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 돌봄 받을 권리

돌봄 공백과 돌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회’가 필요하다. 늙고 아프고 죽음을 맞는 모든 과정이 한 시민으로서 존엄할 수 없을까? 잘 아플 권리, 돌봄 받을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제 막 20살이 된 남성이 있었다. 가난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도 그는 꿈이 있었다. 글을 쓰고 싶었고, 영화를 찍고 싶었다. 열심히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시작한 20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쓰러졌다. 초등학생 때 이혼하고 둘만 살 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유일한 보호자는 그였다. 응급실, 중환자실, 보호자 동의, 간병 등 낯선 것들과 대면하며 20살을 보냈다. 허약해진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지 못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타박이라고 하듯 일을 나가지 못하는 시간을 술로 채웠다. 환각에 시달렸고 자주 길을 잃었다. 그러다가 또 쓰러졌다. 청년은 영화 제작을 배우기 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병원비와 간병비로 써버린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알코올성 치매가 시작되고, 발등에 화상까지 입는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무능을 손가락질하고, 청년을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청년이 아버지를 그토록 돌보았던 이유는 아버지가 이 사회에서 배제된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인정을 받기보다 못 배운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자신을 자책하는 한 노동자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를 돌보는 효자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시민으로서 사회적 약자인 아버지를 돌본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그는 이 말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돌봄 공백과 돌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회’가 필요하다. 늙고 아프고 죽음을 맞는 모든 과정이 한 시민으로서 존엄할 수 있도록 말이다. by Bruno Aguirre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uLMEcr1O-1I
돌봄 공백과 돌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회’가 필요하다. 늙고 아프고 죽음을 맞는 모든 과정이 한 시민으로서 존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사진 출처 : Bruno Aguirre

이 이야기가 흔치 않은 사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저소득층에게만 해당하는 사례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지금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큰 공백을 드러내기도 한다. 바로 ‘돌봄’의 공백이다.

지금 한국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2025년이 되면 인구의 20.3%인 1051만 명이 고령 인구다. ‘총부양비’를 보면 고령화 속도가 더 실감이 난다. 2067년이 되면 생산가능인구 100명당 120.2명을 부양한다. 돈을 버는 사람 모두가 경제적 부양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인구학적 조건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줄까?

지난 2018년 서울신문에서 가족 간병을 하는 325명을 인터뷰했다. 대부분 간병으로 인해 직장과 학업 등 사회 활동에 제한을 받고,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아픈 사람을 돌보다가 자신의 건강 또한 악화됐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에서 자주 반복되는 ‘간병 살인’은 모든 걸 감당했던 가족 돌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이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돌봄과 아픔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다. 겪기 전에는 몰랐던 일들이 일상으로 밀려들어 온다.

부모 부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유경이 2019년 발표한 <사회변화에 따른 가족 부양 환경과 정책 과제>를 보면 1998년 부모 부양을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는 비율이 2%에 불과했지만, 2006년에는 50.6%로 급상승했다. 하지만 ‘사회’가 아픈 부모을 책임질 방법은 요양시설이나 적은 재가요양 시간으로 관리해주는 정도 밖에는 없다. 가족은 늙고 아픈 부모를 돌보지 않겠다고 하면 노인에게 선택지는 요양시설이나 1인 가구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가족들을 불효자라고 타박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돌봄을 행하는 순간 가족들의 일상 또한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돌봄 공백과 돌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회’가 필요하다. 늙고 아프고 죽음을 맞는 모든 과정이 한 시민으로서 존엄할 수 없을까?

앞서 이야기한 청년은 바로 나다.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일정 정도 꿈을 이뤘다. 꿈을 이루기 위한 대가로 아버지의 존엄은 뒤로 밀린다. 아버지는 현재 요양병원에 입원해있다. 물론 아버지는 병원에서 생활하고 싶지 않다. 나는 묻는다.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돌봄 문제는 많은 이들이 겪었지만 말하지 못한 문제였고, 앞으로 많은 이들이 겪게 될 문제다. 우리 모두 언젠가 아프고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고령자뿐만 아니라 젊은 질병 당사자, 장애인 등 이제 우리는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을 더 집중해야 한다. 잘 아플 권리, 돌봄 받을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제 우리는 돌봄을 어떻게 사회화할 수 있는지, 또 지금 여기에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서둘러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은 서울시복지재단 2020.3 vol.84 복지이슈 〈Today〉에 실린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조기현

무언가 읽고 보는 시간이 삶의 동력이 됐다. 누군가 삶의 연료가 되고 싶어서 무언가 찍기도 했고 쓰기도 했다. 책 , 영화 , 공연 등이 그 결과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