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함과 앎의 합 -『앎의 나무』를 읽고

『앎의 나무』는 인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인식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표상’이 아니라 개체가 환경과의 접속을 통해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인식활동은 자신을 조직하는 체계인 생명이 환경에 대해 벌이는 효과적인 행동이며, 인간은 진화의 역사에서 언어와 자기의식을 갖춘 존재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저자들의 인식론은 ‘어떤 세계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하는 윤리학으로 이어진다.

지식에 대한 명언 하나

고등학생 때 ‘성인사이트’라는 소모임을 만든 경험이 있다. 성(性)에 대한 통찰(insight)을 위한 모임 ‘性 insight’.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성교육을 우리가 직접 알아간다는 취지였다. 그때 알게 된 것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었고, 우리의 롤모델은 정희진 님이었다. 그분의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은1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내걸었는데,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계속 곱씹게 되는 ‘인생’ 명언이었다. 어떤 지식은 전문가의 영역으로 대우받고 어떤 지식은 지식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지식도 사람의 일이라서 그렇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세계와 관련된 지식도 인간의 사회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좀 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권력 관계가 ‘첨예하게’ 반영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내가 모르는 나의 ‘맹점’을 찾기 위한 ‘교양 필수’ 같은 노력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서 평범악을 저지르는 ‘순진무도’한 사람들이 되리라. 마이너한 언론을 구독하고 사회구조적 약자들의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접속하는 것은 그래서 유지하고 싶은 윤리적 인식 루틴이다.
 

인식에 대한 인식의 재인식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저, 『앎의 나무』 (갈무리, 2013)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저, 『앎의 나무』 (갈무리, 2013)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 대한 인식’은 나름의 고민과 착각을 낳는다.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알았을 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 정보를 받아들이고 머리가 빵빵해졌을 때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무지의 지’, 겸손한 지적 태도는 독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중한 덕목이다. 하지만 그것은 앎의 또 다른 측면인 힘과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가리키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확한 표상’으로 간주하는 관점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다.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가 공동으로 집필한 『앎의 나무』는 이 지점에서 인식에 대한 신선한 인식을 제공한다. 신선하다고 하면, 1984년 출간된 이 책이 그동안 생물학과 인지과학 등등에 끼친 영향력을 무시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의 진화생물학적 인식론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생소한 것 같다. 인식하는 존재는 주변 환경과 접속 관계를 이루며 ‘상호 섭동’2 작용을 통해 인식되는 것을 창출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실재로서의 세계와 인식을 하는 주체는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몸의 인지과학』 서평을 참조할 것)3

 
안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

위 문장은 우리가 왜 어떤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앎은 곧 함이다.” 앎은 생명체가 환경에 적절하게 반응하기 위해 마련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삶이 곧 인식활동을 낳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신경계는 더 잘 감각하고 운동하기 위해 발달되었고 따라서 심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3세대 인지과학에 해당하는 ‘체화된 인지’의 핵심 전제이다. 이 책의 인식론은 그런 점에서 선구적이다.

또한 반대의 측면에서 우리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등산의 멋짐을 모르는 것은 산행 가이드북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산을 즐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를 위한 직접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일 수 있고, 이것은 또 기후 행동에 해당하는 실천과 경험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그 둘은 재귀적으로 맞물려 있다. 따라서 결론을 반복한다. 앎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표상을 입력받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함께 세계를 산출하는 행동이다.

메타세포체의 윤리

이 책의 미덕은 자연과학에서 윤리학으로 부드럽게 전개되는 흐름에 있다. 과학자가 결론에서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못한 감상적 호소 혹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생물의 역사를 저자의 흐름대로 천천히 따라가면,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식을 하는 존재’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안 존재’의 윤리가 순환적으로 연결되는 성과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언어와 사회 속에서 인간다워지는 존재이고 인간의 윤리는 그러한 연결의 관리와 확장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자기생성(autopoesis)적 조직에서 출발하여 증식을 통해 항상성과 역동성을 갖춘 세포다. 이웃 세포와 공생을 통해 다양한 형태를 가진 신체이며, 부위를 연결하는 신경계를 가지고 다른 동종과 교류한 사회 구성원이다. 그리고 현재에는 개체적 사회활동으로 언어를 만들고 언어를 통해 자기의식을 갖게 된 인간이다. 세포에서 ‘자기’가 된 우리 인간은 이제 비인간 생물과 지구 그리고 기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들과 함께 생존하는 공공적 세계를 만들기 위한 앎이 필요한 때이다.


  1.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

  2. ‘상호 섭동(reciprocal perturbation)’은 특정 환경과 접속한 체계가 서로 간에 영향력을 미침을 뜻하는 용어다. ‘섭동’이란 말이 쓰인 까닭은, 그것이 상대의 상태 변화를 결정하거나 반대로 무산시키지 않고, 자발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일부의 요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각의 색채 인식은 빛에 의해서만 기계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닌 시각자의 생물학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

  3. 마카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가기 – 『몸의 인지과학』을 읽고. 생태적지혜, 2022.1.26

배선우

그동안 썼던 별명들은 한때의 나를 잘 설명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격언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지구를 횡단하며 ‘생활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살고 싶은 길, 살아가야 할 길을 궁리하려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고, 주로 서평을 씁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