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비)인간동족으로서 휴먼카인드다 – 티머시 모턴의 『Humankind』 읽기

티머시 모턴의 『Humankind』 [국내 번역서 제목은 ‘인류’]는 중요한 철학적 저작임에도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로 인해 이해하기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책의 주요 개념들에 관한 이해를 중심으로 접근하면 저자의 주장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 글은 이를 위해 쓴 글이다.

이곳은 안개가 자욱한 산림이다. 길은 좁고, 분위기는 으스스하다. 뭔가 저쪽에서 불쑥 이쪽으로 튀어나와 심장이 쪼그라드는 으슥한 길은 구불구불 이어져 산의 능선에 닿되, 발이 지나가고 있는 이곳이 시야가 훤히 뚫리는 능선까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인지는 도시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야가 열리는 곳이 문득 문득 나타나, 다시 밀림 속으로 이어진 길이 고달프지만은 않은 그런 거무스레한 산길이다.

저자는 독자를 이런 산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곳은 유령(Specter)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유령을 저자는 비인간(nonhuman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비인간 존재는, 그저 꿀벌이나 책상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의 어떤 면모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령성(Spectrality)을 괄호에 넣은 채로는, 우리 자신에 관해 의미 있게 말한다고 할 수 없다.

Timothy Morton의 책 『Humankind』는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2021)에서 『인류』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되었는데, 이 리뷰는 그 번역서를 참고하지 않고 작성되었다.
Timothy Morton의 책 『Humankind』는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2021)에서 『인류』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되었는데, 이 리뷰는 그 번역서를 참고하지 않고 작성되었다.

독자는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아니, 책 표지에 박힌 ‘humankind’라는 글자부터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제시된 것이다. 역자와 출판사가 왜 책 제목을 ‘인류’라고 했는지, 책을 성실히 읽은 독자는 의아하기만 하다. 왜냐면 저자가 책 안에서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되풀이해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humankind는 인간동족(됨)을 함축한다. humankind는 자신이 비인간존재자들과 kindred, 즉 동족1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인간이자, kind한 human, 즉 비인간존재자가 인간과 유다르지 않음을 알아채고, 우정을 비인간 쪽으로 분비하는 인간을, 그런 인간으로 인한 동족됨을 말한다. humankind라는 용어 자체가, 너희가 인간이라는, 비인간과 절연되어 있고 비인간보다 우위에 선 인간이라는 농경 시대의 망집을 떨쳐내고, 인간과 비인간의 동족성을 인지하라는 요청이자, 이 동족성의 인정, 이 동족됨의 실천으로 인류세를 돌파하자는 시대 비전이다.

저자가 건축해놓은 이 언어-레고-산림은 친절과 박식이 요란하게 충돌하며 소음을 내는 희끄무레한 시공이다. 모턴이 느꼈을, 롤랑 바르트 식의 글쓰기의 쾌락이 『Humankind』라는 산에 안개를 두텁게 드리웠다. 쾌도난마라는 말이 있지만, 헝클어진 삼 가닥이 제법 많은 이 산에서 그러나 쾌도는 필요치 않다. 시야를 틔워주는 능선으로 홀연 우리를 데려가는 것 또한 저자이므로.

그러니, 안심하라, 모든 것을 거머쥐려 하는 현미경을 손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안내자의 발걸음을 착실히 따라가면 우리에게 행복이 허락될지니. 하려 하지 말고, 뭔가가 나타나게 내버려 두라는 저자의 권유는, 사실 이 책의 독자에게 먼저 들어맞는다. 나는 독자들에게, 저자가 펼쳐놓는 몇몇 중요한 개념의 소절을 먼저 집중 청취하고, 교향곡 전체의 음미는 뒷전으로 밀어두라고 말하련다.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 세트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자들이 함께 이루고 있는 공생적 실재(Symbiotic Real) 그리고 그것이 표현되는 양식인 연대(Solidarity)이다. 자, 여기서 ‘연대’는 흔히 가정되다시피 당위 같은 것이 아니다. 모턴의 화법은 선불교의 화법을 닮았다─부처가 되려고 하지 마라, 네가 부처임을 깨달아라. 모턴에 따르면, 인간과 비인간은 언제나 공생적 실재를 이루고 있었고, 있으며, 연대는 어디에나 있는, 생물권의 기본값이어서 노력 없이 바로 체험 · 지각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지천에 널려 있다. 동시에, 연대는 사고이자 감정, 정치적 상태[행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대가 지구 표면 위쪽의 “기본적 감정 환경”(Kindle, Loc 294)이라는 점에 모턴은 밑줄을 그어놓는다.

