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협력을 통한 새로운 복지- 『래디컬 헬프』를 읽고

『래디컬 헬프』에는 사회복지, 지역사회, 복지실천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실험과 시도들이 담겨있다. 사회적 협동조합 ‘노느매기’의 시작도 그러하였다. 서로의 역량개발과 협력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지역 사회 안에서 다른 조직들과 연대해 나가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우리의 복지국가는 우리가 쓰러질 때 우리를 일으켜줄 지는 모르지만 다시 날아오르도록 도와주지는 못한다.”

힐러리 코텀(저자) TED 강연 ‘망가진 사회적 서비스를 고치는 방법’

카톡으로 날아온 힐러리 코텀의 TED 영상이 들려주는 생생한 현장 이야기와 거기서 탄생한 것이 분명한 그녀의 열정적인 모습에 나는 빠르게 매료되었다. 당장 『래디컬 헬프』를 샀다. 무릎을 탁 치면서 ‘나랑 생각이 비슷하구먼’, ‘그래 여기는 별표를 쳐야 해’라며 연필로 책에 밑줄과 별표를 그어가며 책을 읽어나갔다.

두툼한 책 곳곳에는 기존의 사회복지, 지역사회, 복지실천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실험적인 장치들과 도전들이 펼쳐져 있었다. 나만 알고 있기 아까운 책이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정치인, 시민단체 활동가, 사회복지사, 사회적 경제 관련자 등 두루 읽혀져서 새로운 전환을 함께 공유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한 적은 없지만 사회복지사로 근무한 적은 있다. 노숙인 일시보호시설에서 근무할 때 상급자는 나에게 ‘고달프게 일하지 말고 일거리를 만들지 마라’고 했다. ‘사회복지사답게 일해라’라는 비판을 받곤 했다.

처음에는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사회복지 업무가 많이 이상한가’라는 생각에 머물기도 했다. 전달체계, 보고체계, 업무 매뉴얼에 따라 정형화된 일을 하는 것이 사회복지인가? 짧게 생각해보고 그런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내가 지원하고 있는 수혜자들의 밝은 낯빛을 기억하기로 마음먹었고 새로운 경험과 시도들을 펼쳐나갔다. 함께 반찬을 만들고 나들이를 가고 신용불안을 해소했다. 영화를 보고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자조모임을 지원하고 탁구를 쳤다. 곰팡이 주택에 봉사자들을 조직하여 도배, 장판 등 주거환경개선사업도 진행했다. 보람도 있고 즐거운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냥 그랬다. 나는 주어진 지원금을 효율적으로 보람 있게 쓰는 법에는 익숙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주도적으로 뭔가를 계획하여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었다. 지원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존의 사회복지라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나 역시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준비한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잘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방법을 개발할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귀 기울였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힐러리 코텀 저 『래디컬 헬프』 착한책가게, 2020
힐러리 코텀 저 『래디컬 헬프』 착한책가게, 2020

힐러리 코텀은 책에서 “복지수혜자에게 변화를 지시하거나 치료를 통해 사람을 수리하려고 하는 대신에 그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여건을 넓고 크게 바라보고 다양한 사람 간의 관계들을 통해 서로 돕고 나눔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경험을 통해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의 우아한 듯 보이는 친절함 밑에는 내 자신의 내면을 공격하게 되는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말 나는 번아웃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것, 받으려고만 하는 것, 자기 삶을 소중이 여기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회복지에 회의를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책 뒷부분에도 언급되는, 새로운 복지와 좋은 삶에 대한 성찰에서 나타난다는 협동조합을 그들과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복지는 사람들의 의존성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럭저럭 잘 살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방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이 문장이 마음에 와 닿는다. 새로운 복지는 자기 역량을 개발하고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좋은 일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며 성취를 얻는 것이다. 과거에 노숙을 경험했다면 그때는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는 다소 취약해도 물리적으로는 노인에 비해 기술과 힘이 있으니 더 취약한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힐러리가 말하고 있는 양쪽으로 열리는 새로운 복지의 쌍방향인 것 같다.

그런 시점에서 보고 있자니, 조합원들은 때때로 선택하는 것 같다.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는 문을 열기도 하고 수혜자에게 도움을 주면서 느끼는 보람과 희열로 화답의 문을 열기도 한다. 그 뒤섞인 오묘함이 때로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서로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하는 어떤 시점들이 늘 누구에게나 있고, 그 행간의 침묵도 경청하고 그저 바라봐주는 믿음이야말로 선택과 전환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요즘 부쩍 많이 든다.

