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1주기 추모(축)제 특집] ① 떠나지 않고도 여행하는 자

故신승철 1주기 추모제를 기념하여, 이번 행사의 주제인 〈지금 여기 가까이〉에 대해 다루고 있는 고인의 대표적인 글로 『묘한 철학』(흐름출판, 2021) 중 노마드(nomade) 장을 빌려와 제목을 바꾸어 싣는다. 신승철에 의하면, 노마드는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자이며 국지적 절대성을 체현한 존재이면서 범위한정기술자이고 잠재성을 보는 눈이며 ‘지금 여기 가까이’를 응시하는 자이다.

노마드(nomad)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선보인 자유로운 행위양식에 대한 개념입니다. 정주민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아니라, 이리저리 횡단하면서도 국지적인 영역에 대해서 촉지적 감각을 열고 그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곧 노마드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노마드는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전쟁 기계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노마드를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주로 소개하였습니다.

여덟 살 고양이 달공이에게 15평 남짓한 저희 연구실은 우주이자 세계입니다. 달공이는 구로동 인근의 뒷골목에서 울고 있던 엄마 잃은 아깽이였습니다. 다정다감하지만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들이 오면 구석에 숨어서 살짝 밖을 바라보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작은 영토가 갖고 있는 다양한 색채, 향기, 음색, 맛, 등에 민감하기 그지없는 고양이이지요. 달공이는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연구실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둘레환경이 갖고 있는 의미와 질서, 배치 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고양이입니다.

달공이는 다른 고양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냥놀이를 하다가 지치면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까치들과 알 수 없는 신호를 교신하기도 합니다. 또한 고양이 화장실 청소를 똑바로 하지 않았다며 집사들에게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늘 그 자리에 있는 물통으로 가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책상 위의 담요에 눕습니다.

제자리에서 여행하기, 범위한정기술.
사진 출처: Pamjpat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도 충만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달공이를 보면 인식의 범위를 제한하고 한정하는 기술, 즉 범위 한정 기술이 떠오릅니다. 이는 현상학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윤수종 옮김, 푸른숲, 2003)에서 종의 영역에서의 리토르넬로(ritornello, 되풀이되는 리듬)를 통한 영토의 기호화, 리듬의 기호화 현상을 설명할 때 이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현상학은 ‘우리의 앎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으로 앎은 모든 것에 대해서 열려 있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범위로 한정시켰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을 피력합니다. 이렇게도 얘기해볼 수 있습니다. 사방의 모든 소음과 잡음에 반응한다면 저는 어떻게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만약 제 무릎 위에 올라온 달공이의 갸르릉 소리, 컴퓨터 소리, 은은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부터 부엌에서 들려오는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까지 저를 둘러싼 환경에 제 모든 감각이 열려 있다면, 저는 책을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경계는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하겠지만, 일정한 범위로 신경과 감각을 집중했을 때라야 비로소 인식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즉 범위 한정 기술은 인식의 성립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량이 많아야 앎이 성립되는지, 적어야 성립되는지의 문제도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는 환경에서 앎과 인식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량의 정보를 분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 이내 지칠 테니까요. 오히려 정보값이 적을수록 앎이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정보 엔트로피 값이 높을 경우에 앎이 성립된다는, 배움에 대한 기존의 교육관은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달달 외우는 식의 수용자적 태도로 공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보 엔트로피 값이 낮아야 비로소 ‘습(習)으로서의 앎’을 체득할 여지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도예 장인의 문하에 견습생으로 들어가면, 처음 일 년 동안 불만 지피고, 그 다음 일 년 동안 흙만 반죽하는 방식으로 훈련하던 것이 습으로서의 앎을 획득하는 과정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정해진 일들을 반복적으로 행함으로써 불의 상황, 흙의 상황을 충분히 익히는 것이지요. 고양이 달공이 또한 좁은 연구실에 머물지만 범위 한정 기술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혜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저는 달공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쓰다듬으면서 대부분 작업을 합니다. 달공이는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화면 속 세상에 대해서도 이따금 관심을 보입니다. 물론 범위 한정 기술에 따른 작은 세계 속 사건이지만 말이지요. 달공이는 모든 감각을 자신이 머무르는 장소 한곳에 집중하여 촉지적 공간을 열어냈습니다. 촉각과 느낌으로 자신이 사랑받는 중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한 것이지요. 달공이에게는 연구실이라는 가장 국지적인 장소가 자신의 느낌과 감각이 아로새겨진 거대한 우주와도 같은 곳입니다. 달공이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담요와 방석이 놓인 공간에는, 외부와 격리된 실내 환경의 따뜻함과 부드러움, 달콤함 같은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양이의 노마드, 노마드의 고양이

