤 몸만 컸지 아직 아이일 때 도축하는 방식이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보편화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공장식 축산의 정점에 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취와 오염 탓에 대형 농장은 혐오시설로 간주하여 외곽으로 밀려났고,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그 존재조차 알기 어렵게 되었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동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죽이기만 전문으로 하는 곳 역시 필요했다. 그렇게 도살장이 생겼으며, 그곳에 울리는 비명이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일반에 공개된 도살장은 세상 천지에 단 한 곳도 없다.

동물의 조각난 몸은 마케팅의 포장을 입고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마케팅은 열악한 농장의 실상, 학대당하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동물들의 모습, 대량으로 쏟아지는 분뇨와 항생제 탓인 토양 오염을 우리 눈에서 감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보지도, 볼 필요도 없게 한다. 국가가 부여한 각종 인증 마크는 우리를 의심 없이 안심하게 한다. 포장지에 인쇄된 이미지는 너무도 평화로워 천국을 연상케 한다. 광고 속 유명 인사들은 연신 웃음을 지으며 조각난 고기를 먹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인 양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공장식 축산의 더러운 현실을 본인의 깨끗한 이미지로 세탁한다. 사람들은 맛의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이 시스템이 씌워준 눈가리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고기로 길러지는 존재들을 마음도 지각도 없는 ‘것’으로 격하시킨다. 그들이 적당한 공간에서 사료를 먹으며 고통 없이 ‘인도적으로’ 도살된다고 막연히 믿을 뿐,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5살 아이와 같은 지능을 가진 돼지가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갈 때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은, 그 어떤 광고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생명은 갈기갈기 찢겨 고기가 된다. 그러나 사람이 고기가 아니듯 그들 역시 고기가 아니다.
돌고래는 매끈한 몸,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매, 그리고 유려한 헤엄실력을 갖췄다. 만약 돌고래를 만난다면, 대부분 사람은 그것을 저녁 반찬으로 먹을 생각에 입맛을 다시지 않을 것이다. 돌고래는 IQ가 80 이상이며, 위험에 처한 인간이나 다른 종의 동물을 구조하기도 한다. 심지어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가 더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삶을 포기한 사례도 있다. 돌고래는 삶에 대한 의지와 고유한 지각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다른 종과의 소통 능력까지 지녔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이 돌고래와 돼지의 지능이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돼지는 인간이 친구나 가족처럼 여기는 개보다도 IQ가 더 높으며, 성인 기준으로도 정상 범위인 IQ 80을 가진다. 종이 다를 뿐, 돌고래와 돼지, 인간은 개체로서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돌고래를 좋아하고, 개를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면서, 돼지는 아무렇지 않게 죽여 먹는가? 이 질문에 잠시만 집중해도 금세 모순이 드러난다. 사람은 모순을 참지 못한다. 그 긴장을 없애기 위해 행동을 바꾸거나 태도를 바꾼다. 우리가 풍요롭게 누리는 삶이 거대한 고통의 시스템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행동을 바꾸겠는가, 아니면 태도를 바꾸겠는가? 이 모순을 없애기 위해, 돼지를 먹는 것과의 일관성을 맞추려 개나 돌고래, 고양이, 심지어 인간까지 먹는다면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반대로 개는 사랑하면서 돼지는 먹는 이중적 태도를 정당화하려면, 돼지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켜야 하지만, 과학은 이미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다. “생김새가 다르니까”, “개보다 못하니까”, “맛있으니까”, “나와 다르니까” 같은 이유는 모두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려는 자기 합리화이며 이를 ‘종차별주의’라 부른다. 이는 외모, 능력, 경험, 편견 등을 근거로 특정 존재를 차별하는 인종차별, 성차별, 소수자 차별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차별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믿는다면, 인간과 개체로서 별다를 바 없는 비인간 동물도 존중해야 한다. 그들 역시 본능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인간의 이익을 위해 대규모 학살당할 이유는 없다. 먹지 말자. 단순하게 먹지 않으면 대부분 문제가 해결된다. 이제 우리 안의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종차별주의를 넘어 비인간동물의 진짜 모습을 직시하자. 그리고 그들을 구하자.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반종차별주의는 가장 낮은 곳에서의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