힐러리는 『래디컬 헬프』 2부 ‘실험’에서 가족의 삶, 청소년기의 삶(성장하기), 좋은 일(제대로 된 직업과 좋은 노동), 건강하게 살기(웰로그램), 잘 늙어가기(서로 돕는 노년의 삶)으로 나누어 전 생애에 걸친 복지의 형태를 실험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녀가 제일 처음에 시도했던 실험이 잘 늙어가기였다고 한다. 이유는 노년의 외로움은 새로운 시도일지라도 공통의 관심사로 연결해주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환대해주는 그런 모임인 서클을 무리 없이 받아들여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나는 중년의 남성 그룹과 협동조합1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중년의 남성 그룹은 인기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사회복지에서도 아동복지, 청소년복지, 장애인복지, 노인복지는 많이 들어봤지만 노숙인 복지는 등장도 늦었지만 사지육신 멀쩡한 남성분들에게 복지라니…. 에헤이, 어림 반푼 없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래디컬 헬프에서는 관계라는 말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나는 당신에게 관계를 줄 수 없다. 사람을 줄 수도 없다. 또 당신이 무엇을 배우게 할 수도 없고, 지역사회에 소속되도록 할 수도 없다. 지원은 필요하겠지만 우리 각자는 이런 일들을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내 안의 자발성과 동기, 변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면 100명의 사회복지사를 안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복지가 복지기관의 자금줄과 계약 입찰을 위한 성과 입증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빈곤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그라들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만난 노숙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어떤 시점에 어디에서도 그것을 구할 관계와 역량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관계가 빈약하고 사회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중년의 남성 노숙 경험자들은 그렇게 스스로 모여 협동조합 방식으로 일자리를 만들었고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내는 여정을 시작했다. 다른 사회적 경제 조직을 알게 되었고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지도 알게 되었다.

서로 환대를 주고받는 곳, 공동체 속에서 관계가 다양하고 풍성해지는 곳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의 마을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현장이, 지금 시대를 지나가고 있는 사회복지 및 사회활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힐러리 코텀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데 꼭 필요한 네 가지 역량, 즉, 노동과 학습, 건강과 활력, 지역사회에 소속되는 것, 그리고 가족 내부에서나 그 이상에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량이라는 말은 아마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이라는 책에서 처음 접해봤다. 강점관점, 임파워먼트(empowerment)라는 말과는 결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래디컬 헬프』에서도 ‘아마티아 센’의 역량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서 개인 혼자서는 변화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제공하는 혹은 제공받는 많은 도움들은 먹을거리, 일자리, 소득, 주거 등에 영향을 끼치는 광범위한 경제, 사회적 구조이므로 개인 혼자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친절하려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서 즉, 자신이 개입해서 도와야하는 상황과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상황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그 사람이 필요한 기술과 자율성을 기를 수 있게 하는 상황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돕되 나 스스로의 힘으로 내 삶을 개선할 수 있게 도우라.(본문 중에서)

책에서 말하는 안개 속 프로젝트처럼 ‘노느매기’를 시작할 때도 혼자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되었다. 그때 떠올랐던 그림이 협동조합이었다. 조합원들과 모여 갈팡질팡 하며 ‘초점있는 혼돈’을 거치고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내 아이디어를 보태서, 무엇인가를 시도해가면서 지금에 와있다.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 해낼 수 있게 역량을 키워나가고 서로 키워주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 새로운 조직의 형태에는 ‘노느매기’처럼 협동조합과 다수의 사회적기업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조직의 규모를 확장해서 성장을 이루기보다는 구성원의 역량개발과 협력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다른 조직들과 연대하고 협업하면서 확장해나간다.

당신이 미래를 향한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변화의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반대로 내가 소외된 것 같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저항하기도 한다. 성장은 전환에 따른 문제들을 누그러뜨려준다. 우리가 더 많이 성장할수록, 이 새롭고 자유로운 구조에 사람들을 더 많이 포함시킬 수 있으며 전환은 더 원활하게 진행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서 있는 현장을 돌아보게 된다. 힐러리가 자신을 사회활동가라고 칭하고 있는데 괜히 묻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경험했지만 여기에 매이지 않는 사회를 그려본다. 또한 사회구성원, 모두의 삶이 좋은 방향으로 행복해지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실천과 도전을 해본다. 이는 지금의 나와 또 더불어 살아갈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설레임이기도 하다.


  1.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노느매기’는 노숙 유경험자들이 모여서 경제적・정신적인 자립을 꿈꾸며 만든 마을기업이자 협동조합이다.

박상호

사회적협동조합 노느매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노느매기는 경제적취약계층 남성 독신가구들이 모여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고 스스로 돕고 성장하며 마을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창립된 협동조합입니다.
영등포구 주민이 되고 싶은 강서구민이며 새로운 탐험을 좋아하고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며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에너지를 찾아내는 것을 활력으로 여기며 즐겁게 살아가는 중년입니다.

댓글 3

  1. 사회활동가로 일하면서 느꼈던 고민, 사유 잘 들었습니다. 저도 읽어 보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2. 사회복지사로써 한계가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소개해준 책 꼭 읽어야겠어요~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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