역사 속에서 야생의 고양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노마드, 즉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유랑하듯 서식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고양이들에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인간 사회 속으로 뚜벅뚜벅 고양이가 스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랑하던 자신의 습성을 놀랍게도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습성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서 고양이가 인간 사회에 들어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개는 인간이 길들였지만, 고양이는 인간을 길들인 것입니다. 고양이가 인간 사회에 등장한 것은 하나의 파문입니다. 이토록 독립심 강하고 언제 노마드로 변신할지 알 수 없는 동물이 인간 사회에 떡하니 자리 잡은 것이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동물을 길들인다는 설정과 목표를 인류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고양이가 인간을 길들이는 우아한 과정에 인류가 적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 에서 유목민, 즉 노마드의 철학을 펼칩니다. 이를 두고 천규석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 사, 2006)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이 등장한 신자유주의를 예감한 역사적 무의식의 발호라고 말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 은 정주민 유형의 국가주의에 맞서 자유인, 유랑인, 예술가 유형의 노마드 중심의 자유로운 사유 체계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 책에 등장하는 ‘왕립과학’과 ‘유목과학’의 대조는 매우 독특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왕립과학은 전문가들을 등장시켜 기획하고 설계하는 방식이고, ‘~은 ~이다’라는 정의를 바탕으로 대답을 내리는 아카데미의 작동 원리를 따릅니다. 이에 비해 유목과학은 공유지에서의 노하우나 장인의 지혜처럼 ‘~은 ~일까?’라는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원리를 갖고 있으며 존재 자체로 물음표를 던지는 생명, 아이, 소수자의 학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왕립과학과 유목과학이 ‘대답인가? 문제 제기인가?’라는 지점에서 대조적인 입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답은 본질이나 이유에 대해서 빤하게 알고 있다는 방식의 태도를 취하게 만듭니다. ‘나는 전문가니까’, ‘나는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으니까’, ‘나는 단정 내릴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 등의 맥락이 여기에서 형성되겠지요. 그러나 문제 제기는 본질과 이유가 아닌 작동과 양상을 응시합니다. 하나의 문제 제기에 대답이 여럿일 수도, 모두가 대답일 수도, 대답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대답이라는 설정은 사물과 표상의 일대일 대응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정답을 갖고 있는 데 비해, 문제 제기라는 설정은 사물 속에 숨어 있는 다채롭고 풍부한 잠재성을 바라볼 여지를 만들어냅니다. 그런 점에서 왕립과학은 표상주의에, 유목과학은 구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상주의의 입장에서 대답은 하나이지만, 구성주의의 입장에서 대답은 여러 개일 수도, 모두일 수도, 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표상주의는 객관적 진리론이라고 일컬어지고, 구성주의는 ‘앎=함(행동, 실천)=삶’의 지혜라고 불립니다. ‘~은 ~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짜릿한 권력의 희열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물, 생명, 자연, 기계 등의 잠재성과 깊이는 하나의 의미로서 ‘~은 ~이다’라고 쉽게 단정 지어지고 정의 내려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사물, 생명, 자연, 기계에는 수많은 의미, 표상,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왕립과학은 기능, 역할, 직분, 본질, 이유에 대해서 쉽게 정의 내리는 전문가연한 사람들을 양산하는 학문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유목과학은 생명과 자연의 잠재성을 응시하며 그것들이 던지는 거대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깊이 사색하는 학문의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노마드는 일종의 실험이자 실천입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늘 횡단하고 이행하고 변이하는 사유와 행동의 양상이 바로 노마드입니다. 노마드는 이동의 측면에서는 모빌리티(mobility)와 유사하지만 행동 및 사유 방식에서 차이를 가집니다. 이를테면 이미 장소와 스케쥴이 정해진 관광과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여행의 차이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모빌리티가 관광이라면, 노마드는 여행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 비행기로, 자동차로, 기차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그들이 모두 노마드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지적 영역에 머무르면서도 둘레환경에 대한 촉지적 감각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사랑과 지혜가 가득하다면 그 사람이 바로 노마드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진 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여행을 떠나는 행위는 노마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들의 깊이와 잠재성에 대한 촉지적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접하지 못한 색다른 환경과 접속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국지적 절대성,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