모턴은 조주 선사만이 아니라 노자의 목소리도 낸다. 그가 보기에 연대가 우리 곁의, 안의 실재임을 모르는 이들은 자꾸만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대는 성취과제가 아니다. (성취)하려고 하지 마라, 하려는 의지를 비워라─이것은 노자의 음성이 아니던가? 종교인들의 지구 관리자정신(Stewardship)에 대한 모턴의 비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다. 그가 보기에, 관리자정신은 비인간-인간이라는 거대한 절단[단절, Severing]은 그대로 둔 채, 비인간을 돌보는 좋은 주인-인간을 비전으로 추켜세우는, 절단 자체가 빚어낸 생산물, 절단의 증상이다. 주장은 간명하다─관리자 행세 하려고 하지 마라, 너희가 인간이라는 아상을 버려라, 누구의 권리를 위한답시고 나서지 마라, 되레 그 절단이라는 상처로부터 너희 자신을 먼저 치유하라. 모턴이 지목하는 (우리를 인류세의 비극으로 밀어붙인) 철학적, 문화적, 심리적 병원체는 단연 ‘절단’이다. 인간-비인간의 절단. 인간이 상관자(correlator)가 되고, 결정권자가 되는 인간 공간인 현실(Reality)과 인간-비인간의 생태적 공생의 현실인 공생적 실재(the Real)간의 절단. 저자는 현실과 공생적 실재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그러나 엄격한 구분선이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인간중심주의가 바로 그 구분선이다.

티머시 모턴의 『Humankind』는 이 절단이라는 역사의 고고학이자, 봉합/치유를 위한 철학적 (그리고 정치적) 처방이다. 이 책은 비인간을 포용하는 생태 코뮤니즘(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옹호론이지만, 그 이전에, 절단을 일으킨 농경시대의 유일신론, 농경로지스틱스(Agrilogostics), 그것을 떠 받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물질의 존재론을 제일의 가격 대상으로 삼는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생명-비생명, 인간-비인간 사이에 엄격한 절단선을 그었고, 비인간을 “미소하게, 무한히 두들겨 펼 수 있는 물질”(Loc 824)로 환원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모턴이 보기에, 이 절단과 더불어, 그것에 힘입어 성립한 폭력적[외파적] 전체론(explosive wholism) 역시 우리 시대의 괴물이다. 이 전체론에 따르면, 우주, 신, 생물권, 자연(Nature, 저자에게 이것은 인간이 부분적으로 만들어낸 생산물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공동체 같은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위대하다]. 또한 각 부분은 이러한 전체에 환원 가능하다.

모턴이 보기에 이런 말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실상은, 그런 것이 전연 아니라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실상인데요?─여기에서 우리는 이 책의 백미인 Subscendence라는 개념으로 안내된다. 저월(低越, 아래로 넘어감)이라는 번역어로 소개된 이것은, 내가 보기엔 일차적으로는 ‘못 넘어감’을 함축한다.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언제나) 작다. 즉, 전체는 그 각 부분들을 초월하지 못한다, 달리 말해 무초월[저월]한다. 그리하여 전체가 아니라, 그 각 부분이 풍요롭다. “소낙비는 이 새에게는 일종의 목욕이다. 그건 저 두꺼비들에게는 알을 낳는 연못이다. 그건 내 팔에 닿는 부드럽고 섬세한 후두둑이다. 또한 내가 그것에 대해 몇 개의 문장으로 쓴 바로 이것이다.”(Loc 1743) 소낙비라고 하는 날씨(weather)의 한 양상 또는 소낙비가 그것에 영향을 받는 각 부분적 사물에 부과하는 힘, 그것들에게 뒤엉키는 방식이, 날씨를 일으키는 큰 것, 전체, 즉 기후(climate)보다 풍요롭다. 즉, 기후는 날씨를 무초월[저월]한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 개체, 즉 이 글을 쓰는 이 사람도 일종의 무초월[저월]하는 전체의 성격을 지닌다. 나는 내 몸이 거느린 (입 안의) 보철들과 (39조에 이르는) 박테리아와 나의 눈을 무초월[저월]한다. 모턴이 보기에, 인간 개체는 다른 개체들처럼 “너덜너덜한”, “무초월[저월]적인”, “구멍이 숭숭 난” 존재자이다. 나는 내가 objects라고 여기는 것들, 예컨대 “색과 표면과 음파”에 따라 변색되는 “한 마리 카멜레온 같은 개체”(Loc 1874), 즉 일종의 수용체이자 그 수용의 결과물이다. 즉, 사물[대상](objects)의 침투 없이 나는 없다. ‘나는 감촉될 수 있는 자’라는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의 알맹이다. 인간의 본질이 그 수용성에 있듯, 나의 본질 역시 나 아닌 것에 의해 감촉될(만져질) 수 있는 개체라는 것이다. 저자는, 생태 철학이 감촉(touch)에 관한 완연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그건 감촉함(touching)이 봄(seeing)을 무초월[저월]하기 때문이다.” (Loc 1882) 감촉함이 봄(seeing)과 들음(hearing)을 포괄하는 전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무초월[저월]하는 전체, 봄과 들음을 자기로 환원시키지 않는 전체가 감촉함이다. 더욱이 “감촉함은 낮고, 쉽게 감염되고, 위험하고, 겸손하다.” 또한 “그것은 무초월[저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가깝고, 더 내밀하기 때문이다.” (Loc 1886)

