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Economy)라는 말은 가정, 가계의 살림살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에야 숫자와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는 요상한 학문과 기술이 되었지만 본래 경제란 가정의 살림살이였고 규모가 조금 커졌을 뿐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는 기반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살림을 잘 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일 수도,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게 안정적으로 가정을 잘 관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수입에 맞게 지출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것이 떠오릅니다. 정기적으로 지출되는 각종 공과금, 집세, 교통비, 통신비, 식비, 교육비, 미래를 위한 저축, 보험료 등 그 항목은 가정의 형편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미래를 위해선 얼마를 남겨두어야 하고 현재는 어떻게 살아갈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균형을 잡아갑니다.

흥미로운 건 사람만이 이런 경제를 꾸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자연도 살림을 꾸립니다. 자연의 구조와 기능을 살피는 학문으로 알려진 생태학(ecology)이 경제학(economics)과 어원이 같은 연유일 것입니다. 생태학이라는 용어가 처음 출현했을 때 생태학은 ‘자연의 경제’라고 인식되었습니다. 자연의 구성원인 식물도 작물도 살림살이를 합니다. 식물의 주 수입원은 태양이 주는 빛과 열에너지로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한해살이를 위한 기반을 마련합니다. 조금 있어 보이는 말로 광합성이라고 합니다. 광합성을 통해 만든 물질을 밑천삼아 식물은 숙고에 들어갑니다. 몸체를 키우는 데는 얼마를 사용할지, 자신을 위협하는 벌레와 짐승들에게 경고를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분배할지, 꽃을 피우는 데는 얼마나 기력을 쓸지, 자식을 얼마나 낳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식물은 주변 여건을 살피고 숙고하며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식물의 경제생활을 인간이 온전히 알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일도 다 모르는 데 하물며 인간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생명의 살림살이를 파악한다는 게 실은 오만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의 관찰과 함께 살아온 내력 덕분에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알아차린 게 있습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물질을 다음 세대를 위해 10퍼센트가 조금 못 미치는 양을 배분합니다. 자연의 경제에 가까운 살림살이를 하는 토종씨앗들도 비슷한 양상을 띱니다.
이와 대비되는 건 근대를 거치며 육종된 종자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가 육성해 보급하는 보급종자입니다. 이 종자들은 토종과는 다른 경제전략을 펼칩니다. 근대에 육종된 작물들은 광합성을 통해 만든 물질을 다음 세대를 위해 20퍼센트 넘게 배분합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토종벼로 보급종 벼의 수확량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새삼 묻게 됩니다. 수확량이 현저히 떨어지는데도 어떤 분들은 토종벼를 계속 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가슴에 품은 이유가 있고 맥락이 있으니 그걸 듣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이 질문은 토종의 살림살이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질의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일단 식물의 관점을 취해 보겠습니다.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의 경제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자기 자식 잘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너도나도 욕심을 부려 적정선을 넘어서면 병해충에 쉽게 무너져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나아가 자식까지 위험에 처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무작정 자식에게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순 없습니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 자신과 집단,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좋은 전략입니다. 일종의 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물의 보험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식물은 혹시라도 모를 병해, 해충, 양분 부족으로 인한 위험 대비를 자신이 혼자 해결하지 않습니다.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일면식이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에게 공을 들입니다. 이 존재는 바로 흙 속 미생물입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만든 물질의 30퍼센트 이상을 뿌리로 보내는데 뿌리로 간 물질은 다시 뿌리 밖으로 보내집니다. 미생물은 식물이 보내준 이 물질을 먹고 살아갑니다.
식물이 자식보다 미생물을 이렇게 극진히 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생물은 식물이 준 음식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식물에게 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양분과 물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식물은 흙 속 미생물과 협력하며 공생하는 관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미생물이 식물에게 주는 양분 속에는 식물이 병에 걸리지 않게 몸을 튼튼히 하는 성분도, 병에 걸렸을 때 빨리 낫는 성분도 있습니다. 해충이 쳐들어와 식물 집단을 공격할 때 다른 식물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식물 입장에서는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자식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선 흙 속 미생물의 도움은 절대적입니다. 자녀의 교육비보다 흙 속 생물 공동체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것입니다. 토종벼는 이런 자연의 경제를 습득했고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자연의 경제와 사뭇 다른 전략을 취하는 보급종은 어떤 보험을 들어놓았을까요? 흙 속 미생물에게 주어야 할 것을 알곡으로 배분하는 전략을 취하는 근대의 종자는 미생물의 도움을 당연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걸 혼자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식물은 애시당초 그런 능력이 없었고 누군가와 협력하는 존재였으니까요. 미생물이 하는 일을 해 주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병에 걸릴까, 해충이 올까, 양분이 부족할까 미리미리 내(사람)가 챙겨주겠으니 너(근대의 종자)는 애 낳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것이 근대 농업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혹여 깜빡하고 방제를 놓치거나 게으름을 피우기라도 했다간 작물이 곤경에 처하곤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급종의 가장 큰 문제는 식물에게 자연의 경제와는 다른 인간의 경제를 당신(식물)이 실행해 줄 수 있는가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여러 사회문제처럼 말이지요.
토종벼를 심는다는 건 맛있는 벼를 심는 것일 수도,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한 낭만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잃어버린 공생의 지혜를 다시 되찾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토종벼를 짓겠다는 사람들이 듣는 조언이 있습니다. 화학비료는 물론 퇴비도 넣지 말 것, 농약 치지 말 것, 무거운 농기계를 가급적 쓰지 말 것 등등.. 이것은 내가 무엇을 더 해보겠다는 것이라기보다 인간 이웃과 인간 이외의 뭇 생명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자 혜안을 구하는 우회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지구상의 아니 우주의 어떤 개체도 개체군도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며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다른 존재와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것, 부부와 자식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공동체(community)에 투자하는 것이 더 건강한 나와 너, 우리, 아이, 가정, 사회를 가꾸어간다는 것, 그것이 바로 토종의 살림살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토종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토종벼 농사를 팀화요(화요일마다 모여 농사짓는 공동체)와 함께 짓고 있어요.^^