우리 거실 안의 여행자, 고양이.
사진 출처: Daga_Roszkowska

어린 시절 길냥이 한 마리가 잠시 저희 집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들어온 녀석에게 저는 먹다 남은 밥을 된장국에 말아서 내밀었지요. 그것을 맛있게 받아먹고 나자 녀석은 제집인 양 마루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습니다. 녀석은 그 후로 몇 달을 저희 집에 머물다 어느 날 홀연히 떠났습니다. 그는 노마드 고양이였습니다. 제게 가깝고 친근하게 대했지만, 구속, 간섭, 참견에는 거리를 두고 경계했습니다.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동시에 자신의 장소에 대한 애정과 감각은 누구보다 발전되어 있었지요. 아마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찰나의 순간과 둘레환경의 느낌에 더 충실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 전 세계를 여행해야 할까? 아니면 가까이 있는 사람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엄밀히 말해 둘 다 맞는 얘기입니다. 멀리 떠나더라도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면 유목민이 아니고, 가까이에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새로움을 발견하고자 하면 정주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들은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자신이 머무르는 장소에 대한 독특한 촉지적 느낌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떠나는 노마드, 즉 이행하고 횡단하고 이행하는 노마드와 머무르는 노마드, 즉 둘레 환경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고 시추하는 노마드로서의 면모를 둘 다 갖고 있는 셈이지요. ‘머무르는 노마드’라는 개념에 대해 역설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공간, 인물, 대상으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할 줄 안다면 그것은 전 세계를 떠돌아다닌 것에 필적하는 노마드인 셈입니다.

국지적 절대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오해들이 있습니다. ‘국지적으로 머무는 행위로 어떻게 노마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중 하나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고양이들을 관찰하다 보면 얻을 수 있습니다. 고양이들은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장소 귀속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동네 길냥이들은 더 멀리 나가지 않고 늘 전방 2~3킬로미터 내에서 생활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아주 조금씩만 영역을 넓혀갑니다. 길냥이는 자신의 영토에 대한 촉지적인 감각은 발전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디론가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고양이가 살아가는 가까이에 있는 둘레환경의 근접성, 인접성, 국지성, 유한성을 잘 들여다보면 인생의 진실이 느껴집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빤하게 보는 것만큼 자신의 세상을 닫히게 만드는 일도 없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 인물, 생명, 대상에게 우주와 자연, 생명, 양자(陽子), 미생물의 잠재성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소강절(邵康節)은 ‘이물관물(以物觀物)’이라는 개념을 얘기합니다. ‘길가의 돌멩이에서 우주의 신비를 본다’라는 의미입니다. 동학의 경물사상(敬物思想) 역시 유사한 깨달음을 주지요. 세상에 빤하게 볼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세상 만물이 공경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 사물, 생명, 자연을 빤하게 바라보지 않고, 그것들의 잠재성과 깊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표상, 대상, 형상이 아니라, 문제 제기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앞의 대상은 수많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고, 변용될 수 있으며, 수많은 대답을 품고 있습니다. (잠재성은 생명과 자연의 심오한 깊이 속에 사랑과 변용의 ‘신이 위치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인 사유는 사물, 생명, 자연, 사람 등 모든 가까이에 있는 대상에 신적 속성으로서의 사랑과 변용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주만물의 질서가 돌멩이 하나에 깃들어 있다는 소강절의 사상처럼 대상의 잠재성과 깊이를 시추하다 보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생명들의 위대함과 광활한 삶의 지평과 만나게 됩니다.