이렇게 읽으니, Subscendence라고 하는 이 신조어의 유령이 얼핏 우리에게 어른거리며, 안개 속에서 우리에게 제 얼굴을 어슴푸레 보여주는 듯하다. 전체를 포괄하며, 전체를 주재하는 초월자(폭력적 전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무초월[저월]하는 자라는 유령의 얼굴을. 기후의 무초월성, 생물권의 무초월성, 인류의 무초월성(“인류는 플라스틱, 콘크리트 같은 자기의 부분을 초월하지 못한다/저월한다” Loc 1894), 개인의 무초월성, 진리의 무초월성─이런 모든 무초월성[저월성]에 눈뜨자는 어느 철학자의 호소가, 심해를 닮은, 거무튀튀하고 해초 냄새 그득한 이 단어에, 유령처럼 나타나, 어른거린다.

저자의 호소는, 6차 대멸종 시대를 헤쳐 나갈 해법으로서 모종의 생태적 알아차림이 긴급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알아차림은 무엇보다도 공생적 실재를 알아차림, 공생적 실재에 참여하는 것이 모든 경제의 근간이라는 진리를 알아차림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주재하는, 진공 같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삼투되고 공유되는 무수한 세계들(꿀벌의 세계, 책상의 세계, 개구리의 세계, 폭포의 세계, 고양이의 세계…)이 지구를 이루고 있다는 진리의 알아차림이다. 폭포도, 고양이도, 나도 “너덜너덜하고, 불충분하고, 구멍 뚫린 세계들”을 거느린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휴먼카인드, 즉 인간동족이라는 깨달음. 모두가 모두에게 손님의 지위일 뿐이라는 깨달음.

흥미롭게도, 나에 대한 새 앎은 암석에 대한 새 앎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진 출처: Zoltan T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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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나에 대한 새 앎은 암석에 대한 새 앎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진 출처: Zoltan Tasi

그리고 이 모든 알아차림은 동시에, 인간 개별자로서 내가 누구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알아차림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이 질문에 저자는 유령(됨)의 존재론과 새로운 행위 이론으로 응수한다. 유령의 존재론에 따르면, 지구 안의 모든 존재자 각각이 하나의 공생적 실재(물)로서 자신과 자신의 유령적 후광을 동시에 거느린다. 영혼은 육체 ‘안’에 있지 않다, 영혼의 처소는 모호하다. ‘안’이야말로 저주할 만한 개념이다. 또한 나는 단순히 행동하지 않는다, 나는 진동한다, 마치 “암석의 작고 가느다란 조각”이 그러하듯. 나는 “툭 치고 툭 처지며, 흐름과 더불어 움직인다.” (Loc 3122)

흥미롭게도, 나에 대한 새 앎은 암석에 대한 새 앎과 다른 것이 아니다. 최대의 말놀이는 ‘Rock’이라는 단어에서 벌어진다. 앞으로 움직이고, 부딪히며 나아가고, 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리저리 진동하는 것인 Rock(바로 Rock[암석]의 한 본질이자 나의 한 본질!)이, Rocking(“유령적인 것, 유령적인 비인간을 포용하는 유령적 행동”이자 “연대에 기초한 행동의 내적 역학” (Loc 2932, 2954), 나와 암석을 동시에 알아차리며 진동함?)이 나와 Rock[암석]을 동족이게 한다, 또는 동족이라고 선언한다.

비인간들과 연대하려면 무위의 존재가 되어 연대하고 있음에, 비인간의 인간 쪽으로의 침범(모턴에 따르면, 스타일을 통해, 상품을 통해 이것이 일어난다)이라는 실재에, 상호부조라는 실상에 눈만 뜨면 된다는 것인가? 그 눈뜸의 장소는 스타필드고? 저자는, 연대가 곧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본 크로포트킨(Kropotkin)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쾌락(pleasure)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리트윗하며 화면 상부로 올려놓는다. 더 많은 쾌락을 요구하자고, 더 많은 쾌락이 생태사회의 원칙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건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쾌락이다. 그러나 누가 이것의 증대를 구현할 수 있을까? 탈인간된 인간, 휴먼카인드가 된 인간, 갓파인 ‘쿠’가 행복하게 살아갈 방도가 곧 자신의 미션이 되고 만 ‘코이치’들, 또는 쿠가 된 코이치들2이 아니라면 누굴까?


  1. Timothy Morton의 책 『Humankind』는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인류』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되었는데, 이 리뷰는 그 번역서를 참고하지 않고 작성되었다. 필자 곁에는 번역서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가 『Humankind』의 특정 용어를 옮길 때 사용한 한국어(번역어)는 『인류』에서 독자가 보는 번역어와 다를 수 있다.

  2. 영화 《갓파 쿠와 함께 여름방학을(Summer Days With Coo)》(2007)

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 물』 5호에 실린 글을 『바람과 물』의 허가를 받아 게재함.

우석영

철학자. 작가. 탈근대전환 연구자.
출판 & 연구 공동체 산현재 대표.
생태적지혜연구소 학술위원.
환경철학회.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제주미래디자인포럼 등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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