세상에 뻔하게 볼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세상만물이 공경해야할 대상임을 알려준 고양이 달공이. 사진제공 : 철학공방 별난

앞서 말했던 고양이 달공이는 사람들이나 손님들이 찾아오면 깊고 깊은 곳에 숨어버리는 수줍음이 많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심 달공이가 원래부터 사람을 꺼리는 고양이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날 저녁, 언제 그랬냐는 듯 달공이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탁자 한가운데에서 활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더니 탁자 가운데에 떡 앉아 그루밍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더군요. 그뿐인가요. 앞에서 강의를 하던 제 무릎에 앉더니 제 목소리에 맞추어 야옹야옹 소리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와하하 웃어버리고 말았지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던 달공이가 멋진 발표자가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달공이는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웃음을 터뜨렸지요. ‘달공이는 원래부터 수줍음이 많은 고양이야’라고 단정 던 제 생각은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달공이는 그동안 모모를 볼 때마다 하악질을 하며 싫어하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모가 놀다가 다쳐서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내자, 갑자기 달공이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모모에게 보내더니 등을 핥아주고 사료를 먼저 먹으라고 기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만은 우애 깊은 고양이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원래부터 모모랑 달공이는 친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저의 고정관념이 유감없이 빗나가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모모와 달공이는 형제애가 깊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배치가 아니면,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고 지긋이 바라보면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합니다.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에 대해서 쉽게 단정 내릴 수 없듯이 우리 곁의 사람도, 사물도, 자연도 쉽게 단정내릴 수 없습니다. 그 내면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깊고 깊은 잠재성의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마드 고양이를 발견했을 것이고

저희 부부는 출퇴근길에 길냥이를 보면 한 주먹씩 사료를 나눠주곤 하는데, 요전 날 집 근처에서 굉장히 애교 넘치고 익살맞은 녀석을 보았습니다. 저희가 준 사료를 남김없이 먹고 부비고 재롱을 떨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휘익 가버리는 녀석의 신통방통한 능력에 저희는 순식간에 홀리고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그 고양이에게 ‘누룽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노란 털 색깔을 모습을 보고 아내가 떠올린 이름입니다. 저희 부부는 이후로도 몇 번인가 집 근처 골목에서 누룽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누룽지는 자신의 영토에 침범해 오는 고양이가 있으면 가차 없이 하악질을 했습니다. 침해와 간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야생성이 발달한 길냥이였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마드 개념을 내부 환경을 부드럽고 달콤하게 만드는 범위 한정 기술에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기계라는 다소 공격적인 개념으로도 얘기했지요. 전쟁 기계는 자유로운 유목민이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과도 같은 국가 장치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하고, 그것을 넘나들고 횡단하면서 자유를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유인으로서의 행동은 자유 자체를 지키고자 하는 다소 공세적인 행동양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 기계 개념은 잔혹한 전쟁을 일으키는 전사 집단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예술가처럼 세상을 재창조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평화를 위한 전쟁 기계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철학자는 왜 하필 전쟁이라는 개념을 써서 오해를 불러일으켰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전쟁에 필적할 정도의 단절, 분리, 비약, 도약의 획기적인 전환의 방법론을 구상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유목민의 국가 장치를 초월한 행동은 세계화와 글로벌화로 나타난 새로운 행동양식과도 관련됩니다. 즉, 위로부터의 세계화인 자본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인 노동의 세계화에서 비롯되는 이주민, 이방인, 난민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지요. 국경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뒤섞여 살을 부비며 살아가는 일도 전쟁이 불러오는 결과 필적한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마드 고양이 달공이는 오랜만에 지정석에서 일어나서 잠시 식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식사 시간 동안 저는 조용히 달공이에게 여유를 줍니다. 식사 시간이 끝나면 여느 때처럼 달공이는 털 고르기, 장난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것은 바로 달공이가 갖고 있는 삶의 지혜라는 생각도 듭니다. 달공이의 잠재성과 깊이를 응시하다 보면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 뒤에 우주의 진실이 숨어 있는 듯합니다.

● 이 글은 『묘한 철학』(흐름출판, 2021) 〈1부 영원 ETERNITY 고양이에게 배운 행복의 의미〉 중 「Lesson 5 떠나지 않고서도 여행하는 법・노마드」 장(P.65~77)으로, 흐름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생태적지혜》에 제목만 바꾸어 다시 게재함을 밝힙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댓글 1

  1. 기쁘고 행복한 축제에 일원으로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뜻이 함께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생태가족이 될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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